제 83화. 괘종시계와 홍위와 희아
윤서가 중전마마께 파격적인 청을 드리게 된 계기는 근정전 월대 위에 세워진 괘종시계에 홍위와 희아가 푹 매료되면서부터이다.
순행 길에서 날 끝에 쇠를 겨우 댄 나무 삽 나부랭이로 길을 닦아야 하는 백성의 노고를 본 이향은 과학 기물을 만들어 보급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고 돌아와 ‘거의’ 완성된 괘종시계부터 근정전 옆에 세웠다.
백성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 학문과 정책에 매진하겠다는 국정 방향을 천명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시계 설치가 마무리되던 날 늦은 오후, 이향은 짬을 내어 윤서와 홍위, 희아를 근정전 앞으로 불렀다. 다음날 있을 공식 제막 행사 전에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우! 아! 우! 아!”
월대 위에 서 있는 거대한 괘종시계를 보자마자 홍위는 꼭 잡고 있던 윤서의 손을 놓고 팔짝팔짝 뛰어가며 괴성을 질렀다.
“아밤마마, 아밤마마! 와! 와! 이거 머에요?”
소리치는 홍위와 달리, 희아는 윤서의 손을 잡은 채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계의 거대한 추와, 그 움직임에 맞춰 딸깍 소리를 내며 위의 톱니바퀴로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를 유심히 살폈다.
“저건 괘종시계라는 거에요. 저 밑의 추가 움직일 때마다 긴 바늘이 삼분의 일 각씩 움직이고요, 그래서 큰 바늘이 열두 개의 눈금을 돌아 한 바퀴 돌면, 저 작은 바늘이 반 시진씩 옮겨가는 것이랍니다.”
윤서가 설명하자 희아가 손가락을 뽑아보며
“일각이 네 번 모이면 반 시진, 자시와 축시 사이는 한 시진.”
중얼거리며 시계의 원리를 이해하려 애를 썼다.
“제가 일전에 가르쳐 드린 숫자 기억해요? 이따 처소에 돌아가서 그 숫자로 어떻게 표기하는지 가르쳐 드릴게요.”
“그 덧셈이라는 거 아니고, 나눗셈으로 하는 거지?”
“예, 맞아요. 시계의 원리는 덧셈 뺄셈보단 곱셈과 나눗셈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해요.”
윤서가 은밀하게 알려준 아라비아 숫자와 간단한 사칙연산으로 조선의 시간을 시계에 적용해 생각할 만큼 희아는 총명했다.
이미 군기시에서 본 적 있는 윤서의 눈에도 높이가 1장(3m), 폭이 3척(1m)이 넘는 거대한 시계가 주는 위압감은 대단히 컸다.
지붕을 제외하고 모두 나직나직한 것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괘종시계는 훈민정음 반포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무등 타고 자세히 볼래?”
규칙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찰칵 찰칵 소리를 내며 그 위 톱니바퀴로 동력을 전달하는 기계 장치에 반해 꽉 말아쥔 양 주먹을 흔들며 정신없이 바라보는 홍위에게 이향이 말했다.
“네! 네!”
이향이 쑥 안아 올리자 홍위는 거침없이 아버지의 어깨를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서로 중첩되어 맞물려 돌아가는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밤마마! 아밤마마! 와, 이 뽀족한 바쿠들이 차차차차 맞문녀 돌다가요.”
(아바마마! 아바마마! 와, 이 뾰족한 바퀴들이 착착착착 맞물려 돌아가요.)
“그래, 작동 원리가 보이느냐? 밑의 추가 일정하게 흔들리면서 톱니바퀴와 연결된 그 딸깍 소리 내는 장치를 건드리면, 그것이 가장 작은 톱니바퀴를 돌게 하고,”
“바쿠들이 서오 연결되어 있떠요.”
(바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향의 어깨에서 손을 뻗어 바늘을 한번 만져 보겠다고 하다가 떨어질 뻔할 정도로 홍위는 흥분해 있었다.
그와 달리 희아는 윤서의 손을 꼭 잡은 채 그저 고개를 한껏 젖혀 올려다보기만 했다.
“저하, 우리 자가도 무등을 태워 보여주세요.”
윤서가 말하자 희아는 ‘여인인데 그래도 되나’ 하는 눈빛으로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희아도 보자꾸나. 위에서 보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훨씬 잘 보인다.”
말하며 이향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홍위는 사내라서 그냥 들어 올려 어깨 위에 올렸지만, 희아는 치마를 입은 여자 아이인고로 이향이 무릎을 굽혀 먼저 어깨 위에 앉게 해야 했다.
멀찌감치 뒤에 서 있던 내관들이 이 모습을 보고 헉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다가왔다.
“저하, 소인이 하겠습니다. 어찌 저하께서 무릎을,”
“물러들 서거라. 딸을 위해 아비가 하는 일이다.”
이향이 희아를 어깨에 태우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또래보다 키가 커 130cm가 훌쩍 넘는 희아는 아버지 이향의 손을 꽉 잡고 열심히 시계를 관찰하다가 문득 물었다.
“추 길이가 달라지면 바퀴가 돌아가는 속도도 달라지나요?”
“오, 잘 알아봤구나. 추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추의 길이가 비례한다. 그래서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추 길이를 여러 번 조절해야 했다.”
“이거, 정말 재밌네요.”
한참 찬찬히 시계의 구성을 뜯어본 희아가 다시 땅에 내려섰을 때 입꼬리를 기분 좋게 올리고 희아가 말했다. 늘 새초롬한 표정의 희아가 드물게 보이는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희아는 영특하고 총명하다. 특히 수 연산 추론 능력이 아주 빼어나.’
윤서는 외투 속으로 이제 조금 봉긋 솟아오른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희아의 고급 교육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날 이후 홍위와 희아는 괘종시계와 열렬하게 사랑에 빠졌다.
홍위는 아예 근정전 앞에 가 살림을 차릴 기세로 아침 수라를 먹자마자 근정전으로 달려갔다.
아침 일찍 시행되는 시계 점검과 수리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괘종시계는 자주 고장 났다. 아직 금속 제련 기술이 부족해 톱니가 부러지거나, 여러 개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다 서로 얽혀 멈추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시계 옆에 기술 관원이 상시 대기해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추를 멈추게 하고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거나, 얽힌 곳을 분해했다 다시 조립해 돌아가게 했다.
홍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찬바람에 발갛게 얼어붙은 손으로 관원이 분해해 놓은 톱니바퀴를 쓸어도 보고 만져도 보고 작은 것 두 개를 집어 서로 맞물리게 해도 보다가,
“자던아, 무등 태어져. 저기 뻥 뚜인 구멍에 이거 한 번 넣어보 꺼야.”
(자선아, 무등 태워줘. 저기 뻥 뚫린 구멍에 이거 한 번 넣어볼 거야.)
하고 스스로 조립해 본다고 나서서 관원들을 곤란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희아가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아서, 윤서는 희아와 홍위 둘 모두를 위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저하, 이거 이렇게 축 두 개가 있고, 끝에 톱니바퀴 형식의 바퀴가 달리고, 이 두 개의 바퀴가 톱니로 맞물리는 줄로 이어지는, 이런 걸 나무 조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럼 이 조각을 홍위와 희아가 조립해 보면, 그럼 톱니바퀴 원리와 축의 동력 전달 원리도 이해해서 아주 좋아할 거에요.”
윤서가 종이 위에 현대의 탱크 겉모양과 밑판, 축으로 연결된 네 개의 바퀴, 그리고 바퀴와 맞물려 돌아갈 수 있는 체인을 그리자 “오호!” 감탄한 이향이 처소로 아주 솜씨 좋은 목공 장인을 보내주었다.
목공 장인은 홍위와 희아, 윤서가 요구하는 대로 각각의 부품을 잘 만들어주었다.
희아와 홍위는 머리를 맞대고 장인이 만든 부품을 직접 조립하였다.
“눈나, 여기 오는쪽 바쿠부터 축에 끼워?”
(누나, 여기 오른쪽 바퀴부터 축에 끼워?)
“응. 그런데 축에 바퀴를 각각 끼우고 나서, 오른쪽과 왼쪽 동시에 줄에 끼워서 벌린 후에 밑의 판을 붙여야 해. 내가 오른쪽을 여기 뾰족 줄에 맞춰 끼울 테니까, 홍위 네가 왼쪽 바퀴 둘을 줄에 맞춰 끼워. 그 다음에 여기 상판을 내려놓으면 돼.”
둘은 현대의 레고를 조립하듯 사륜 구동체를 둘은 즐겁게 조립하였다.
특히 희아는 아교를 직접 발라 상판을 밑판에 딱 붙게 고정하면서 연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희아는 직접 여러 조립품의 설계도를 그려 목공 장인에게 만들게 해서, 주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괘종시계에 매료된 아이는 홍위와 희아뿐이 아니었다.
잦은 수리의 필요성 때문에 시계판 없이 시계 내부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어 추의 움직임으로 생겨난 동력이 위쪽의 톱니바퀴로 차례로 연결되는 장면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비롭게 아이들을 매혹시켰는지, 열 살의 영응 대군, 신빈의 아들 담양군,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 정의 공주의 아들 여달 등 왕족 꼬마들도 모두 오전에 종학에서 공부할 때를 제외하고 오후 내내 근정전 월대 위에 살다시피 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향은 도르레를 이용해서 작은 기중기를 만들어 아이들 허리에 단단하게 끈을 매 들어 올려 허공에서 시계를 관찰하게 했다.
오후마다 근정전 앞은 기중기를 타고 시계를 관찰하려는 왕실 꼬마들로 시끌벅적 부산스러웠다.
제일 어린 홍위는 덩치 큰 사내아이들 틈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대장 노릇을 제대로 했다. 희아와 함께 또 조립한 톱니 바퀴 회전 장난감 덕이었다.
“이거 바, 이거 바. 여기 돈잡이를 도리면 더 큰 바퀴가 도라가지? 이게 바로 저기 괘!종시!계 원니야.”
(이거 봐, 이거 봐. 여기 손잡이를 돌리면 더 큰 바퀴가 돌아가지? 이게 바로 저기 괘종시계 원리야.)
홍위가 작은 톱니 바퀴와 큰 톱니 바퀴가 맞물려 있고, 작은 톱니 바퀴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면 큰 바퀴를 작은 힘으로도 쉽게 돌리는 원리를 혀짧은 소리로 설명하며 으쓱거리곤 했다.
그러면 다른 왕족들은 공손하게, 심지어 그 잘난 체 잘 하는 도원군마저도 공손하게 웃으며,
“원손 아기씨, 한 번만 돌려보게 해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홍위가 여러 왕족 자손들과 즐겁게 노는 모습을 희아는 부러운 듯 볼 때가 많았다.
“나도 도르레에 달려서 보고 싶은데.”
같이 볼 여자 아이들이 왕실에는 거의 없었다.
이복 자매 금아는 고작 세 살로 어리고 아팠고, 다섯 살 선아는 현덕 비 생전에 여우짓을 많이 한 양 사칙의 딸이라고 희아가 꺼려했다.
대신 희아는 윤서를 놀이 친구 삼아 어디든 따라다녔다.
내의원에서 광평 대군과 전순의를 만나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의 치료법 조사가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에도 함께 가서 유심히 듣고.
유 승휘와 함께 장차 펴낼 책에 들어갈 이야기를 선별하는 작업도 직접 참여해서 이야기를 고르고 다듬는 작업도 제법 흉내 냈다.
그러나 아이에겐 또래 친구가 필요한 법이다.
함께 까르르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놀고, 더 고급의 지식을 나누면서 세상에 대한 통찰을 나눌 수 있는 또래 친구.
나중에 혹시 이향이나 윤서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든든하게 곁을 지지해 줄 장차의 동지가 희아에게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경혜 공주가 단종을 위해 남편 정종과 함께 얼마나 애달게 투쟁했는지 잘 알고 있는 윤서는 그래서 왕실 여인과 외명부 귀부인들에게 정음과 육아보감을 가르치라는 중전마마의 명이 있을 때 바로 청을 올렸다.
“중전마마,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인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장차 아이를 낳아 기를 여인의 교육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평창 군주 자가를 위해서, 또 그 또래의 귀한 가문의 여식들을 위해서 종학과 같은 여아 전용 교육기관을 만들어 가르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교과 과정은 주로 기초 한문과 정음, 그리고 큰 살림살이 경영을 위한 기초 산학으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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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새해가 밝았다.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는 종친들을 위한 신년 연회는 사정전에서, 조정 대신과 여러 여진 부족의 수장, 대마도와 일본, 유구국에서 온 사신들을 위해서는 근정전에서 연회를 베푸셨다.
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모든 이들은 근정전 앞에 높이 솟아 있는 괘종시계의 신묘한 움직임에 감탄하였다.
특히 추상적인 성리학의 가르침에 경도되어 있던 문관들도 규칙적으로 왕복하는 추의 움직임과 그에 따라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마술처럼 찰칵찰칵 돌아가는 동력 전달 기물을 보며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발명의 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태전에서 열린 여인들의 연회는 그 성격이 달랐다.
근정전이나 사정전처럼 큰 건물이 없기에, 교태전 뜰에 차일을 치고 화로를 여러 개 가져다 놓은 연회장은, 다른 때와 달리 노래하고 춤을 추는 무희도 악공도 없이 중앙에 큰 종이가 내걸렸다.
그리고 중전마마께 하례를 드리고 선물을 주고받는 절차가 끝난 후, 낯선 부호가 적힌 종이 앞에 이날 연회의 주인공으로 선 사람은 신참 승휘 권윤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