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화. 궐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윤서는 혹시나 해서 조 상궁만 남기고 모두 다 물린 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는 유 승휘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 승휘는 말없이 서신 한 장을 내어놓았다.
분홍색 비단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쓰인 글자는, 한문 열 글자였다.
[今日菖蒲花 明朝楓樹老] (금일창포화 명조풍수로)
“금일, 음, 창포화 명조풍수로. 오늘 창포꽃이 피고 내일 아침엔 단풍이 시든다는 뜻입니까?”
홍위와 천자문을 익힌 후 틈틈이 한자를 공부한 덕에 더듬거리면서 대충 뜻을 해석해내자, 유 승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는데요”
“하! 이게 어느 시에서 나온 구절인지 모릅겠소?”
“모르지요.”
“이것은 당나라 시대 이하라는 자가 지은 시의 마지막 두 구절로, 오늘 낭군은 창포꽃처럼 피어나시지만 내일은 단풍나무처럼 시들 것이니, 오늘을 즐기자는 고백이란 말이오.”
“와, 멋진 시구절이네요."
외워두었다가 이향에게 써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윤서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를 말하지 말라고 앳된 얼굴을 붉히며 유 승휘에게 애원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권 승휘입니까?”
“맞소. 작은 권 승휘가 혜민국의 의원에게 보내려던 연서요.”
"하! 의학에 열심인 줄 알았는데."
유난히 혜민국 일에 열심인 권 승휘였다. 동궁 후궁의 왕따에서 벗어나자 어릴 적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한학에 더해 의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지금 의녀 스무 명이 받기 시작한 의원 수업도 참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의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기특하고 대견했는데, 실은 그중 한 의원을 연모해서 벌인 일인가.
“이 일이 새어 나가면 권 승휘도 권 승휘지만 우리의 바깥 활동도 모두 금지되는 거 아니오? 겨우 잡은 기회인데 그깟 연심이 뭐라고 이런 시까지 베껴 바치려 들다니. 대체 대가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원.”
유 승휘의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평소 서글서글 하다가도 일에 방해받으면 거침없이 까칠해지는 유 승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서는 문득 혼잣말처럼 한 마디 툭 던졌다.
“여기 궐도, 사람 사는 곳이었군요.”
모두 다 전하나 저하의 총애를 바라고, 그래서 다른 후궁을 짓밟고 자신과 자식의 광영을 더하고 싶어 하는 여인들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향이 여색에 극도로 무심했던 까닭인지 동궁 내궁의 후궁들은 좀 달랐다.
앞에 앉아 있는 유 승휘만 해도 이향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엔 별 관심 없이 오히려 서책과 음식에서 적극적으로 기쁨을 찾았다.
“모두 다 총애 후궁이 되길 꿈꾼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권 승휘. 첩년에 빠진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나는 초당에 내쳐진 채 거지처럼 살았소. 하지만 궐에 들어와 승휘로 책봉되면서 토지와 궁녀를 넉넉히 받아, 먹고 싶은 거 먹고 읽고 싶은 서적 마음껏 읽는데 뭐하러 다른 후궁들과 골치 아픈 암투를 벌인단 말이오?”
평소 유 승휘는 이렇게 윤서에게 말하곤 했다.
이 말이 진심인 것은 밤마다 늦게까지 정과 등 군것질을 입에 달고 이야기를 지어내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벌써 후덕하게 살이 오른 얼굴과 몸이 증명했다.
“이 일을 누가 또 압니까? 그 의원도 알고 있습니까?”
“권 승휘 사가에서 들어온 본방 나인과 유모가 알고, 외부인으로는 나만 알았소. 하도 힐끗거리며 얼굴을 붉혀댔으니 상대 의원도 눈치는 챘겠지만, 설마 하고 있을 것이오. 세자의 후궁이 연심을 품으리라 감히 상상이나 하겠소? 그런다면 미친놈이지.”
윤서는 문가에 미동도 없이 시립해 있는 조 상궁을 보았다.
“모셔오겠습니다.”
이르기도 전에 조 상궁이 몸을 돌려 나갔다.
윤서는 묵묵히 국화 꽃잎을 차호에 넣고 차를 우렸다.
그러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유 승휘가 다시 물었다.
“연적 하나 없어질 일이라 이리 태평한 것이오?”
“권 승휘가 정말로 그 사내를 사랑해 궐을 나가고 싶다면, 나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어야지요.”
“하! 그게 가능하다 보시오?”
“왜, 불가능합니까? 저하는 이미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으신 걸요.”
그리고 아직 고려의 풍습이 남아 있어서 혼인과 이혼이 비교적 자유로운 시기였다. 딸들도 아들과 돌아가며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고, 이혼하더라도 혼인 때 가지고 갔던 토지와 노비 등을 도로 다시 찾아올 만큼.
“그, 그거야! 권 승휘. 정말로, 그리해 줄 작정이오?”
“유 승휘도 이혼을 원합니까?”
“아, 아니! 난 아니오. 난 궐이 좋소. 밖에 나가면 다들 대접해줘 권력도 누리고, 마음껏 책도 펴낼 수 있고.”
“그렇군요.”
“진심이오, 정말. 가문도 한미한데 저하의 아들이라도 낳아보시오. 언제 죽은 목숨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암투에 뛰어들어야 할 터인데, 그런 일에 세월을 보내다니요. 읽을 이야기와 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지금이 좋다는 말을 하며 웃음을 지을 때 눈가까지 반달로 접히는 것을 보면 유 승휘의 말은 진실이었다.
"저하와 했던 두 번의 잠자리는 다 막무가내로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소. 내 그 꼴을 다시 당하고 싶지도 않고."
"!"
유 승휘의 말에 놀라 그 의미를 더 물어보려는 찰나, 어린 권 승휘가 들어왔다.
“이, 이게 왜 여기?”
권 승휘는 자신이 몰래 숨겨 둔 연서가 윤서 앞에 놓인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네 유모가 내게 울면서 가져왔네. 정신이 있는 겐가?”
유 승휘가 작은 권 승휘를 꾸짖었다.
그러자 어린 권 승휘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턱을 치켜들었다.
“뭐가, 어때서요? 전 저하랑은 손도 잡아보지 못했어요. 나이도 열세 살이나 많아서 아저씨 같단 말입니다.”
푸흡.
윤서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열여섯 살 눈에는 스물아홉 살의 이향이 아저씨처럼 보일만도 했다.
게다가 이향은 윤서 앞에서나 옷깃을 풀고 편안하게 농담도 하지 다른 이들 앞에서는 여전히 근엄한 세자 저하시니.
“아니 두 분! 웃을 일입니까, 이게? 대체, 권씨는 왜들 다 이 모양이오?”
유 승휘가 파르르 화를 내며 앞에 놓인 차를 벌컥 마시다가 뜨거워서 도로 뱉어내곤 다시 어린 권 승휘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너의 그 철없는 행동 때문이라는 듯.
“권 승휘, 어떻게 할 계획인 것이야?”
윤서가 묻자 어린 권 승휘는 아련한 표정으로 꿈꾸듯 말했다.
“말씀은 못 하지만 그분도 절 은애하시는 것이 틀림없어요. 저를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시며 시선을 피하신단 말입니다.”
“흥, 세자의 후궁과 눈 맞췄다가는 경을 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게지.”
유 승휘가 끼어들어 이죽거리자, 어린 권 승휘가 파르르 눈매를 떨며 노려보았다.
“유 승휘! 당신은 쓰는 이야기는 달달하고 노골적으로 애정 가득하면서 왜 내 일에는 이리 날을 세우시나요?”
“입 다물게, 권 승휘! 내 이야기를 모독하는 자는 그게 공자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어!”
“그만! 그만! 입들 다무세요.”
윤서는 엄히 손을 내저어 두 승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생각한 바를 밝혔다.
“권 승휘, 잘 듣게. 지금 당장은 안 돼네. 저하께서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시고 여러 가지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계시네. 이럴 때 동궁의 내궁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안 돼. 대신,”
“대신?”
“사 년, 사 년 후에는 자네가 궐을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주겠네. 그때까지는 자네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해.”
궐을 나가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윤서의 말에 얼굴이 환해졌던 어린 권 승휘가, 이내 다시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사이 그분이 다른 여인과 혼인이라도 하면요.”
“자넬 사랑한다면서?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힌다면서?”
유 승휘가 그 정도 자신도 없냐는 듯 비웃었다.
그러자 어린 권 승휘는 “너무 수려하셔서 다른 의녀들도 매일 꼬리를 친단 말입니다.” 하고 울상을 지었다.
아이고.
현대로 치면 고작 고등 일 학년 꼬꼬마가 저리 사랑에 막무가내인 것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여 자꾸 새어나는 웃음을 삼키며, 윤서는 엄하게 물었다.
“자네, 의학에 진심이라고 하지 않았어?”
“의학에 진심인 것은 맞습니다. 그, 박가 의원님과 함께 진료소를 차려 먹고살 계획입니다.”
그러자 또 유 승휘가 톡 끼어들었다.
“사내 때문에 궐을 나간다고 하면 가문에서도 내침을 당하고, 승휘로 책봉되면서 받았던 토지와 나인도 도로 내놓아야 할 터인데. 과연 의원으로 벌어들이는 재물이 성이 차겠소?”
“하! 아니 유 승휘님, 님과 함께라면 산속에 들어가 꿩 잡아먹고 살아도 좋다고 쓰시고는 왜 이러십니까? 게다가 실력 있는 여자 의원이면 찾는 곳이 수두룩일 텐데, 걱정도 많으십니다.”
“그만그만! 두 사람 정말, 그만 다투세요.”
윤서는 다시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을 말리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첫째, 권 승휘는 혜민국 의녀를 잘 이끌면서 앞날을 대비하되 마음은 절대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합니다. 때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중간에 새어 나가 문제가 생기면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할 것이에요."
"목, 목숨으로. 네, 목숨으로."
"둘째, 우리 셋 모두 세자 저하와의 인연 때문에 함께 하게 되었지만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모두 이 조선에서 여인으로서는 처음 걷는 길입니다. 그러니 모두 길을 새로 낸다는 각오로, 훗날 다른 여인들이 편히 걸을 길을 만든다는 각오로 서로 지켜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럼, 권 승휘도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는 말이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펴내는 것까지, 말이오?”
“유 승휘가 쓰신 이야기 중 몇 개는 당장 출간은 어렵습니다.”
윤서가 말하자 어린 권 승휘가 아이다운 천진함으로 굳었던 표정을 풀고 킥킥 웃었다.
의학 서적을 정음으로 번역하는 일을 장차 총괄하게 할 목적으로 윤서가 권 승휘에게 정음을 가르쳤고, 그래서 어린 권 승휘도 유 승휘가 정음으로 쓴 연정 소설을 읽어 보았기 때문이다.
“유 승휘 마마님 그 ‘회화 꽃 그늘 아래 우리는’은 그대로 출간했다가는 풍기문란 죄로 의금부에 끌려가실 것입니다!”
어린 권 승휘가 놀릴 만큼 유 승휘의 몇몇 소설은 굉장히 아름답고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현대에서 수위 높은 소설과 영상물을 접해본 적 있는 윤서조차 마른침을 삼키며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그런 것은 당분간 안 됩니다. 유 승휘. 나중에 다들 글자를 알게 되면 자연히 민간에서 통속 소설도 유행하게 될 것이고, 그쯤에나 가명으로 출간하세요. 당장은 교훈적이고 재미있는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사랑 이야기도 아름답고 건전한 것들만 펴내야 할 것입니다!”
윤서가 말하자 유 승휘는 “하! 남녀가 뜨겁게 사랑하는데 건전이라니. 쯧.” 혀를 차며 윤서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밤 생활을 내가 들어 아는데,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윤서는 그런 눈빛을 모른 척하고,
“궐에서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지속하려면 제발 그 붓끝 조심하셔야 합니다.”
협박했다.
유 승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 승휘와 어린 권 승휘가 동궁의 내궁에서 윤서 편에 확실하게 서게 된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윤서가 아이를 키우고 싶은 조선을 함께 만들어갈 동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경술년 12월 30일, 세종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이 공식적으로 반포되었다.
이날의 실록에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하는 원래의 내용에 몇 줄이 더 첨가되게 되었다.
[임금은 이 신묘한 글자로 장차 조선을 이끌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워낼 방법을 담은 책을 짓게 하시고 <육아보감>이라 이름 지으셨다. 읽기 편하도록 뜻의 단위로 띄어 쓰고 가로 읽기로 편찬된 <육아보감>은 먼저 궐의 신년 하례 연회에서 왕실의 내명부 여인과, 종친 및 대신들의 외명부 여인에게 먼저 배포되었다.]
실록에 쓰인 대로 윤서는 여인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중전마마께서 윤서를 불러 명하셨기 때문이다.
“육아보감의 내용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정음을 알아야 하니, 윤서 네가 내외명부 여인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내용을 강의하거라.”
이 명을 들었을 때, 윤서는 광평 대군과 함께 마진(홍역)과 두창(천연두)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과 함께, 아이를 낳기 전 꼭 해내고 싶은 일을 떠올렸다.
"중전마마, 그럼 신년 연회에서 훈민정음의 원리와 쓰임법, 육아보감의 개략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 사안 또한 공표하고 싶습니다. 이제 새해면 세손이 되는 아기씨와 달리 늘 혼자 쓸쓸히 계신 평창 군주 자가를 위해서입니다."
윤서의 제안에 중전마마께선 고개를 갸웃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