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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80화 (80/255)

제 80화. 우리 아기가 생기니, 어떠하냐?

“저, 아이 가졌어요.”

윤서는 덩치도 작은 박 상궁의 품을 억지로 파고들며 임신 사실을 알렸다.

“아, 아이!”

“마음이, 마음이 이상한데, 말할 사람이 마마님밖에 없어서······.”

“···그래. 고아나 다를 바 없지, 너도.”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무만 가득한 삶을 살아온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권가의 삶을 생각하자, 조직의 일로 앙클하게 닫혔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아이라니. 이제 정말 궐의 여인이 다 되었구나. 아니, 이미 되었지, 권가 너는.”

“···예?”

“많이 울었다. 그만 울자. 너무 울면 아기한테 좋지 않다더라.”

“···네!”

아이한테 좋지 않다는 말에 윤서는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박 상궁은 윤서를 품에서 떼어내고, 조 상궁이 가져다 놓았던 보양차를 따라 건네주었다.

윤서가 씁쓰레한 맛이 나는 차를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박 상궁은 감춰두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오래가려면, 권가야. 자신을 속이면 안 된다.”

“마마님?”

“우리 조직이 한계에 다다른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모시던 분에게서 매금이를 떼어내 너를 주었겠느냐. 그렇지만, 너는 그렇게 자신까지 속이면 아니 되었다.”

“무엇을, 제가 속였어요?”

“내 조직을 네 일에 쓰고 싶다고. 말했어야지. 이용할 마음이면서 왜 나와 그 아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말을 했느냐? 왜 너도, 백성을 위한다면서 결국 제 잇속만 차리는 왕실 것들처럼 말하는 것이냐?”

“아, 마마님!”

박 상궁의 말씀을 듣고서야 윤서는 자신이 박 상궁의 부담을 덜어주는 척하면서 실은 그 빼어난 살수 집단을 각 대군의 동향을 감시하는데 이용하고 싶었다는 진심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 이미 자신이 깊게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마마님, 죄송해요. 저조차도 몰랐어요.”

“그래. 몰랐겠지. 하지만, 권가야. 네가 딛고 서 있는 판이 무엇인지 늘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고, 그래야 제대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박 상궁 마마님은 그렇게 충고를 남기고 조직을 흩어 각지로 보내는 데 동의하셨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권가 네가 무언가 염려하고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 일이 끝나면, 권가야. 약조하거라.”

박 상궁은 윤서의 일이 모두 마무리 된 후 하나씩 모두 데려와 매금이처럼 정상적인 삶을 마련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

윤씨 부인은 수양 대군의 항해에 보낼 여러 약재에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주술 의식을 행한 후, 무당 무가이와 함께 명례궁으로 돌아왔다.

윤씨의 전각에는 계양군의 부인 한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대감께서는 무사히 잘 가고 계시다던가?”

“나흘 전에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에서 탕참이란 곳을 향하고 계시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동팔참이 험하고 가파른데 눈까지 많이 내리고 있다고 하여 근심이지요.”

“허어, 그래. 이 추운 겨울에 그리 먼 길을 가셔야 하니 노고가 참으로 크시네. 하지만 한 대감 어르신이 아니시고서야 이렇게 수상쩍게 돌아가는 상황을 누가 바로잡으실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저 대감 어르신과 명 황실의 공신 부인의 도움만 바랄 뿐이야.”

“예, 아버님께서 고모님께 반드시 좋은 소식을 받아오실 것입니다. 염려 마시어요. 제약 공장에 가신 일은 잘 되셨습니까?”

“저기 무가이가 계양군께서 가져가실 약재에도 영험한 주술을 다 걸어 두었네. 그렇지 않은가?”

윤씨는 문가에 엎드려 없는 듯 존재를 지우고 있는 무당 무가이를 노려보았다. 아까 권 승휘를 본 후부터 영 낯빛이 좋지 않고 식은땀까지 흘리는 무가이가 윤씨는 몹시 못마땅했다.

“자네, 대체 그 여우 같은 권가 년을 보호하고 있다는 별의 기운이 언제 사그라든다는 게야? 여기 우리 계양군도 저 함길도 궁벽한 곳으로 가시지 않느냐? 우리가 다시 한양에 편히 모일 날이 언제나 온다는 게야?”

“그것이,”

말끝을 흐리며 무가이는 아까 보았던 권 승휘의 눈빛을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신령님이 [물러나]라 외칠 만큼 형형한 눈빛이었지만 함부로 사람을 해하는 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앞에 앉아 노려보는 윤씨는 언제고 끌어내 물볼기를 칠 수 있는 잔혹한 성정이었다.

“권 승휘를 보호하는 진성의 기운은 지금 한창 강해지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이지러지는 법, 칠팔 년 후부터 새로운 징조가 시작될 것이라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칠팔 년?”

계양군 부인 한씨가 고개를 돌려 무가이를 노려보았다.

“그럼 우리 계양군께서 칠팔 년이나 땅굴을 파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냐? 계집질과 풍류만 좋아하는 안평 대군 뒷수발을 들며?”

“아, 아니옵니다. 그때 큰 별이 연이어 떨어지며 많은 피를 부르는 살성(殺星)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 그 사이 어찌 변화가 없겠습니까?”

무가이가 변명을 하자 윤씨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씨를 달랬다.

“그래, 한 대감과 공신 부인께서 우리 편이신데 무슨 걱정이신가? 봄에 돌아오시면 많은 일들이 해결될 것이네. 너무 속 끓이지 마시게."

"예, 이게 다 그 권가가 설치면서 생겨난 일 같아, 괘씸합니다. 이번에 아버님께서 성지만 받아오시면 그 권가도 끝이겠지요."

"그럼, 그럼. 그러할 걸세."

권가를 찍어누를 이를 궐에 넣을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윤씨는, 또 무가이에게 물었다.

"그건 잘 준비되고 있느냐?”

“근래 몇 년 사이 역병이 크게 돌지 않았었던지라 병자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형혹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조만간 큰일이 터질 것이옵니다.”

“그래, 질병이 돌면 자네가 제일 먼저 바빠지니, 조짐이 돌자마자 차질 없이 일을 추진해야 할 것이야.”

“예, 마님. 소인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가이는 절을 하고 명례궁을 나와 잰걸음으로 선바위 밑 굿당으로 걸어가며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싶어도 유분수지 어찌 선인도 악인도 가리지 않고 덤비는 역신을 불러들일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편하게 부귀영화를 누려보려고 했다가 자칫하면 역신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까 권 승휘의 형형한 눈빛처럼 무가이의 등을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

박 상궁이 조 상궁을 불러 이제부터 윤서가 마시는 물 한 모금도 반드시 직접 우물에서 길어 올려 입 안에 들어가기까지 눈을 떼지 않도록 하라 엄하게 이른 후.

윤서는 몸이 으슬으슬 춥고 열이 나는 몸살기를 느꼈다.

“원래 회임 초기에는 감기 기운처럼 몸살이 잦다고 합니다. 어서 가서 누우시지요. 중전마마께는 제가 대신 말씀 올리겠습니다.”

박 상궁 마마님께서 완벽하게 예를 갖추며 등 떠밀어 윤서를 침전으로 보냈다.

침전에는 홍위와 희아가 아지 이씨 부인과 유모 백씨와 함께 윤서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두 분 아기씨, 오늘 권 승휘 마마님 몸이 안 좋으셔서,”

조 상궁이 고하는 걸 윤서는 고개를 흔들어 말렸다.

저렇게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데 그냥 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보료에 몸을 기댄 후 짤막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강원도 동해에서 배를 타고 사흘을 가면, 대인국이란 섬이 있어요. 그 섬에는 눈이 하나만 있는 외눈박이 괴물이 사는데, 지나가다 난파한 배들에서 떠밀려온 사람들을 구해주는 척하면서 잡아 가두고는,”

윤서는 신밧드의 모험과 일리어드 오딧세이에서 공통으로 나온 외눈박이 괴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오는 그 괴물에게 자기 이름을 ‘아무도 아니야’라고 속여 일러주고는 불에 달군 창으로 눈을 찔렀어요.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작은 배로 달아났어요.”

그러자 홍위가 괴물이 무서운 듯 이씨 부인의 품에 폭 안겨 있다가 희아에게 물었다.

“눈나, 거딧말은 나쁜데. 친!오는 거딧말쟁이인데.”

(누나, 거짓말은 나쁜데. 신오는 거짓말쟁인데.)

그러자 희아는 고개를 흔들며 동생에게 하나씩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봐. 먼저 나쁜 건 외눈박이 괴물이잖아. 구해주는 척하고 잡아먹었어. 그러니까 괴물을 거짓말로 속여 넘기는 건 나쁜 게 아니라 똑똑한 거야.”

“또똑한 거야? 건 승위, 거딧말도 또똑해?”

(똑똑한 거야? 권 승휘, 거짓말도 똑똑해?)

“예, 아기씨. 자가 말씀이 옳아요. 나쁜 놈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때로 속임수도 써야 하지요. 이런 걸 ‘정당방위’라고 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정당한 행동이란 뜻이에요.”

여기까지 말하는데 몸이 더 많이 으슬으슬하며 졸음이 몰려 왔다.

창백한 윤서의 안색을 본 조 상궁이 나섰다.

“두 분 아기씨, 오늘 권 승휘가 쉬어야 해요. 오늘은 이만 들으시고, 내일 또 오세요.”

홍위는 윤서가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듣자

“아푸디 마라, 아푸디 마, 건 승위.”

울먹거리며 이씨 부인에게 안겨 방을 나서고,

“푹 쉬어, 권 승휘. 조 상궁, 자네가 각별하게 챙겨 드리게.”

평창 군주 희아는 의젓하게 윤서를 챙기고 유모 백씨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윤서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홍위와 희아에게도, 그리고 이 배 속의 아기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잔 것일까.

사방이 괴괴하게 어둠에 잠겼을 때 문득 차가운 겨울 냉기가 시원하게 몸을 식히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윤서를 깨웠다.

“부인, 태명을 알려주러 왔소.”

“저하!”

어둠 속에서 이향이 희미한 윤곽으로 머리맡에 앉아 윤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하, 이 추운 밤에.”

윤서는 몸을 일으켜 이향의 품에 안겼다.

서늘한 비단의 감촉이 뺨을 식혔다. 귀에 맞닿은 넓은 가슴 속에서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선명했다.

윤서는 고개를 들고 이향의 두 손을 찾아 쥐었다.

겨울바람에 꽁꽁 언 커다란 손을 가슴에 품어 녹이며, 윤서는 속삭였다.

“와 주셔서 기뻐요, 이향. 사실은 오늘 부모님이 무척 보고 싶었어요. 부모님께 이렇게 멋진 당신을 보여드리고 싶고, 여기서 행복하다고도 말씀드리고 싶고, 이향. 나는,”

기쁘면서도 외롭고, 두려웠어요.

윤서가 끝내 말하지 못하는 심정을 이향은 미루어 짐작하며, 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윤서 너의 영혼이 시공간을 넘어 내게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 하늘에 계신 장인과 장모께서도 시공간을 넘어 이리 어여쁜 너를 지켜보며 기뻐하고 계실 것이다.”

“정말, 정말로!”

정말로 그러하실 것이다.

윤서의 영혼이 올 수 있다면, 부모님의 영혼도 또한.

“그래서, 저하. 우리 아기의 태명은 무엇인가요?”

“내 내내 달려오면서 고민했는데,”

이향이 윤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금똥이!”

“저하!”

“황금색 똥을 쌌으니 금똥이에, 우리 홍위 아명이 개똥이었으니 돌림자도 아주 딱이오.”

“아!”

여긴 십오 세기의 조선.

귀한 아이일수록 천한 이름을 붙여 귀신의 질투와 시기를 피하는 속설을 윤서는 비로소 생각해냈다.

“금똥이 아버님, 어디까지 가셨다가 달려오신 것인가요?”

“이천에 가 있었는데, 파발이 왔소. 그래서 양재 쪽으로 와 다리를 건너서 왔지. 길이 잘 닦여 있어서 오기 수월하였소.”

“손이 이렇게 차서, 손에 동상이 걸릴까 봐 걱정이옵니다, 금똥이 아버님.”

“속에 담비 털을 댄 장갑도 금똥이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시지 않았소? 손을 씻고 들어와서 이리 차가운 것이니 걱정 마시오.”

손도 씻으시고, 우리 저하. 이제 위생 개념 잘 아시네.

“다시, 가 보셔야지요?”

“해가 좀 뜨면.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위험하다.”

“저하 오신 거, 다른 사람들도 아나요?”

“아니야. 몰래 왔어. 수문장에게도 함구하라 일렀다.”

“전하께서 과연 모르실까요?”

“아시겠지. 하지만 모른 척하실 거다.”

“전하께서 아이들 읽을 이야기 책 펴내는 거 허락하셨어요. 홍위와 희아, 그리고 우리 아기. 또 조선의 모든 아이들이 더 재미있고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씩씩하게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으흠.”

이향은 일어나서 부시럭 거리며 외투와 융복을 홀로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는 윤서 옆에 누웠다. 그리고 윤서를 꼭 안고 물었다.

“우리 아기가 생기니, 어떠하냐?”

홍위와 희아와는 어떻게 다르냐는, 민감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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