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화. 아이를 가지자 세상이 달라졌다 (2)
윤서는 윤씨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조 상궁!” 외쳤다.
그러자 윤서 뒤에 서 있던 조 상궁이 살벌한 기세로 윤씨 옆에 서 있는 조 전언을 향해 걸어갔다.
심상치 않은 조 상궁의 기세에 조 전언이 움찔 물러서며 “무엇이,” 묻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으흑, 둔한 신음을 흘리며 오른쪽 뺨을 감싸 쥐었다.
조 상궁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내처 왼쪽 뺨도 사정없이 내리쳤다.
“권 승휘, 이, 이게!”
노골적인 폭력에 격분한 윤씨가 말까지 더듬었지만, 권 승휘는 여유롭기만 했다.
“조선에서는 윗사람이 죄를 지으면 시종이 대신 벌을 받더군요. 부부인께서 큰 죄를 지으셨는데, 조 전언의 뺨 몇 대는 참으로 관대한 처분이 아닙니까?”
“하, 감히 종4품 승휘 주제에 어디 정1품 부부인에게, 감히!”
“감히? 조 상궁!”
“예! 마마님!”
조 상궁이 다시 손을 쳐들자, 조 전언이 “어딜!” 하며 팔을 잡았다.
윤서가 유들유들 소리쳤다.
“거기, 조 전언. 뺨이 나을 텐데. 태장을 맞아 몇 달 기어 다니고 싶으면, 그리하고.”
“자네, 기껏 승휘 나부랭이가 되었다고 미쳐버린 것인가?”
“부부인! 세자 저하의 여인인 저를 모욕하시는 것도 경우에 어긋나지만, 중전마마를 모욕하시다니요.”
“중전마마를 모욕······!!”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친정 식구가 죄를 지어 귀양 가 있으면 아이를 낳아도 세자빈도 될 수 없다!’ 중전마마께서 그 논리를 들으시면 어찌 생각하실지.”
“하! 너, 너 따위를 감히 중전마마께 비교해?”
그러나 세종께서 보위에 오르신 후 친정 심씨 가문이 풍비박산 났을 때, 역적의 여식을 국모 자리에 둘 수 없다고 주장한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는 윤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생각이 깊지 못하시면, 가급적 입을 닫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지식이 얕음을 가릴 수 있지요.”
“!”
무가이가 다시 윤씨의 귀에 입을 대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마님, 훗날을 기다리셔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아까부터 무가이의 머릿속에서 무시무시한 신의 경고가 울리고 있었다.
[물러서! 물러서! 물러서!]
윤서는 윤씨 귀에 자꾸 속살거리는 무가이란 무당을 바라보았다.
윤서와 시선이 마주치자 무당이 겁에 질린 표정을 하며 후다닥 물러섰다.
‘영험하기로 유명하다더니 뭐 저래 겁을 내고. 뺨 맞을까 두려워서 그러나.’
윤서는 다시 창백한 표정으로 얼어 있는 윤씨를 보았다.
“조 전언의 뺨 몇 대로 퉁 쳐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호의인지 이제 아셨습니까?”
“······.”
“호의를 드리는 김에 더 베풀지요. 전 주부, 부부인 마님께서 무얼 부탁하셨나?”
윤서의 질문에 ‘권력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따른다’란 원칙 하에 멀찍이 물러서 추세를 보던 전순의가 단령 자락이 펄럭이도록 빠르게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수양 대군 자가의 항해 길에 보내드리라 명하신 약재에 저, 음, 저 무당이 주술을 걸게 하라 하셨습니다.”
“주술?”
윤서는 윤씨를 보았다.
윤씨는 입을 꾹 다물고 표정을 더욱 굳혔다.
사가에서나 궐에서도 병에 걸리면 무당부터 불러 굿을 하고 비방을 쓰고, 묘를 쓸 때도 풍수가나 지관을 불러 묫자리와 방위를 정하였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조선은 괴력난신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을 국시로 하기에, 약재에 주술을 거는 등의 행위가 알려지면 비웃음과 망신을 넘어 사대부의 탄핵을 받을 일이었다.
윤서는 윤씨에게서 눈을 떼고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서 있는 무당에게 손짓했다.
“자네, 무가이라 하였는가?”
“예, 소인 무가이옵니다.”
무가이의 머릿속에 다시 [물러서! 물러서! 물러서!] 신의 진노가 휘몰아쳤다.
“대군 자가께 보내드릴 약재나 연고 등에 필요한 거 있으면, 하게.”
“!”
뜻밖의 말에 윤씨가 무슨 꿍꿍이냐는 표정으로 윤서를 노려보았다.
윤서는 윤씨를 향해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는 연민마저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비의 무탈함을 기원하고 싶은 아내의 마음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시고 싶으신 거, 다 하십시오. 바닷바람에 스며 있는 염분기를 없애는 데 유용한 비누도 제가 따로 만들어 챙겨 드리겠습니다.”
“······.”
“전 주부, 수양 대군 자가께 보낼 약재는 무가이가 조치를 할 수 있게 하시게.”
“예, 마마님.”
“그리고 전 주부는 잠깐만 따로 나를 보세.”
윤서는 뜻밖의 호의에 오히려 낭패감을 느끼는 듯 멍하니 보고 있는 윤씨에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리고 전 주부의 안내를 받아 중앙 전각으로 걸어가다가, 잠깐 윤씨의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군 자가께 보내는 약재에는 마음껏 애정의 손길을 펼치셔도 좋으나, 다른 약재에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부부인 마님. 종조카님에 대한 애정이 너무 지나치시셔서 탈이 나지 않았습니까?”
“무, 무슨 말인가?”
“홍 상궁이 슬쩍 말하더이다. 종이모님의 과한 애정이 때로 무척 부담스러웠다고.”
“!”
홍 상궁은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지만, 윤서는 윤씨를 흔들었다.
지은 죄가 있으면 무얼 해도 내심 불안할 것이니, 가서 홍 상궁에게 정말로 그리 말하였냐고 묻기도 불안하고, 마찬가지로 묻지 않고 있기도 불안하리라.
그리고 불안한 인간은 반드시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다.
윤서가 전 주부의 뒤를 따라 전각으로 다가갈 때, 빠른 걸음으로 쫓아온 매금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네가 조 전언 뺨 때렸으면, 목뼈 부러지지 않았겠니?”
“응!”
“앞으로는 정말로,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해. 나나, 홍위나, 희아나, 세자 저하나, 박 상궁 마마님 목숨이 위험할 때 외엔 명령하기 전에 움직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알았지?”
“···응. 누구를?”
윤서는 이제 매금이의 화법에 익숙해져서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챘다.
모두가 다 위험할 때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하냐는 물음이었다.
윤서는 아직도 납작하기만 한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홍위. 우리 홍위가 늘 언제나 일 순위야.”
홍위를 지키는 것이 내가 조선에 온 근원이니까.
*****
임신이 맞았다.
전순의는 맥을 짚자마자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우흐흐흡” 울음 비슷한 소리를 내더니, 철퍼덕 무릎을 꿇어 절까지 올리며 외쳤다.
“회임이십니다, 회임. 경하드리옵니다, 마마님. 경하드리옵니다.”
권력을 진심으로 추종하는 자의 내면세계는 어떠한 모습인가.
그들은 진심으로 권력자의 조그마한 기쁨은 곧 나의 거대한 기쁨이고, 권력자의 손톱만한 슬픔이 곧 나의 진실한 애통이 되는, 주군과 자신의 물아일체의 경지라는 걸, 윤서는 전순의를 보며 실감했다.
“태아를 안정시키는 안태약을 곧 지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음, 혜민국에는 당분간 나오지 마시지요. 제가 혼신을 다해 광평 대군 자가와 함께 그간 마마님께서 해오신 일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윤서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 아이가 태어나면 현대에서는 각종 예방 주사부터 맞힌다.
윤서도 어릴 적부터 정기적으로 예방 주사를 맞으면서 컸고, 그 덕분에 현대의 유아사망률이 극적으로 낮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변변한 치료법이 확립되지 않은 중세는 다르다.
세종의 자식들은 거의 다 무사히 성장했지만 첫 적장녀 정소 공주가 십대 초반에 죽었고, 이향의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경우가 여럿이었다.
“유아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에게 위험한 질병의 종류가 무엇인지와, 그에 대한 치료법이 무엇인지 항목별로 정리해서 제게 주세요. 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에 대한 예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 하오나, 마마님.”
방금까지 귀하디귀한 왕손을 잉태케 한 공으로 큰 상을 받을 기대에 들떠 있던 전순의의 얼굴이 파사삭 구겨졌다.
그러나 윤서는 전순의가 가진 의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전순의는 지난 역사에서 수양 대군에게 바쳤던 충성보다 더 큰 충성을 지금 윤서에게 바치고 있었다.
윤서는 비대하게 발달한 전순의의 인정 욕구를 슬쩍 자극하였다.
“전 주부의 실력은 제가 잘 압니다. 또 제가 의학 여러 분야에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친다면 우리 조선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해온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그러면 전하와 저하께서 전 주부의 공적에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전순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늘 권력이었다.
윤서의 입에서 ‘전하’와 ‘저하’가 나오자마자 사십 줄에 들어선 전순의는 십대 아이들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예, 마마님. 마마님과 저, 그리고 영민하신 광평 자가까지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열렬하게 외치며 불타오르는 결의를 다졌다.
*****
그런데 전순의처럼 윤서의 회임을 기뻐하는 조 상궁과,
홍위처럼 귀여운 아기가 생긴다는 말에 “아기? 홍위?” 하고 묻고는 ‘어떤 경우든 홍위가 일 순위’라고 확인해줘도, “아기!” 하고 배시시 드물게 웃는 매금이와 달리,
무수한 전각 사이를 걸어 동궁전으로 돌아오던 윤서는 그만 담벼락에 얼굴을 묻고 흐흑, 흐느끼고 말았다.
“마마님, 승휘 마마님!”
조 상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왜 이러시냐고 묻는데, 윤서는 말없이 입술을 떨며 눈물만 흘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부모님이, 이십일 세기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를 뵙고 수염이 길고, 먼저 만난 후궁이 여럿 있는 것만 빼면 완벽하게 다정한 사위 이향을 보여주고도 싶고, 할아버지가 세종이고 아빠가 이향이니 이 아이는 또 얼마나 똘똘할지 자랑도 하고 싶고.
홍위와 희아처럼 예쁜 아이들이 벌써 형과 누이로 있으니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얼마나 예쁨을 많이 받겠냐고, 그래서 나는 커피 못 마시는 거랑 매운 김치 못 먹는 거를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여기서도 행복하다고, 홍성 선산의 부모님 산소 앞에서라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담벼락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윤서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후, 뺨을 적신 흥건한 눈물을 닦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조 상궁에게 물었다.
“박 상궁 마마님, 어디 계시는가?”
“동궁전의 행각 집무실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일단 거처로 먼저 가세. 그리고 이 각(삼십 분) 후에 박 상궁 마마님을 서재 전각으로 모셔오시게.”
윤서는 거처의 서재 전각으로 돌아와, 연한 분홍색 비단 종이를 펼친 후 이향이 선물해준 옥으로 된 문진으로 종이를 고정했다.
멋진 말로 이향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은데, 멋진 말 대신 자꾸 또 눈물이 나왔다.
아아 이 호르몬, 정말!
후흡후흡 깊은 심호흡으로 기쁨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을 달랜 후, 윤서는 세붓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의 고심 끝에 짤막한 두 문장을 썼다.
[우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태명을 지어 보내주세요.]
참 멋없는 서신이다.
하지만 로맨티스트인 아빠가 있으니 엄마까지 달달할 필요는 없다고 애써 자위하며 윤서는 서신을 곱게 저어 봉투에 넣어 봉인한 후, 강 내관을 불러 파발로 세자 저하께 전달하라 명을 내렸다.
그리고 박 상궁이 왔다.
윤서는 조 상궁까지 다 전각 밖으로 물리고, 방 안에 박 상궁과 단둘이 남은 후 흐흑, 박 상궁을 안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궈, 권가야!”
들어올 땐 잔뜩 굳어진 얼굴로 시선도 마주치려 하지 않던 박 상궁이 놀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