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화. 아이를 가지자 세상이 달라졌다 (1)
“아이들에게 허황된 이야기는 허황되기 때문에 그 효용 가치가 큽니다, 전하.”
윤서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앞으로도 홍위와 희아에게, 그리고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게도 재미난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한 사랑과 돌봄 속에 안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자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언제까지나 어른들이 제공하는 그 안온한 삶 속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또래의 주인공들이 시련에 직면하고, 그 시련을 이겨내는 것을 듣고 읽게 되면, 아이들도 세상이 지금처럼 평안하지만 않다는 것을 암암리에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고, 나쁜 악당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훈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담의 효용이라는 것이냐?”
“예, 전하. 사람을 홀려 간을 빼 먹는 구미호나 정신을 홀려 잡아먹는 이매망량이 삶에 불어닥칠 다양한 시련을 상징한다고 하면, 그 두려운 것들과 맞서 싸우며 외치는 ‘척호(斥弧)야!’ ‘척이매(斥魑魅)야!’는 미래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미리 유희로 풀어내는 학습이기도 합니다.”
“으흠.”
일견 타당한 의견이라는 듯 세종께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우리 호, 으흠,”
‘홍위’라고 말할 뻔한 것을 큼큼 목을 가다듬는 척하고 윤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아기씨 두 분이 벌써 전하의 새 문자가 만들어 낼 새 세상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문자는 상상하고,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현의 가르침은 종이 위에 먹으로 그려진 형상에 불과하지만, 문자화된 그 형상을 통해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치세를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전하의 문자가······,”
한글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는지 잘 알고 있는 후손으로서, 바로 그 문자를 만드신 세종 앞에서 한글의 효용을 고하고 있으려니 또 목이 메었다.
아아, 요새 감정의 진폭이 너무 커졌다.
“···전하의 문자가 아이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크나큰 깨달음과 지혜를······, 줄 것입니다.”
“어허, 왜 또 우느냐?”
“전하의 문자 창제가, 너무나 감동적이라서, 그러하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조심조심 코를 풀던 윤서는 순간 숨을 멈췄다.
“!”
섬광처럼 깨달음이 찾아왔다.
상담소를 찾아왔던 임산부들. 그들이 보여준 다채로운 감정의 진폭들.
평소 냉철한 이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짓거나, 화를 내거나, 격정적이 되게 하는,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
설마!
‘전순의는 자궁을 보하고 어혈을 풀어주는 한약재가 태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더 태아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 단언하였지. 이건 다른 의원에게도 거듭 확인한 사안이니,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생각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
나와 이향의 아이.
그리고 장차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15세기의 조선은!
홍위를 지켜내야 이 아이도 지킬 수 있다는 사실 외에 또 홍위가, 희아가, 그리고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엄숙하기만 한 사회 속에서, 재미난 이야기의 효용조차 의심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 아이는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란 의문이 세상을 완전히 다른 잣대로 바라보게 하였다.
“윤서야?”
코를 닦다 말고 갑자기 허공을 응시하며 다채롭게 표정을 짓고 있는 윤서를 세종께서 부르셨다.
“예, 전하.”
윤서는 고개를 돌려 세종을 보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시지만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한계를 가지신 내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눈앞에 앉아계셨다.
신기하게도 세종이 더 이상 마냥 두렵지만 않았다.
승휘로 책봉된 뒤에도 늘 큰 두려움 한 자락을 깔고 세종을 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두려워해서도 아니 된다고, 윤서는 생각했다.
내 아이의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 두려울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어미된 자의 마음가짐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만드신 문자의 위대함을 제가 이야기를 통해 알리겠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예, 전하. 전하께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문자가 맞지 아니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뢰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함을 가엾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까?”
훗날 발표되었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을 읊자 세종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우리 발음을 완벽하게 표기하면서 또한 배우기도 쉬운 전하의 문자로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를 펴내면, 백성들은 그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라도 새 문자를 열심히 배울 것입니다.”
“으흠.”
“또한 그렇게 문자를 깨친 백성들은 나아가 성현의 가르침도 배워 더욱 현명한 전하의 백성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전하께서 제게 읽고 분석하라 명하셨던 사마천의 사기를 생각해 보소서. 그 이야기를 백성들이 읽을 때 얼마나 크게 눈을 뜰 수 있을지. 고려사를 읽고 한 왕조의 흥망성쇠가 무엇에 달려 있었는지 백성들이 알게 될 때 이 나라를 이끄는 사대부들이 어찌 변할지. 전하, 생각해 보소서.”
문자는 힘이 세다
문자는 지식을 전파하고 이념을 전파하는 데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현세와 내세에 대한 관념을 모두 장악했던 카톨릭의 지배를 끝장낸 것이 라틴어로만 쓰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보급한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되었듯.
한자로 쓰인 성리학에 기반한 소수 양반의 경직된 지배 이념을 뒤흔드는데, 그래서 더 자유롭고 부유한 세상을 만들어 내는데 한글의 보급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없다.
“새 문자로 이야기를 전파한다라.”
갑자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웅변을 토하는 권가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던 세종은, 그러나 고개를 흔드셨다.
“네 의견은 좋다. 하지만 너는 여인이다. 혜민국이야 국모이신 중전을 대신해 백성의 안위를 돌본다는 명분이 있어 네가 맡을 수 있었지만, 새 문자로 이야기 책을 편찬해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다르다. 그 일은 주로 집현전의 최고 학자들이 책임져온 일이야.”
아무리 세자에게 총애를 받는 왕실 여인이라고 해도 책을 편찬해 보급하는 일을 맡길 수 없다는 말씀이셨다.
“명분, 있습니다.”
“응?”
“혜민국이 백성의 안위를 돌본다는 명분이 있다면, 문자를 통해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전파하는 것에는 장차 이 나라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올바로 키워낸다는 명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여인입니다, 전하.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 여인보다 더 큰 명분이, 자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윤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재미있는 이야기조차 마음껏 읽힐 수 없는 세상은 아이를 위한 세상이 아니다.
강렬한 의지를 담은 윤서의 눈동자가 첫 대면에서처럼 대담하게 세종의 눈을 직시하였다.
‘저 아이가 저리 눈을 빛낼 땐, <육아보감>처럼 또 혜민국의 다양한 치료법처럼 멋진 결과들이 나오곤 했지.’
권가의 말처럼 홍위와 희아는 몰라보게 밝고 씩씩해졌다.
그리고 정말로 아이들이 상상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를 얻는다면, 그리고 지금 사대부들만 독식하고 있는 지식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된다면.
그래서 조선 건국 후 가졌던 특유의 활기가 차츰 무뎌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백성들이 문자를 깨쳐 더 적극적으로 지배층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리고 대리청정 후 과감하게 개혁을 몰아붙이고 있는 세자와 아주 합이 잘 맞는, 영특하고 추진력 강한 이 아이라면!
“향이가 괘종시계의 그 뾰족 바퀴가 자꾸 부러져서 여러 합금을 시험하고 있다고 하였다. 너는 향이와 함께 그럼 인쇄하기 좋은 활자를 만들어서, 교훈을 담은 여러 책을 정음으로 보급하거라.”
“예,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침내 지식 권력의 한 축을 잡을 기회를 쟁취하였다.
윤서는 설레고 흥분된 기분으로 천추전을 나왔다.
때마침 높게 떠오른 정오의 해가 저 남쪽 정 중앙에서 내일의 희망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조 상궁, 제약 공장으로 가겠네.”
윤서는 꽁꽁 얼어붙는 추위에도 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한 채 기다리고 있던 조 상궁에게 말했다.
전순의를 찾아가 정말로 임신 맥이 잡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것 같아. 그것도 사내아이.’
비현각에서 이향에게 한명회에 대해 말했던 밤.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곳이 비현각이었기에, 윤서는 추억에 젖어 이향을 유혹했었다.
유난히 강렬했던 쾌락의 끝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홍위가 벌거벗은 갓난아기를 건네주는 꿈을 꿨었다.
꿈답게 배경은 현대여서, 홍위가 건넨 사내아기를 안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그 아기가 변기가 넘치도록 황금빛 똥을 쌌었다.
꿈 내용이 하도 맥락이 없이 황당해서 파다닥 잠에서 깨어 “복권이 있으면 사야 하는데요. 이거 정말 로또 1등 꿈인데.” 아쉽다고 바닥을 치며 속삭였더니, 복권이 무엇이고 로또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 난 이향이 껄껄 웃으며 “그거, 태몽인 것 같소, 부인.” 하고 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그 밤에 아이가 생긴 것이라면 이제 4주도 채 되지 않았다.
윤서는 혜민국에서 운영하는 공장으로 향했다.
전순의가 그곳에서 먼 길을 떠날 대군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만들고 있는 약재의 공정을 감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약 공장은 윤서가 감독하기 편하도록 경복궁 서북쪽 맨 끝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도둑을 막기 위해 높은 담장을 두른 공장의 커다란 대문을 들어서면 양옆으로 각종 약재를 보관하는 행각이 늘어서 있고, 뜰 중앙에 고약과 연고, 탕약을 만드는 커다란 무쇠솥이 여러 개가 죽 늘어서 있었다.
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중앙 건물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동쪽 방에 각종 의학 서적이, 서쪽 방에 각종 처방전이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윤서가 대문을 통해 공장에 들어갔을 때, 뜻밖의 인물이 전순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부인께서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였다.
윤씨가 이제는 낯이 익은 조 전언과 또 눈매가 심상치 않은 낯선 여인 하나를 거느리고 전순의와 무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혜민국에서 윤서에게 추문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홍위가 성공적으로 왕재를 뽐낸 세책례 이후 윤씨는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추고 명례궁 밖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윤서는 조 상궁이 심어둔 사람들을 통해 윤씨가 계양군의 부인 한씨와 자주 왕래하며 번듯한 가문의 규수를 장차 세자빈으로 들이밀기 위해 여러 가지 계책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이를 가졌는지 여부를 확인받기 위해 들른 공장에서 바로 윤씨를 만나다니.’
홍위의 숙적인 윤씨가 또한 배 속 이 아이의 운명적인 숙적이기도 하다는 징표 같아서, 윤서는 더욱 투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머, 이게 누구신가? 세자 저하의 애첩이 아니신가?”
윤씨가 수양 대군이 윤서를 부르듯 ‘애첩’이라 부르며 빙글빙글 웃었다.
“애첩이라.”
윤서는 부러 이전의 나인복과 다른 연두색 비단 단삼 자락을 손으로 쓸며 환하게 웃었다.
“그 애첩이 아이를 낳으면 장차 세자빈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잊으셨습니까?”
“글쎄. 자네는 간택 후궁이 아니라 승은 후궁이 아닌가? 게다가 양반이긴 하나 아비는 일찍 여의고, 어미는 자넬 버리고 재가한 데다 문서를 위조하는 데 협력한 혐의로 귀양을 가 있는데, 그런 처지의 후궁이 과연 세자빈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야.”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몸 권가의 거머리 같은 가족들이 저 멀리 거제도에 귀양 가 있다는 사실을.
“아? 아아! 이제 기억이 나셨나 보네.”
윤씨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윤씨 옆에 서서 내내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윤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여인이 윤씨의 귀에 손을 대고 무어라 속닥거렸다.
윤서는 조 상궁을 돌아보았다.
조 상궁도 윤서의 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무가이란 이름의 성수청 국무로, 윤씨가 깊게 의존하는 무당입니다.”
무당이든 뭐든 상관없다.
윤서는 윤씨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