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화. 홍위의 훈민정음
“향이 좋구나. 선아야, 고맙구나.”
이향이 선아를 땅에 내려놓자, 이번에는 홍 상궁의 손을 잡은 금아가 쭈볏거리며 앞에 나왔다.
전순의의 치료를 받고 있는 금아는 전보다 얼굴빛이 많이 나아졌지만 홍 상궁의 얼굴은 처연할 정도로 창백하였다.
이향은 금아를 안아 들고 안색을 유심히 살피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당부하였다.
“우리 금아, 약 열심히 먹고. 밥도 많이 먹어야 한다.”
“녜에, 아밤마.”
“···저하!”
홍 상궁이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자, 이향은 금아를 건네며 홍 상궁에게도 “낯빛이 많이 안 좋네. 건강 잘 챙기게.” 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 승휘와 민 승휘, 권 승휘와 장 사칙은 모두 뒤에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왜, 인사 안 해?”
이향이 다른 후궁의 전별 인사를 받는 광경을 지켜보던 군주가 윤서 손을 풀며 물었다.
“아까, 인사드렸어요.”
“여기서 또 해야 해. 다른 후궁들이!”
평소에는 새초롬하게 조용조용 말하는 군주가 오늘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
희아의 말투에서 윤서는, 군주가 평소 감추고 있던 바람을 읽어내었다.
다섯 살 때까지 후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를 보고 자라난 평창 군주는 윤서가 제대로 내궁을 휘어잡아 자신과 홍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윤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고 있는 홍위의 검은 눈동자와, 입술을 앙다물고 윤서가 뒤로 물러나 있는 것에 화를 내는 희아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기로 했지. 그러려면 유치해도, 익숙하지 않아도,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해야지.’
윤서는 품에 폭 안겨 있는 홍위를 뜰에 내려놓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향을 불렀다.
“저하!”
윤서가 부르자, 막 비현각 쪽으로 난 문을 나서려던 이향이 몸을 돌렸다.
“두 분 아기씨와 배웅, 하려고요.”
윤서가 소리치며 아이들 손을 잡고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이향이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긴 다리로 마주 걸어왔다.
동궁의 뜰에는 고요한 침묵이 내렸다.
다른 후궁과 그들을 모시는 궁인들이 뾰족한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세자와, 세자의 적장녀와, 그의 유일한 아들 원손과, 그 두 아이가 엄마처럼 꼭 손을 쥔 윤서를 지켜 보았다.
금세 앞까지 다가온 이향을 올려다보며 윤서가 속삭였다.
“저하가 안 계시면 밤이 너무 길 것 같아서요.”
허억.
너무 격 없이 친근한 윤서의 말에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윤서는 개의치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다시 외쳤다.
“그래서 저하께서 부재하시는 동안 우리 군주 자가와 원손 아기씨를 제 전각에서 모셔도 될까요?”
“제가 졸랐어요, 아바마마. 재미난 옛날이야기 듣고 싶어서요. 허락해 주세요.”
궁중 암투에 있어서는 윤서보다 훨씬 더 경험이 풍부한 희아가 재빨리 윤서의 말을 받았다. 좀 전까지 샐쭉해져 있던 희아의 눈매가 장난꾸러기처럼 기분 좋게 휘었다.
“나두 좋아요. 눈나랑 같이 집 도깨비 이야기 드으 꺼야. 버던 주기 전에는 맨날 심!부음 해요.”
(나도 좋아요. 누나랑 같이 집 도깨비 이야기 들을 거야. 버선 주기 전에는 맨날 심부름 해요.)
그림 동화가 다 떨어져서 해피 포터 시리즈에 나온 요정 도비를 집 도깨비로 바꿔서 들려주었더니 요새 그 이야기에 폭 빠져 있는 홍위도 좋다고 폴짝폴짝 뛰었다.
‘하아, 우리 홍위는 아내를 하나만 맞이하게 해야지. 이렇게 후궁이 많으니 아이들도 참, 이게 뭐야.’
윤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이향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봤지, 다들!
평소보다 과장되게 웃는 윤서의 웃음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챈 이향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럼, 밥 잘 먹고, 손 잘 씻고, 권 승휘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네, 아바마마! 걱정 마지고 단녀 오데요. 홍이가 건 승위 잘 돌보께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바마마!”
“다녀오세요, 저하.”
네 사람이 정말로 보통의 가족처럼 작별 인사를 나누자 희아가 드물게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이향은 긴팔로 세 사람을 한꺼번에 안고 윤서의 귀에 속삭였다.
“달리기 하다가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 수영할 수 있도록 길 잘 닦아놓고 올 테니, 홍위랑 희아랑 잘 지내고 있으시오, 부인. 아까처럼 울지 말고.”
이향은 다정한 인사를 속삭이고 이제 정말로 몸을 돌려 떠났다.
이향이 비현각 문 안쪽으로 사라진 후, 윤서는 두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몸을 돌려 질투와 시기, 부러움 등의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후궁들을 바라보았다.
“저하께서 환궁하시고 난 직후 곧 생신을 맞이하십니다. 정 승휘께서는 모쪼록 저하의 연회를 잘 준비해 주세요.”
윤서가 말하자 정 승휘가 일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후궁 세계에서는 총애를 받는 이의 서열이 높을 수밖에 없는 법, 이내 눈에 힘을 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해 잘해 왔으니, 올해도 차질 없을 걸세.”
그리고는 팽그르 몸을 돌려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빠르게 후궁 처소로 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양 사칙이 선아 현주의 손을 잡고 따랐다.
홍 상궁도 휘하 나인에게 은 “금아를 안게.” 하고는 민 승휘와 함께 나인들을 끌고 가버렸다.
뜰에는 이제 유 승휘와 어린 권 승휘만 남았다.
유 승휘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희아와 홍위에게 “잠시만 권 승휘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양해를 구하고 윤서의 귀에 속삭였다.
“권 승휘가 가르쳐 준 그 문자로 내 새 이야기를 하나 썼는데 말이오.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로 적으니 얼마나 글이 잘 풀리는지. 내 지은 이야기 좀 이따가 봐주시겠소?”
“그럼, 전하께서 곧 정음을 공표하실 때 제 육아보감도 함께 공표하기로 했는데, 매끄럽고 아름답게 가다듬는 것도 함께 합시다. 내, 글이 너무 딱딱해서.”
“좋소. 그럼 이따 밤에 가겠소!”
호탕하게 유 승휘가 웃다가 문득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 그리고 참 내가 긴히 할, 말이.”
유 승휘는 고개를 돌려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앳된 권 승휘를 보았다.
유 승휘의 눈길에 권 승휘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애원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윤서가 물으려는데,
“권 승휘 마마님께서는 지금 천추전으로 들라십니다.”
대전에서 온 내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갑니다!”
윤서는 먼저 답을 주고, 유 승휘에게 “이따 밤에 마저 말합시다.” 하고 이씨 부인과 유모 백씨에게 홍위와 희아를 맡겼다.
유 승휘는 조 상궁과 매금이와 나인 셋을 거느리고 천추전으로 바삐 가는 윤서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로 “하아, 큰일인데.” 중얼거렸다.
그러자 창백한 낯빛으로 가만히 서 있던 어린 권 승휘가 유 승휘에게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유 승휘 마마님! 말씀하신 거 아니죠? 말씀하시면 저 정말 죽습니다.”
“이게 어디 자네만 죽고 끝날 일인가! 하! 정말! 어쩌자고! 여기서 멈추게. 멈춰야 하네.”
혼을 내었다.
권 승휘는 앳된 얼굴에 눈물만 가득 담고 울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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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전 앞에 서자, 조 상궁이 솜을 넣어 누빔질 한 윤서의 연두색 단삼 자락을 바르게 정돈해주었다.
“날이 추우니 여기 서 있지 말고 매금이와 다들 함께 돌아가시게.”
“아닙니다. 법도가,”
“사람 나고 법도 났지, 법도 나고 사람 나지 않았어. 전하 말씀이 얼마가 걸릴지 모르니, 여기 서서 떨고 서 있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리시게.”
“예, 하지만 소인은 장차 내궁을 다스리실 마마님을 바로 보필해야 할 저의 임무가 있습니다. 어서 들어가 보소서.”
"그렇구먼. 그렇지. 자네도 자네의 목표가 있지."
윤서는 늘 궐 안팎을 두루 살피며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듬직한 조 상궁의 어깨를 두드리고 천추전 안으로 들었다.
천추전은 불을 많이 넣었는지 따스하였다.
윤서가 엎드려 절을 올리자, 세종께서 천 상궁의 부축을 받아 탁상 상석에 앉으시며 물으셨다.
“향이는 잘 전별하였느냐?”
“예, 전하.”
“향이가 참 훌륭하고도 어려운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네가 열심히 보필해야 한다.”
“예, 전하.”
“그래, 이리 와 앉거라.”
윤서가 의자에 앉자 천 상궁이 향이 좋은 차 한잔을 내주었다.
봄에 처음 세종을 뵈었을 땐 입구에서 엎드려 고개도 못 들었는데,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며느리가 되어 차도 받게 되었다.
세종의 며느리라니.
“정음 반포가 바로 다음 달이다. 반포하는 날 정음의 원리를 담은 서책과 함께 이 <육아보감>을 신하들에게 나눠줄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응? 왜?”
“예?”
“왜 성은이 망극하다는 것이냐? 정의 공주랑 함께 지었다만 내용은 거의 다 네 머릿속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왜냐하면 역사서에 그 위대한 <훈민정음>과 함께 제가 지은 육아서 <육아보감>이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세’ 하는 <용비어천가>보다 더 많이 언급될 테니까요.
갑자기 가슴이 벅차게 뿌듯하면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전하께서 만드신 정음이 너무도 훌륭하신지라······, 저의 저작이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불현듯 목이 메었다.
이리 위대한 세종과 그보다 더 뛰어난 성군이 될 이향의 사람으로 함께 역사 속에 기록된다는 것이. 이향과 함께 새로운 조선의 시간이 흐르게 한다는 것이.
백성이 제 목소리를 문자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벅찰 정도로 감동이었다.
“허허헛. 우니? 하! 나인 때는 오히려 눈 동그랗게 뜨고 겁도 없이 대들더니. 천 상궁!”
전하께서 손짓하시자 천 상궁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 좋은 날에, 송구하옵니다.”
사과드리며 윤서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이향에게서 극진한 사랑을 받아서일까.
요새 감정이 너무 풍부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 걸 민망해하며 윤서가 눈물을 닦자, 세종께서 한층 부드러워진 음색으로 물으셨다.
“아이들에게 허황된 기담(奇談)을 들려주는 것이 육아의 관점에서 좋은 일이더냐?”
“···예?”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까 홍위가 “나두 좋아요. 눈나랑 같이 집 도깨비 이야기 드으 꺼야. 버던 주기 전에는 맨날 심!부음 해요.” 하고 외치는 혀짤배기 귀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세종께선 어제 오후, 홍위와 희아가 중궁전 뜰에서 뛰어놀던 광경을 떠올리셨다.
언젠가부터 깊은 바닷속에 사는 인어 공주가 사람이 되어 왕자를 사랑하다가 끝내 공기 방울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할바!마마! 공기가 된 잉어공주를 다시 어명으로 공주 만들어 주세!요.”
울먹거리거나,
“난쟁이 이곱 명이랑 백덜 공주가 다는데, 근데 할바!마마, 난쟁이가 머에요?”
묻는 둥, 기기괴괴한 이야기를 하던 희아와 홍위는,
며칠 전부터는 즐겨하던 낚시 놀이 대신 지팡이를 들고 희아의 개 몸몽이를 쫓아다니며 요괴를 물리친다며 주문을 외치기 시작했다.
물리칠 척(斥)을 이용한 주문이었다.
“홍위랑 희아가 나한테 요새 별별 이야기를 다 해주더구나. 어제는 내 지팡이를 가져다가 몽몽이를 향해 겨누고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 요괴를 물리친다며 ‘처코야! (척(斥)호(弧)야)’라며 방방 뛰어다녔다.”
“!!!”
아이구야.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고 아직 또래 놀이 친구도 변변히 없는 희아와 홍위가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국왕이신 할아버지를 어려워하지 않고 재잘재잘 옮길 줄이야.
어제 혜민국에서 운영하기 시작한 제약 공장에 동상용 연고 등 이향 순행 길에 보낼 물품이 제대로 챙겨졌나 보러 간 사이 일어난 일이었으리라.
홍위와 희아가 이리 활달하고 천진해진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그렇지만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괴력난신 이야기를 세종께서는 어찌 수용하실지 가늠하며, 윤서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입안의 살을 살짝 씹었다.
“네가 그리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아이들 정서에, 괴담에 한참 빠져서 ‘척호야’, ‘척이매야’ 하고 외치며 노는 것이 좋은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