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화. 이향이 순행을 떠나던 날
본격적으로 맹추위가 시작된 11월 7일.
이향이 경기와 강원도, 충청도 이북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엿새 간 궐을 비우는 날이었다.
2년 뒤부터 현물 대신 쌀로 공물을 거둬들이기로 예정된 경기 지역에서 한창 길을 닦는 요역이 진행 중이었다. 쌀을 한양으로, 아니면 배가 있는 선착장으로 실어 나를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이번 부역은 왕실 내수사에서 쌀로 일당을 지급하고 있어서 작업 진척 속도가 빨랐다.
그 작업을 이향이 직접 돌아보고 점검하려는 것이었다.
이향이 전하와 중전마마와 아침 수라를 함께하며 인사를 드리러 간 틈을 타, 윤서는 중비를 불렀다.
“파루가 울리자마자 박 상궁 마마님 돌아오신 거 확인했지?”
“예, 돌아오셨습니다.”
박 상궁은 윤서가 매금이를 키워낸 조직 이야기를 꺼낸 후 그날부터 심한 몸살을 구실로 병가를 얻어 사가로 나갔다.
매금이를 여러 번 보냈지만, “말 안 해.” 세 마디가 매번 돌아오는 답이었다.
사안이 중해 서신을 써보낼 수도 없어 그저 잘 계시다는 말로 안도해야 했다.
마침 이향이 순행을 나가야 해서 동상에 바를 연고, 배탈 약 등을 수행 관원과 탈이 난 부역자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만드는 것을 감독하느라 서소문 밖 박 상궁 사가를 가 볼 짬이 안나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다 드디어 어제 저녁 매금이 입에서 “내일 새벽”이란 말이 나온 것이었다.
“중비야, 전복죽 끓였지? 인삼 듬뿍 넣고.”
“예, 끓여서 그릇에 담아두었습니다.”
“매금아, 가자!”
윤서는 조 상궁 등 모든 궁인을 물리고 매금이에게 쟁반을 들려 빠른 걸음으로 경복궁 끝 박 상궁 거처로 갔다.
사흘 새 박 상궁은 주름이 폭삭 늘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니?”
“먼저 드시고 들으세요.”
“먼저, 말해라.”
“매금아, 사월이 언니 방에 가 밥 먹어.”
“응!”
윤서는 매금이까지 내보내고, 박 상궁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 박 상궁의 검버섯 핀 손을 잡고, 밖에서는 도저히 엿들을 수 없도록 박 상궁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매금이에게 이것저것 물었어요. 하지만 살아온 곳을 ‘어둡고 깊어’ 외에 알아내지 못했죠. 그러다가,”
윤서는 홍위를 무척 귀여워하는 매금이가 점차 평창 군주랑도 가까워지더니, 닷새 전쯤 문득 백설 공주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희아에게 “너, 군주, 매향이, 공주” 하고 말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거기서 조각이 착 맞춰졌어요. 노비라면서 중국어와 왜어까지 유창한 노산대와 그의 양딸이라는 매향. 고급 기루를 운영하는 행수 기생이면서 절대 몸은 팔지 않는 기생. 기적에는 오르지 않은 양민이면서 어지간한 사내들도 오로지 발 너머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그 매향이가 공주라는 매금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미냐.”
박 상궁이 알아챘을까 봐 두렵다는 듯, 혹은 들켜서 차라리 후련하다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손에 잡힌 손끝이 차갑게 떨고 있었다.
윤서는 박 상궁과 시선을 단단히 얽은 채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전조 고려의 왕손.]
“하아.”
박 상궁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윤서는 박 상궁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고 다시 귀에 속삭였다.
“세자 저하는 이 나라의 법과 제도가 될 수 있는 존재시지요. 따라서 그의 여인인 저도 법과 제도 안에 있어야 해요. 그러니 제게 어머니 되시는 박 상궁 마마님도 법과 제도 안에 있으셔야 해요.”
“······.”
“저, 아끼시잖아요. 음식 솜씨 좋은 중비를 제게 보내실 만큼.”
“하아.”
“마마님, 저 지금 세자 저하 순행 나가실 때 입으실 의복 시중 들러 자선당으로 가봐야 해요. 한 가지만 명심하세요.”
윤서는 박 상궁의 좁아진 어깨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속삭였다.
“박 상궁 마마님이 제겐 이 세계의 어머니세요. 매금이는 동생이고요.”
“하아.”
박 상궁은 벌써 세 번째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박 상궁에게도 현실을 수용할 시간이 필요했다.
“매금아.”
거처로 돌아오는 길,
윤서는 매금을 불렀다.
“응?”
“내가 후궁이 되었으니 본방 나인을 둘 수 있어. 그래서 널 심부름꾼 호위 방자가 아닌 본방 나인으로 두고자 한다.”
“본방, 뭐야?”
배 부르게 먹어 고양이처럼 나른해졌던 매금이가 뚝 멈춰서더니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박 상궁과 윤서는 지켜야 할 한편’ 그래서 ‘윤서의 사람도 지켜야 할 한편’이라는 단순하고 명쾌한 공식을 가지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매금이 요 며칠 갈등하는 박 상궁과 윤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혼란스러워 화가 난 것이다.
“본방 나인은 과거의 나와 같은 거야, 매금아. 내가 후궁이 되기 전 우리 아기씨의 본방 나인이고 보모 나인이었어. 그러니까 매금이 너도 내 본방 나인이 되면 우리 홍위 아기씨, 우리 희아 아기씨, 그리고 나와 우리 세자 저하 곁에 내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같은 편으로 계속.”
“죽을 때?”
죽을 때까지 계속 함께 있는 거냐는 물음에, 윤서는 매금이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누구의 칼로만 키워지며 뿌리 없이 떠돈 작은 아이가 명확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 본방 나인은 모시는 이의 허락에 따라 출궁해도 되지만, 디지털 언어처럼 0과 1로만 이뤄진 사고 회로를 가진 매금이에게는 단순하게 말해야 했다.
“본방 나인은 그 주인과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좋아!”
윤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금이가 대답했다.
“좋아! 너도, 홍위도, 희아도, 좋아!”
“그래. 나도 네가 좋다. 가자,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윤서는 굳은살이 잔뜩 박혀 나무토막처럼 단단한 매금이의 손을 잡고 거처로 돌아와, 이향을 위해 만든 호피 안감 외투를 들고 자선당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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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동상에 걸리실까 봐 연고 많이 넣었습니다. 호위 관원들과 백성들 몫까지 넉넉히 챙겨 홍 내관에게 맡겼으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게 하시면 돼요. 그리고 저하, 땀 많이 흘리게 되면 꼭 비누로 씻고 잘 말려야 해요. 꼭.”
솜을 넣어 누빈 융복의 허리띠를 매주며 윤서는 끊임없이 당부의 말을 하였다.
올해는 가뭄이 심하고, 이향이 본격적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첫해인 이유로 가을 강무가 없었다. 그래서 동궁에 온 후 처음으로 오래 떨어져 있게 된 윤서는 출발도 하기 전에 벌써 그리워지는 마음을 당부의 말로 가렸다.
‘몸이 어려져서 마음까지 어려진 것인가.’
고작 엿새 떨어지게 되는데도 왜 이리 애틋한 마음이 드는지.
스스로도 의아해 윤서는 피부에 좋은 동백꽃 기름을 넣어 만든 밀랍 크림을 이향의 얼굴에 듬뿍 발라주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이향이 윤서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이리 헤어지기 싫으면, 함께 가겠느냐?”
“아, 아닙니다. 찬 바람에 이리 수려한 얼굴이 상할까 그럽니다. 이 동백 크림도 홍 내관에게 챙겨 주었으니 아침마다 바르세요, 꼭.”
“작은 목각 인형으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으면 좋겠구나.”
다른 때 같으면 이런 과한 표현에 피식 웃고 말았을 터인데, 오늘따라 웃음이 나지 않아 윤서는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윤서야. 우는 게야?”
“아니에요.”
“그렇게 그리운 마음은 서신으로 써 보내거라. 파발 제도가 잘 운영되는지 점검해야 하니, 꼭 매일 보내야 한다.”
“홍위랑 희아랑 함께 써서 보낼게요. 그리고 이건, 저하. 제가 저하를 위해 지은 외투에요.”
윤서는 벙벙하게 두를 수 있는 외투를 이향에게 보여주었다.
“안감이 호피니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파고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등 뒤에, 이거 보세요. 저하의 융복에 달린 용보도 달았습니다.”
이향이 “으하하하” 하고 웃더니,
“이렇게 신분을 나타내는 옷을 너는 좋아하지 않지 않았느냐? 너의 시대는 모두 법 앞에 평등하다고, 방심하면 내관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느냐?”
물었다.
“당신이 법과 제도가 되는 시대잖아요. 당신이 백성을 위해 더 좋은 공물법을 만들기 위해 순행을 나가시는데, 가장 멋지고 위엄 있게 보여야지요. 공물을 쌀로 받는 대동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누이 배웠는 걸요. 그리고 여기 주머니에 제 서신도 넣었어요. 이따가 밤에, 혼자 있을 때 보세요.”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오, 부인?”
“···어서 가요. 저하. 또 이렇게 옷 흩트리지 마시고.”
“하! 다시 입으려면 너무 복잡해서. 옷 좀 어떻게 간소하게 입는 법을 만들든가 해야지. 응?”
한참 아쉬운 이별 의식을 치르고 대청 마루에 나오니, 서온돌에서 홍위가 달려나왔다.
“아바마마! 다음엔 소!자도 가고 싶!사옵니다.”
“그래. 우리 홍위 어서 커서 아비랑 같이 순행을 나가자꾸나.”
“아바마마, 잘 다녀오세요.”
평창 군주도 홍위를 안은 이향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래, 희아야. 아비가 없는 동안 몽몽이랑 홍위랑 잘 놀고 있거라.”
홍위를 품에 안은 이향이 군주도 안으며 속삭이자, 희아는 이향 뒤에 서 있는 윤서를 힐끗 보고 또 고개를 돌려 자선당 뜰을 보았다.
뜰에는 정 승휘를 비롯하여 이향의 후궁들이 모두 전별 인사를 하기 위해 서 있었다.
“저하께서 순행 길에 나서신다 하여 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정 승휘가 한 발 나서며 말하였다.
이향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홍위를 윤서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홍위가 해를 당할 때 너희는 어디에 있었느냐!'
노여움으로 찌푸려드는 미간을 바로 하며 이향은 뜰로 내려섰다.
윤서도 한 손으로 홍위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희아의 손을 잡고 뜰로 내려섰다.
“혹여 추위가 심할까 팔 토시를 준비하였습니다, 저하.”
정 승휘는 검은 족제비 털로 만든 팔토시를 내밀었다.
“고맙소, 정 승휘. 권 승휘와 함께 내궁을 잘 살펴주기 바라오.”
이향은 팔을 내미는 대신 뒤에 시립한 홍 내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홍 내관이 정 승휘가 내민 팔토시를 받아들었다.
정 승휘가 실망하여 살짝 이마를 찌푸리는 것이 윤서의 눈에 잡혔다.
“모두 건강하게 잘 있기 바라네.”
이향이 인사를 하고 걸음을 떼려 하자 양 사칙이 뒤에 세워 두었던 선아 현주를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선아가 이향에게 종종 달려가 품에 안겼다.
“아바마마, 소녀가 아바마마를 위해 어머니와 함께 향낭 주머니를 만들었어요.”
“우리 선아가 참으로 애를 썼구나. 고맙다. 건강하게 잘 있거라.”
이향이 안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양 사칙이 앞으로 나섰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수를 놓았어요, 저하.”
양 사칙이 이향의 감청색 외투 자락을 헤치고 작은 진주 알갱이로 꽃을 수놓은 붉은 비단 주머니를 융복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리고 내처 이향의 옷자락을 쓰다듬고 이향을 올려다보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순간, 홍위를 안은 팔과 희아의 손을 쥔 윤서의 손아귀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아파!”
희아가 놀라 윤서를 올려다볼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