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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75화 (75/255)

제 75화. 박 상궁과 매금이

"의학서를 정음으로 번역하여 의녀들을 교육시킬 예정이라고?"

중전마마께서 부르셔서 중궁전에 들었더니, 윤서가 혜민국에서 의녀를 의원으로 양성하는 일부터 물으셨다.

“예, 중전마마. 유 승휘가 글재주가 아주 뛰어나서 벌써 정음으로 글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 승휘와 함께 정음 교재를 만들어 몇몇 의녀에게 가르친 후, 그들에게 의서를 정음으로 번역하여 교재를 만들어 가르칠 예정입니다. 나중에 정음을 아는 이들이 많아지면 기본적인 의료 지식 책도 출판하여 보급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것 참 좋은 일이다. 여자들한테 의녀가 참으로 도움이 되지 않느냐? 우리 조카며느리 일도 참 도움이 컸다.”

지난 9월, 중전마마 여동생의 며느리가 임신한 지 여섯 달만에 조산하고 위급하다 하여 혜민국 의녀들을 보내 도운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태아는 끝내 잘못 되었다만, 그래도 네가 보낸 의녀 덕에 우리 조카며느리는 무사하였다. 그 아이가 보약을 먹으며 몸을 보해 다시 회임을 했다. 우리 동생이 아주 고마워 해. 나도 무척 고맙다.”

“아! 참, 잘 되었습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산후열은 위생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산을 한 산모의 거처를 알코올을 희석한 물로 닦고, 드나드는 이들 모두 청결하게 하고, 자궁의 출혈을 멈추는 탕약과 침술을 같이 해 그 며느리는 회복할 수 있었다.

혜민국에서 파견한 의녀가 의원의 지도를 받아 해낸 일이라 윤서도 무척 뿌듯했고, 실제로 그 이후 세도가에서 출산을 앞두고 의녀를 보내줄 수 있는지 묻는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제 삼사 년 후면 산욕열로 죽는 산모의 수는 획기적으로 줄 것이다.

그런데, 중전마마의 안색이 그닥 밝지가 않으셨다.

“그 아이가 조산하게 된 것이 사실은······.”

자꾸 말끝을 흐리시는 것이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편히 말씀하세요.”

“그 아이가 조산하게 된 것이 그 남편, 그러니까 내 조카가 그 조카며느리가 혼인할 때 데리고 온 계집종에 손을 대서, 그 장면을 보고 그 충격에 그리된 모양이다.”

“아! 네.”

“사정이 헤아려지느냐? 조카며느리가 그 일 이후 한동안 넋이 나갔다가 겨우 회복해서 아이를 가졌는데, 다시 또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한단다.”

임신 초기 우울증이었다.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배 속 아이를 잃고 마음을 완전히 추스르기 전에 또 아이를 가지면서 깊어진 우울증이리라.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네가 사람 마음을 잘 치유해서 널 불러 이야기한 것이다. 여동생이 그 일로 너무 상심하고, 또 그 집 첫 손주여서, 이번에는 반드시 무사히 태어나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중전마마.”

“그래. 고맙다. 그런데, 윤서야······.”

또 말끝을 흐리시는 것을 보니 더 하실 말씀이 있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중전마마.”

“···내가 봄에 네게 주었던 약재 말이다. 그거, 달여서 마셨더냐?”

“아!”

이향이 처음 윤서를 안은 후, 매일 밤 윤서를 지나치게 탐하자 중전마마께서 몸을 보하라시며 보약을 지어주신 적이 있었다.

실은 그 약, 윤서는 먹지 않았다.

"명심하거라, 권가야. 궐에서 믿을 사람은 자신뿐이다!"

박 상궁 마마님께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원이 직접 고른 약재 외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선물이 들어와도 먹어서는 아니 된다며 빼앗아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아우, 역시 중전마마는 믿을만한 분이시다. 아주 힘이 펄펄 나, 펄펄.” 하시며 그 덕에 비누 상점 운영도 잘 할 수 있다고 좋아하셨는데.

차마 사실을 고할 수  없어 윤서는 그저 “잘 달여 마셨습니다.” 말씀드렸다.

그러자 중전마마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그 약제를 그 조카며느리에게도 주었었다. 사실 나는 조산이 그 약재 때문이 아닌가도 싶어서.”

“마마!”

“그 약재가, 명나라에서 보내온 귀한 약재라며 선물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윤서 너하고 조카며느리한테 나눠 주었던 것이야.”

“그럼 그렇게 빨리 다시 임신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중전마마. 혹시라도 그 약재에 누가 손을 쓴 것이면 말입니다. 대체 누가 바쳤습니까?”

“그건 말할 수 없다. 심증만으로 문제 삼을 수 없어. 다만,”

중전마마께서는 한참 윤서를 보시더니, 이윽고 결심하신 듯 빠른 어조로 말씀하셨다.

“내가 그간은 별생각이 없었다만 네 덕에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고 나니 좀 이상하더구나.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무슨 말씀이실지 저도 짐작합니다.”

명 황실 쪽에서 보내온 약재라면 한확의 가문에서 바친 최고급 약재일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약재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중간에서 누가 손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박 상궁 마마님 말씀이 옳았다.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의원이 고른 약재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선의로 건네는 약재조차 믿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

하아, 이렇게 사니 궐에서 살다보면 아무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인가.

그럼 박 상궁 마마님의 그 조직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많이 쓰라렸다.

하아.

중전마마께서도 깊게 한숨을 내쉬셨다.

“사람이 참으로 무섭구나. 사람이, 제일 무서워.”

“중전마마 같으신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전하의 자손이 모두 이토록 번성하시는 것은 모두 중전마마의 보살핌 덕분이십니다."

“내가 넋을 놓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이미 딸 둘과 아들을 둘이나 낳은 상태에서 궐에 들어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동궁에는 지금 확실하게 내궁을 지킬 이가 없어 근심이다.”

이 말씀을 하시며 중전께서는 윤서를 물끄러미 보셨다.

어서 왕손을 낳아 자리를 굳건히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원손 아기씨는 건강하게 장성하실 것이니 심려 마시어요, 중전마마.”

윤서는 말을 돌렸다.

그러자 중전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문득 물으셨다.

“금아는 영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냐?”

“그 연지나 백분 성분이 단약의 성분으로도 쓰이나, 실은 몸에 독성이 쌓이면서 축적되는 것이라 지금으로서는, 그저 좋은 약재로 조금씩 건강하게 만드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합니다.”

중전마마께서는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쉬셨다.

“하아. 그래. 윤서야. 너는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지?”

“예.”

“그 약 때문인가 싶어서 내가 마음이 무척 안 좋구나.”

“아닙니다, 중전마마.”

그 약 때문은 아니나, 여기 영혼이 오게 될 때 권가가 먹었던 약 때문에 달거리가 불규칙하였다. 그래서 전순의에게 진맥을 받고 자궁을 따스하게 하고 어혈을 없애주는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는 중이었다.

“그래, 네가 아직 어리니 천천히 몸 만들어서 가져도 된다. 그편이 나아. 다만,”

“예, 중전마마.”

“벌써 말들이 나오고 있다. 향이가 아예 후궁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을 땐 여색에 무심하다고들 체념하였는데 지금 너는 어여뻐 어쩔 줄을 모르잖니.”

“······.”

윤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 승휘나 민 승휘 등 간택 후궁의 사가에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은 윤서도 이미 박 상궁에게 들었다.

“지금은 향이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여러 가지 일을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어서 감히 소리 높여 말을 하지 못하고들 있다. 게다가 홍위가 저리 씩씩하고 영민하게 잘 크고 있으니.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원래 역사에서 이향에게 끝내 자식은 지금 있는 셋, 홍위와 희아와 선아뿐이었다.

승휘가 되어서도 윤서는 늘 애틋한 마음이 드는 홍위와,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 희아가 있어서 아이는 급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향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그를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도 커져갔다.

윤서는 긴 단삼 자락 아래로 손을 넣어 아랫배를 쓸었다.

그 꿈이 이향의 말대로 정말 태몽이라면 좋을텐데.

중궁전을 나와 윤서는 오랜만에 박 상궁의 거처로 향했다.

닷새 전 매금이에게서 들은 말 때문에 조 상궁을 통해 은밀하게 알아낸 사실 때문이다.

반갑게 맞이하는 박 상궁에게 먼저 중전마마의 말씀을 전했더니 콧방귀를 흥 뀌셨다.

“중전마마 말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좋은 말씀 같지만 그건 다 시어미 못된 심뽀야. 우리 저하께서 너만 안으신 지 일 년이 지났니, 이 년이 지났니. 무슨 개새끼 홀레 붙이는 것도 아니고.”

“아이고, 마마님, 제발. 말씀 좀.”

말씀을 좀 가려서 하시라고 윤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박 상궁 마마님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씀하셨다.

“왜? 난 이제 부자라서 거칠 게 없다. 너하고 그 강화에 일군 인삼밭만 잘 돼 봐라. 명나라와 왜 나라에서까지 은을 싹싹 긁어모을 것인데.”

“이제 거름 넣어서 밭 만들기 시작했잖아요.”

“산삼 씨 많이 받았는데, 무얼. 거름한다고 닭도 치고. 네가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것이 무엇이 있니? 비누에 자운고에, 종기약만 해도 또 얼마야.”

“그래서 말씀인데요, 마마님.”

윤서는 며칠 전, 매금이는 어디에서 컸길래 수영까지 잘 하냐고 물었던 이향의 의문을 떠올렸다. 더 이상 모른 척하고 덮어두는 건 위험하다.

윤서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무엇인가를 직감하였는지 박 상궁이 주름을 패며 웃던 웃음을 덩달아 뚝 그쳤다.

“매금이 키워낸 조직, 아직도 있는 거지요?”

“!”

“마마님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버셔야 하는 이유가, 그 조직을 뒷받침해야 해서 그러시는 거, 맞지요?”

“무, 무슨 소리야! 다 땅 샀잖니. 월계하고 저기 또 양주에,”

“그간 비누와 화장품 팔아 버신 돈만으로도 그 땅의 다섯 배는 더 살 수 있다는 거 알아요.”

“!”

윤서가 추궁하자 박 상궁의 얼굴이 차갑게 돌변했다.

말은 거칠어도 윤서를 보는 눈만은 따스했던 박 상궁이 처음 지어보이는 표정이었다.

아주 쌀쌀맞은 얼굴로 박 상궁이 천천히, 위엄 있게 말했다.

“권가, 너에게 피해 갈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알아요, 마마님. 제가 이 조선에서 믿을 사람을 단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박 상궁 마마님이에요.”

“!”

“저는 이향을 사랑하지만, 그는 이 나라 세자니까, 저만 위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 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지만 마마님은 절 위해서 아마 그 조직에서 제일 빼어날 살수인 매금이를 이미 주셨잖아요.”

“매금이가 가장 빼어난 아이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난 네가 그 조직에 대해 아는 것을 원치 않아. 밝은 곳만 딛으며 살려무나. 어두운 곳은 내가 딛고 있는 걸로도 충분해.”

윤서는 물끄러미 박 상궁을 바라보았다.

조선에 와서 가장 따스한 사람. 그래서 윤서도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여기 있다.

“제게 조직을 지금 밝히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마마님이 저나, 우리 홍위나, 저하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시리란 것도 진심으로 믿어요.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어요. 게다가 우리 부와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으니, 이미 눈여겨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을 거에요.”

늘 여유만만하던 박 상궁의 얼굴이 처음으로 창백해졌다.

“내가, 궐을, 나가마.”

“아니에요. 지금 나가시면 마마님이 정말 위험해지실 수 있어요. 그러니 부양하기 어려운 그 조직 흩어서 이번 사행길에도 보내 북경에 있게 하고, 또 각 대군들 수행원 뽑으니 거기에도 넣으세요.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무슨 임무를 수행하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그들 사람으로 녹아들게 해야만 나중에 조직이 탄로나도 마마님까지 캐고들려 하지 못할 거에요.”

“···그 아이들을 그렇게, 써먹자는, 것이냐?”

“하나씩, 서서히 하나씩 도로 불러와 일자리를 주면 됩니다. 그땐 제 일도, 마마님 일도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 있을 것이니 번듯한 일과 집을 줄 수 있을 거에요. 지금 상태로는 안 돼요. 마마님이 그들을 부양하시는 것도 힘들고, 또 부양하다보면  곧 조직이 세상에 드러나고 맙니다.”

수양 대군도 매금이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아 뒤를 캘까 두려웠다. 자칫 박 상궁까지 이어져 해를 당할까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향이 매금이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윤서를 지키기에 보아주고 있지만, 언제고 파고들려면 파고들 수 있다.

파고 들었는데 그 조직을 찾아낼 수 없으면 매금이는 지금처럼 노산대가 길에서 주워온 아이로 둘러댈 수 있고, 그럼 매금이도 박 상궁도 함께 안전하게 된다.

“생각할 시간을 좀 다오.”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진 얼굴로 박 상궁이 말했다.

*****

사흘 후, 이향이 처음으로 엿새 간 궐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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