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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74화 (74/255)

제 74화. 이향의 통찰과 결단

윤서는 이향이 제기하는 의문 속에서 역사 속에서는 일어났으나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사람에 대한 혼란을 읽어냈다.

그 혼란은 결국 윤서의 것이기도 하였다.

‘미래의 비극을 막는다는 구실로 한명회와 같은 자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윤서는 나중에 이향에게 한명회가 어떤 인간인지 먼저 말하고 의견을 구하리라 다짐하고, 일단 이향이 물은 것에 대해 답을 고했다.

“역사상 훌륭한 군주들은 신하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것이에요, 저하. 권력에는 아첨하는 무리가 반드시 따르고, 또 권력을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길 원하는 자들이 군주 곁에 머물 테니까요.”

신하가 조정에 몸을 담는 것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제 경륜을 펼치는 것이든 일신상의 출세를 도모하는 것이든, 모두 권력 의지의 한 가지 형태라는 뜻이었다.

윤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내용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향이 한비자의 책을 여러 번 읽고 세종과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고 말한 기억이 나서였다.

“권력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어떻게 분석하느냐?”

이향이 윤서의 몸을 더듬으며 물었다.

정식으로 후궁이 되고 난 후 이향은 뭔가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야 할 때 윤서를 끌어안는 것을 좋아하였고, 윤서도 덩달아 고민이 생기면 이향의 품속부터 파고들었다.

“권력자의 내면을 분석한 책이나 이론을 많이 읽었지만 제 지식이 저하께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요. 주로 선거나 변칙적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에 대한 분석이니까요.”

태생에 의해 신분이 고정되는 사회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 권력자를 제대로 분석했거나, 절대 권력자 자신이 글로 써 남긴 저작물은 없다.

그러니 윤서가 공부한 많은 심리 이론이 이향이 직면한 심리적인 모순을 제대로 설명할 방도는 없어 보였다.

이 작업은 차라리 이향 스스로가 행하는 편이 나았다.

“뇌과학에 따르면 권력을 가질 때 실제 뇌 자체가 변한다고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 공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뇌 기능이 줄고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더욱 강해진다고 하지요. 저하는 어떠하십니까? 대리청정을 하신 후 저하께선, 어떻게 변하셨나요? ”

“으흠.”

윤서의 질문에 이향은 문득 자신이 세자 시절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이라면 아바마마께서 동생들을 각 지역으로 내보내시도록 은근히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정 전반을 총괄할 권한을 가지게 되니 확실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달라진 시야엔 윤서 너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했다. 말해보거라, 역사 속 나는 대리청정 이후에도 별로 변함이 없지 않았느냐?”

“아! 맞습니다, 저하.”

그러하였다.

세종 말년의 치세가 실은 대리청정을 한 문종의 치세라는 걸 역사서에서 배웠지만, 그 이전 세종의 시대와 문종의 치세 사이에 눈에 띄는 확연한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정말로 시간이, 역사가 다르게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한명회 같은 자를 굳이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다시 의문이 들었다.

“윤서 너의 존재가, 또 네가 알려준 미래 지식 덕분에 내가 변하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 조선이 빠르게 발전하겠지. 그렇지만 권력자의 지나친 의심은 신민의 피를 부르기 쉽다는 점에서 나는 늘 스스로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 된다.”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시니 의심의 굴레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향은 그러할 것이다. 스스로 성찰하는 군주니.

윤서가 칭찬하자 이향이 입꼬리를 쑥 올려 웃다가 금세 진지해졌다.

“내가 묻는 말에 ‘예’와 ‘아니오’로만 답하거라.”

“예.”

“그 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신숙주나 정인지와 같은 문관이 아니었지?”

“예.”

“나의 조정에서 일하던 문관들은 정변 후에야 수양의 치세를 공고히 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더냐?”

“예.”

“그럼 그 정변은 무관이 주축이 되었느냐.”

“아니오.”

“그럼 수양이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 집단 성격이 짙었겠구나.”

“예.”

“그럴 것 같았다. 윤서 네 말을 듣고 곰곰이 여러 안을 생각해 보았거든. 정변은 아마도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겠지? 변칙적인 상황에서?”

“예.”

대답을 하면서 윤서는 속으로 놀랐다.

이향은 윤서가 말한 몇 개의 단서만으로 계유정난의 전모를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오늘 네가 말하려던 그자는 아마도 그 변칙적인 정변의 주동자겠지?”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자제 군관이든 무엇으로든 사신단에 넣어달라 하지 않았느냐? 지금 벼슬을 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부탁할 리가 없지.”

“예.”

“그럼 그자는 그냥 두어라.”

“저하!”

“윤서야.”

이향은 윤서를 몸에서 떼어내 바로 서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길에 흐트러진 윤서의 옷매무새를 하나씩 정돈해주며 천천히, 스스로 생각을 정돈하듯 말하였다.

“나의 신하들이 절반이나 죽었다고 하여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내가 오래 고심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날 궐의 방비 체계도, 도성의 수비 체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거란 결론이 나오더구나. 그렇게 되었단 소리는 우리 홍위가 궐 안에 머물지 않았었다는 것, 그리고 수양이 거느린 자들 중에 성벽 수비를 담당하는 하위 군관이 꽤 섞여 있었을 거란 결론을 내었다.”

“예······.”

“그 정변에서 희생된 이들은 대개 노신들이었겠지? 아바마마와 내 밑에서 오래 득세한 나이 많은 신하들. 맞느냐?”

“예.”

“그래, 그렇겠지. 수양의 정변이 성공한 것은 권력을 쥔 노신들이 타성에 젖어 오만했고, 그래서 그들의 독주에 불만을 가진 젊은 관원들이 수양의 정변 후 적극 협력해서 성공했을 것이다. 맞느냐.”

“예.”

“차 한 잔 하자꾸나. 몸을 덥히는 인삼차다.”

윤서가 오자 시중드는 내관을 모두 내보냈던 이향은 손수 화로에서 무쇠 차 주전자를 집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집무용 책상으로 돌아오는 대신 비현각 중앙의 회의용 탁상에 앉아 윤서를 불렀다.

“이리 와 앉거라.”

윤서는 이향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쥐고 이향을 바라보았다.

‘이이는 이제 군주가 다 되었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처음 보았을 때 이향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단정한 세자였는데, 이제는 주도적으로 정국을 이끄는 패기 있는 군주의 자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자를 그냥 두라 하는지 알겠느냐?”

“아니오.”

“내가 처음에 네게 사람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 명하면서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예.”

“말해보거라.”

“보위가 뒤바뀌는 것은 왕실 내의 권력 다툼이지 신하의 충성과 별 관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하는 자신의 학문과 경륜을 펼쳐보일 군주를 따르는 법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래. 잘 기억하는구나.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숙주나 정인지를 꺼려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내 아들을 지키지 않았던 자에 대해 인간으로 품는 노여움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건재한 한, 그리고 나와 너로 인해 홍위가 건재하는 한 제 모든 지식과 경륜을 다할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계속 아껴 중용할 것이야. 그러나 네가 지금 말한 인간은,”

이향은 윤서를 보며 말을 잇지만, 자신에게 들려주듯 천천히, 하나씩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제 권력욕이 앞선 자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정 내에 들어올 수 없어서 수양을 통했겠고, 그래서 나라의 동량이 될 신하들을 무참히 죽여 제거한 놈이고, 그 이후로도 제 권력욕을 마음껏 실현했을 자이다. 맞느냐?”

“예.”

“그런 자는, 쓸 수 없다. 써서도 아니 된다. 나도 써서 아니 되지만, 그건 윤서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그저 내게 어여쁨을 받는 한낱 꽃 같은 여인이 아니라 장차 내명부를 이끌고, 또 장차 홍위와 우리 아이들의 어미가 될 여인이기 때문이다.”

“저하······.”

“네 시대의 권력과 지금의 권력이 다르다고 하였지? 네 시대에는 한 개인이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법과 제도가 막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내가 곧 법과 제도이고, 윤서 너 또한 장차 내명부에서 그리 될 것이다. 스스로 법과 제도가 되어 무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는 스스로에게나 주변 인물에게 엄격하여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21세기 인으로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개념이지만 윤서는 일단 대답했다. 앞으로는 알아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제왕 교육’을 미리 받아야 하는구나.

우리 홍위도 이향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구나.

윤서는 문득 아기이면서도 때로 놀라울 정도로 빼어난 왕재를 선보이는 홍위를 뿌듯하게 떠올렸다.

“공자께서 일찍이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 쉬우니, 기쁘게 하기를 비록 도리로써 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능력이 완비되기를 요구한다.’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맞추어 왜 그자를 써서는 아니 되는지, 말해보거라.”

“······.”

윤서는 엄격한 군주의 얼굴을 한 이향을 바라보며 공자의 말씀을 한 구절씩 깊게 사유하였다. 고루하다고만 생각했던 가르침이 하나의 규율로, 지침으로 구체화된다.

“군자는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수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그자는 처음부터 도리를 저버렸기 때문에 써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그자는 처음부터 충의의 도리를 저버린 소인배다. 그러한 자는 권력을 쥐게 되면 금도가 없이 마구 휘둘러 제가 모시는 주군까지 모두 다 망칠 자이기 때문이지. 그자의 재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쓸 수 없는 이유이다. 알겠느냐?”

“그럼, 차라리 지금 죽일까요?”

윤서의 말에 이향이 “으하하핫”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권윤서. 너는 내가 그토록 못 미더우냐?”

“예?”

“내가, 나의 조선이 그런 잔챙이 소인배 하나로 무너질 것처럼 못 미더운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두어라. 그자가 끝내 수양과 결탁할지 말지 그저 지켜보거라. 아바마마와 나는 수양에게 나름의 큰 기회를 주었다. 기회를 주었으니 이제 그 기회를 수양이 어떻게 살릴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대신 윤서 너는,”

“예, 저하.”

“네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면 된다. 지금처럼 너의 지식으로 의학을 발전시키고, 아이들을 더 잘 키워낼 양육법을 가르치고, 우리 백성의 삶이 더 윤택하게 될 수 있는 방안을 나와 함께 찾아내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향의 눈이 초승달처럼 기분 좋게 휘었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나를 더 많이 위하거라. 지금보다 더. 그래서 내가 오래오래 살아 너의 염려가, 네가 알고 있는 미래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도록.”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인가.

윤서는 때때로 이향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랑 고백을 요구할 때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것은 마치 강제로 짊어진 삶이 실은 필연적인 운명이었다는 벅찬 깨달음 같은 설렘이었다.

윤서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향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너의 영혼이 시공간을 넘어 내게 온 이유와 의미가 아니겠느냐?”

“아아, 이향. 정말, 당신은!”

“당신은?”

“······.”

‘이렇게 대책없이 사람 마음을 흔드십니까’란 말을 윤서는 꿀꺽 입 안으로 삼켰다.

어쩐지 이런 고백을 이처럼 사방이 어둠이 내린 겨울밤에, 화로에서 타닥타닥 숯이 발갛게 열기를 내뿜는 이향의 집무실에서 하기는 쑥스러운 일만 같았다.

“어허, 당신은, 다음에 무엇이오, 부인?”

그렇지만 요새 곧잘 윤서를 놀리는 재미를 들인 이향은 끝내 답변을 재촉했다.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윤서가 둘러대자 이향이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는 이내 진지한 얼굴이 되어 앞날을 이야기했다.

“아바마마께서 조만간 정음을 공표하실 것이오. 그 전에 우리와, 또 먼 길 떠날 동생들과 함께 정음으로 지은 글을 발표할 가족 연회를 여실 계획이라 하오. 부인은 멋진 글로 나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 저하! 전 논문은 잘 써도 멋진 글짓기는 영 꽝입니다.”

“어허! 마음을 담은 글은 투박해도 심금을 울리는 법이라니까. 나에 대한 부인의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 글, 그런 글을 나는 바랍니다.”

때때로

[겨울 나뭇가지 끝에 햇살을 받는 얼음처럼, 내 마음이 그대를 향해 반짝입니다.]

하는 달콤한 연서를 보내는 이향다운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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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세종께서는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했던 여러 대군과 정의 공주, 그리고 윤서와 중전마마, 희아와 홍위와 함께 정음의 실질 쓰임새를 점검할 겸,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전해오셨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중전마마께서 윤서를 중궁전으로 은밀하게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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