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화. 수양 대군과 신숙주
“유구국에 유황이 많이 나고 해상 무역이 발달하였다고 신 수찬이 전하께 보고를 올렸다 들었습니다. 이번 방문을 기회로 조선에 꼭 필요한 유황과 설탕 등의 정기 무역로를 만들 것이니 신 수찬도 함께 다녀오시지요.”
수양 대군은 넌지시 유황과 설탕 무역에 신씨 가문의 이권도 보장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러나 스물여덟 젊은 나이로 벌써 전하의 총애를 깊게 받기 시작한 신숙주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저는 종기 수술로 인해 당분간 더 요양해야 한다고 주부 전순의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내년 한 해는 집현전의 업무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세자 저하의 대리청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싶다는 뜻이었지만 그 말은 의뭉스럽게 안에만 담았다.
신숙주가 세자 저하를 깊이 추앙하게 된 데에는 권 승휘의 공이 컸다.
수술을 받은 직후 태어나서 처음 느낀 지독한 통증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이 혼미해져 있을 때,
“전 주부, 정신을 혼미하게 하지 않으면서 통증을 덜어줄 수 있는 약재나 치료 방법이 있다면 예산을 아끼지 말고 적용해 주게. 부족한 것은 우리 세자 저하께서 개인 내탕고에서 내어주시겠다고 하셨네.”
하는 여인의 근심스러운 말소리가 환청처럼 들렸었다.
“전하에 대한 충정으로 앵속을 마다하시며 수술을 견디시지 않으셨는가. 세자 저하께서 무척 감동하시면서도, 또한 무척 마음 아파하시네.”
고통에 흐려진 시야 속에 아직 앳된 미인이 자신을 근심스럽게 굽어보고, 붉은 비단 치맛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치료실에서 나간 후,
신숙주는 전순의에게 저 여인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윤서의 영혼이 조선에 오기 전에 일본을 향해 떠났기 때문에 원손 아기씨의 보모 나인이었다가 세자의 총애 후궁이 된 권 승휘의 존재를 그는 까맣게 몰랐다.
“혜민국을 총괄하시는 분이자 세자 저하의 여인으로 주상 전하께서도 무척 신뢰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움 섞인 존경이 역력한 태도로 전순의가 고하는 말을 듣자, 젊은 신숙주의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부지런히 익힌 학문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할 청운의 꿈을 품고 벼슬길에 들어선 지 고작 사 년. 신입 관료에 불과한 자신을 벌써 세자 저하께서 알아주신단 사실은 가슴이 벅차도록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이날 오후 늦게 혜민국으로 온 부인 윤씨에 의해 더욱 커졌다.
“아까 권 승휘 마마님이 부군의 열린 상처는 집에서 치료하기 번거롭고 어려우니 여기 혜민국의 고요한 특실에서 마저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며 사람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부군을 이런 귀한 꽃물로 씻어드리라고 지시를 해 놓으셨어요.“
구리 양동이에는 기력 회복을 돕는 약재와 향 좋은 국화 등을 함께 우려낸 약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의녀 셋과 함께 부인의 극진한 간병을 받고, 임금을 진료하는 어의 전순의에게까지 세심한 치료를 받으니 신숙주는 자신이 진실로 조선 왕실의 귀한 인재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권 승휘는 매일 오후 혜민국에 들러 직접 신숙주를 살폈다.
“세자 저하께서 신 수찬의 용태가 어떠한지 궁금해하십니다.”
인사말을 건네고,
“어서 빨리 쾌차하시어 저하를 보필하셔야지요. 명나라와 여진, 몽골의 상황이 날로 복잡해질 것이니, 신 수찬의 외교적 혜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합니다.”
하고 자신의 쓰임새를 매번 과할 정도로 칭찬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윤서의 세심한 복수이자 또 장차 이향과 홍위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만들기 위한 안배였다는 사실을 신숙주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윤서가 방문할 때마다 매번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의 조선에 분골쇄신 충성을 다하겠다고 매일 매일 새롭게 다짐하였다.
이런 신숙주에게 수양 대군의 제안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매사 신중하게 사정을 살펴 처신의 수를 놓는 성품답게 신숙주는 수양 대군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아낌없이 조언하였다.
“일전에 귀화해 온 유구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함께 데려가면 향후 개척하시고자 하는 무역 업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일본국에서 듣자 하니 일본의 상인들은 유구를 거쳐 그 남쪽으로 더운 나라, 또 대식국에까지 왕래하며 여러 물품을 무역하고 있었습니다. 가신 김에 그쪽 항해 길까지 항차 개척하실 염두에 두고 상세히 살피고 오십시오.”
“···알겠소. 내 그리하리다.”
“유구국의 본 섬 외에 주변 섬들은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 들었습니다. 대군 자가께서 뜻이 있으시면 그를 이용하여 우리 조선의 영향력을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니, 미리 많이 준비해 가시기 바랍니다. 외교는 상대의 사정을 사전에 많이 알면 알수록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 나은 다음에 지금 말한 내용을 상세하게 적어주기 바랍니다. 지도가 있다면 더 좋겠지요. 그럼, 모쪼록 몸조리 잘하시오.”
정중하게 도움말을 아끼지 않으나 확실하게 선을 긋는 신숙주를 보며 이유는 입안이 썼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신숙주는 자신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요새의 괘는 천택리(天澤履)로, 호랑이 꼬리를 밟은 형상이로다.’
혜민국을 나와 시종이 고삐를 잡은 말 등에서 흔들리며, 수양 대군은 자신의 처지가 주역의 예순네 개의 괘 중 건괘와 태괴가 위아래로 겹친 위태로운 형상인 천택리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일찍이 문왕께서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 (履虎尾, 不咥人, 亨)]
이라 하셨고,
또 공자께서는 천택리 괘에 대해 무리하지 말고 행해야 하는 것을 건실하게 밟아나가면 큰 전화위복이 있을 것이라 풀이하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호랑이 꼬리를 밟은 것처럼 위태로운 시기일수록 행해야 하는 바를 묵묵히 이뤄내면 큰 반전이 있을 것이니. 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무가이의 점괘가 자못 용하였구나.’
생각하며 2월 말에 함께 항해할 자들을 떠올렸다.
‘신숙주 일행이 일본에 다녀온 배와 선원을 보강해 쓰면 항해는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고, 사람만 구하면 된다. 누굴 장차의 동지로 영입할 것인가.’
수양 대군은 자신처럼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재주가 크다 소문이 난 이들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
윤서는 박 상궁과 함께 장차 중국에서 활동할 무역 상단을 키우기 위해 노산대와 그 휘하 상인 열두 명, 종자 스무 명을 동지사 사신단의 수행 군관과 시종 명목으로 대거 넣었다.
그중 총명한 종자 몇 명은 노산대와 교류가 있는 북경 상인의 시종으로 남겨두고 올 계획이었다.
“그럼 그 아이들을 통해 당분간 명나라의 비단과 서책, 장신구를 들여와 판다고 치고, 우리도 장차 무엇을 팔아야 하지 않겠느냐?”
박 상궁은 궐에 있을 때는 윤서에게 깍듯하게 존대하였지만 여기 운종가의 상점에 와 돈벌이를 논할 때는 반말로 돌아갔다.
“당분간은 정보 수집이 더 목적이니 급할 것은 없지만, 팔기도 해야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지요.”
윤서는 호조의 창고에서 본 명나라 황실 진상품 중에서 명나라 상류층에게 잘 팔릴만한 물품을 하나씩 짚었다.
“인삼밭은 이제 조성 중이니 몇 년 있어야 하고, 당장 팔 수 있는 걸로는 모시와 나전칠기가 좋겠습니다. 진상품으로 바쳐지는 방물을 보니 이십 승이 넘는 고운 저포는 중국에 가서도 최고급 비단보다 비싸게 팔릴 것입니다. 또 나전칠기도 중국에서 희귀한 것이지요. 이 둘은 장차 일본에서도 아주 반길 것입니다.”
“모시는 충청도 이남에서 재배가 잘 된다. 홍주에 내수사 토지가 많은데, 거기에 마를 심어서 저포를 대량으로 생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네가 세자 저하께 말씀드려서,”
몇 년 후까지를 염두에 두고 중국 쪽과의 무역을 키울 방안을 짜고 있는데, 노산대가 큼큼 기침으로 기척을 하고 밀실로 들어왔다.
노산대는 막 수양 대군 쪽에 심어둔 이들에게서 받은 정보를 윤서와 박 상궁에게 보고했다.
“수양 대군이 대마도와 유구국에 갈 이들을 구하는데, 야망은 있으나 과거에 붙지 못해 빌빌하는 명문가 후손들을 포섭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
윤서는 대번에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수양 대군의 배에 오르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마마님, 저 먼저 궐에 돌아갈게요. 저하를 뵈어야겠어요.”
윤서는 이제 의금부 맞은편으로 다섯 칸이 넘게 규모가 커진 비누 상점을 나와 곧바로 환궁했다.
그리고 후궁 전각을 가진 후로 좀처럼 들르지 않던 비현각으로 빠르게 향했다.
“부인, 마침 잘 왔소.”
전국 지도를 펴놓고 전국 각지에 나갈 대군 동생들에게 빠르게 보고를 받고 그들의 동향을 살필 방안을 고심하고 있던 이향이 반갑게 윤서를 맞이하였다.
“부인이 말한 그 파발 제도란 거 말이오. 이십 리마다 말을 갈아타며 한양으로 달려오게 하려면 어디에 역참을 세워야 할까 점을 찍고 있었소. 부인이 좀 보시오.”
현대의 지도에 익숙한 윤서이기에 남쪽에서 지방 거점 도시가 된 곳을 짚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북쪽은 잘 몰라요.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었다는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북한에서 기억나는 곳이라고는 역사와 지리 시간에 배운 내용들 뿐이다.
평양과 개성, 역사와 지리 시간에 배운 4군 6진 지역, 개마고원, 철광산이 모여 있는 함흥 위쪽 지역과 은이 매장된 광산, 서쪽 끝 의주 정도가 윤서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북쪽은 괜찮소. 우리 태조께서 함흥에서 일어나셔서 거기 본궁도 있고, 동쪽으로는 신의주까지 사행로가 나 있어 이미 길이 많이 닦여 있어서.”
이향은 지도를 함께 봐야 하는 것을 핑계로 윤서를 품에 가두고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즐거운 듯 웃었다.
참 한결같이 다정한 이향이었다.
윤서는 이번 동지사 행에 윤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상단의 상인과 종자도 몇 명 가기로 하였다는 것을 아뢴 후, 이향의 무릎 위에 앉아 친근하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이향은 대번에 윤서가 무엇인가 긴하게 청탁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말씀하시오, 부인.”
윤서가 하는 대개의 일이 자신과 홍위의 안위를 위해서 벌이는 것이기에 이향이 먼저 물었다.
“자제 군관 명목으로든 무엇으로든 이번 북경행에 반드시 보내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으흠. 잠시만, 잠시만 말하지 말거라.”
이향은 윤서의 입을 막고 빠르게 생각을 되짚었다.
이번에 신숙주의 종기 수술, 그리고 호조와 사역원에 홍위를 선보이는 윤서의 행보를 보니 권윤서가 ‘그일’에 연류된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을 수양에게서 떼어내고 있지.’
신숙주에게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어 수양을 본능적으로 꺼리도록 만들고 그 후 지극하게 돌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신숙주가 아주 빼어난 인물이란 사실이었다. 성리학에만 고루하게 얽매이는 경향이 있는 보통의 신하들과 달리 여러 학문을 폭넓게 받아들여 왕실과 백성에 실질적으로 이로운 방안을 찾아내어 그를 실행하고자 하는 능력 있는 신하.
그래서 아바마마도 큰 기대를 품고 아끼는 젊은 인재에 대해 자신은 정작 마음의 거리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이향의 최근 문제였다.
“윤서 너는 전에 전순의를 몸서리칠 정도로 혐오했다. 한데 이제는 수족처럼 그를 부리고, 전순의 또한 널 두려워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섬기더구나. 듣자 하니 신숙주도 너를 통해 나에게 더욱 굳센 충의를 다짐하는 것 같고.”
이향이 진지하게 윤서에게 물었다.
실은 미래를 알게 된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물음이기도 했다.
“너는 그들의 과거를 그토록 벌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그들을 다시 나의 사람으로, 장차 홍위의 사람으로 끌어들일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인가? 신하를 의심하면서도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일을 맡기는 것이 네가 배웠다는 그 심리학적 견지에서 모순 없이 가능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