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홍위와 희아와 사역원 나들이 (1)
종기 수술 시연후 갑작스럽게 변한 대군들 처지에 왕족 전체의 분위기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겉으로는 일단 납작 엎드려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수면 아래서는 모두 전하와 저하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수양 대군의 명례궁에 계양군과 평소 모이는 왈패들이 함께 연일 대책을 논의한다 합니다. 하지만 계양군은 안평 대군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 답답해 하고 있다 합니다."
수양 대군 쪽은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동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키울 가능성도 큰 이 기회를 유리하게 전환시키기 위해 계양군과 함께 연일 대책을 논의 중이라고 조 상궁이 은밀하게 소식을 모아왔다.
윤서는 이향이 가시적으로 바꾼 판에서 빠져 있는 명나라의 연결 고리를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여, 여기 이 호, 홍세저포와 화, 황세저포는 이, 이십 승으로 보통 여염에서 쓰는 시, 십 승보다 훨씬 더 올이 가늘고 고, 곱습니다. 명 황실에 바칠 저포는 이, 이렇게 이십 승에서 시, 십팔 승으로 짠 것이옵니다.”
처음에는 그저 귀하신 분들을 뵙는다는 정도로 긴장했던 호조 서리는 윤서가 저포를 상세하게 살피기 위해 너울을 걷고 맨얼굴을 드러내자 헉 소리를 내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명나라 황제에게 신년 하례를 올리기 위해 자문과 표문, 각종 진상품인 방물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행이 이십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윤서는 황실 진상품의 종류와 품질을 직접 보기 위해 원손 홍위와 평창 군주 희아, 그리고 호위 내관 열 명과 함께 호조를 찾은 참이었다. 며칠 내로 방물을 기름 먹인 종이에 겹겹이 포장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날 방문의 명분은 원손 아기씨의 외교 업무 조기 교육으로, 호조 방문 후에는 사역원으로 가 예비 역관의 수업을 참관하고 수석 통사 김을현도 만날 예정이다.
흰색의 얇은 너울을 통해 볼 때도 놀라웠지만, 맨눈으로 보니 저포라 불리는 세모시의 품질은 현대의 최고급 비단보다도 훨씬 더 섬세했다.
“굉장히 곱네. 비단보다 오히려 더 부드럽고 색도 훨씬 더 은은하고 격조 있습니다. 이 백세저포는 따로 염색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리 고운 옥색이 나는 것인가?”
“예, 그, 그러하옵니다. 표, 표백한 자, 자연색입니다.”
“아! 저 인삼은 모두 산에서 채취한 것이지?”
“예, 모두 시, 시, 십 년근 이상의 것들입니다.”
윤서가 물을수록 더 심하게 말을 더듬자 그런 서리가 가여웠는지, 윤서의 오른손을 꼭 잡고 있던 홍위가 불쑥 대나무로 곱게 짠 바구니에 담긴 잣을 가리켰다.
“잣! 맛있쪄 보인다.”
“예, 워, 원손 아기씨. 조선의 잣은 송자(松子)라고도 불리는데 향이 높고 고소하기로 이름이 아주 높사옵니다.”
홍위가 말하자 사십 중반의 서리가 저절로 입가에 깊은 주름을 패며 웃었다. 귀여운 아이는 어디서나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구나 싶었다.
“포장은 기름을 먹인 종이로 세 겹 이상 한다는 거로군요.”
“예, 예. 호, 호피 같은 경우는 이, 이, 일곱 겹으로 싸기도 하, 합니다.”
“잘 알았네. 답변하느라 고생하였네”
물을 때마다 시선을 어디 둘 줄 모르고 하도 떨어서 더 묻기가 곤란했다.
윤서가 그만 물을 뜻을 보이자, 윤서의 수행 내관인 강인구가 “이만 물러가도 좋네. 수고하였네.” 하고 서리를 물렸다.
창고를 나오자 뜰에 호조 참의를 비롯한 호조 관원들이 주욱 늘어서서 홍위를 맞이하였다.
윤서는 서둘러 너울을 내리고, 희아의 너울도 내려서 얼굴을 가리게 하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홍위가 내관 자선이의 손을 잡고 호조 참의 앞으로 의젓하게 걸어갔다.
“원손 아기씨를 뵈옵니다.”
모두 언 땅 위에 엎드려 절을 올리자 홍위는,
“인너나세요. 땅이 차갑듭니다. 나는 명의 황제 폐하를 안현하는 일을 배우고 있듭니다.”
(일어나세요. 땅이 차갑습니다. 나는 명의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고 의젓하게 말했다.
“예, 아기씨께서 이리 영민하시고 일찍부터 배움에 근면하시니, 우리 조선 사직의 홍복이옵니다.”
“과찬!입니다. 그염 일이 분주하여 이만 신녜!합니다.”
(과찬!입니다. 그럼 일이 분주하여 이만 실례!합니다.)
홍위는 발음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혀에 힘을 잔뜩 주어 말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다음 몸을 돌려 윤서를 향해 왔다.
윤서는 희아와 함께 호조 관원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이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로 하고 홍위와 희아의 손을 잡은 후 호조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 뒤를 인구와 자선 등 평복을 입은 내관 다섯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내들 복장을 한 호위 내관 다섯이 따랐다.
다음으로 찾아가야 할 사역원은 육조 거리를 가로질러 형조 뒤편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왕손과 후궁의 외출은 가마를 타고 경비를 삼엄하게 해야 하지만, 오늘 방문은 홍위의 교육을 명분으로 했기에 모두 평복 차림으로 건춘문을 나와 호조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궐 밖 세상을 구경할 기회가 많지 않은지라 홍위도 희아도 연신 두리번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을 아주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우리 이제 사역원으로 가요.”
윤서가 말하자 홍위가 “쪼아! 쪼아!” 깡총거렸다.
“그럼 저희 넷이 앞에 서고, 둘은 양쪽 옆에 서고, 넷이 또 뒤에 서겠습니다.”
이향이 보낸 호위 내관 천가가 홍위를 향해 고했다.
“응. 우리 손 잡고 가꺼야.”
“셋이 나란히 걷기엔 길이 좁으니 아기씨는 자선이랑 앞장 서세요. 저는 희아 아기씨랑 뒤에 설게요.”
그러나 홍위는 윤서 손을 놓기 싫은 듯 콧등을 찌푸렸지만, 희아가 너울 너머로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입술을 삐쭉거리곤 마지못해 자선이 손을 잡았다.
“근데 아까 그 아저띠는 왜 그여케 말을 데데했대?”
(근데 아까 그 아저씨는 왜 그렇게 말을 데데했대?)
“권 승휘 얼굴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거야.”
“왜, 왜? 눈나? 왜 논나(놀라)?”
“예쁘니까.”
“엣뻐서!”
홍위가 앞장서서 걷다 말고 뒤를 돌아서 고개를 젖히고 윤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엣쁜가?”
“바보야, 너는 맨날 보니까 그렇지.”
“아냐! 홍위는 바보 아냐!”
“그만. 정말 예쁜 분은 우리 희아 자가시구요. 그자가 말을 더듬은 건 제가 궐의 여인이라 그런 것이랍니다. 잘못 바라보았다간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무서워서 그런 것이에요.”
“건 승위는 친저한데, 왜 무더워 하지?”
(권 승휘는 친절한데, 왜 무서워 하지?)
고개를 갸웃거린 홍위는 다시 자선이의 손을 잡고 깡총거리며 앞서갔다. 생기가 넘쳤다.
윤서의 손을 잡고 가는 평창 군주는 시야를 가린 너울이 성가시다는 듯 뒤로 젖혔다.
“저포가 그리 고운 것인 줄 몰랐네요. 그 붉은 저포로 우리 자가 여름용 치마 지어 입으시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윤서가 말하자 평창 군주는 새침하게 입꼬리만 올려서 웃더니 문득 정색하고 말했다.
“나도 혜민국에 가 보고 싶어.”
“혜민국엔 병자가 많아서 아직 어리신 자가한테는 위험해요. 면역 체계가 잘 갖춰진 훗날에 같이 가요.”
“면역 체계? 그게, 뭐야?”
윤서가 우리 몸에는 병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어력이 있고, 그걸 면역 체계라고 하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질병에 노출된 경험이 적어 조심해야 한다고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윤서의 설명을 평창 군주는 유심히 들었다.
세종의 손녀답게 평창 군주도 머리가 비상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사가가 나가 있는 동안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세자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향에게서 배웠던 천자문과 돌아와서 세종께 각종 학문을 배우면서 빠르게 지적 능력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윤서에게는 요새 홍위와 함께 우리 한반도 고대사 중세사와 중국 역사를 함께 배우고 있었다.
“나도 북경에 가 보고 싶어. 남경에도 가 보고 싶고. 당나라 수도였다는 장안에도 가 보고 싶어.”
아직 고려의 기풍이 남아 있어 여성의 외출이 그닥 어렵지 않은 조선 초였지만, 중국에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혹시.
“이담에 가실 수 있게 되면 정말 좋겠는데요.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가시게 되면 저도 같이 가요.”
“홍위도, 아바마마도 같이 가면 좋겠다. 권 승휘는, 어디 가고 싶어?”
“전 홍주에 가 보고 싶어요.”
“홍주?”
“예, 홍주. 세자빈 마노라도 거기서 태어나셨다잖아요.”
홍주는 당진과 홍성의 옛 지명이었다. 윤서의 고향 집이 있던 홍성, 그리고 홍성과 지척인 합덕에 세자빈 권씨의 사저가 있다고 한다.
윤서는 언제고 한번 홍성에 가 보고 싶었다.
현대의 자취는 하나도 찾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산새는 그대로일 것이니, 그곳에 가면 때때로 쓸쓸한 바람이 이는 마음 한 조각이 채워질 것만 같았다.
너울 뒤로도 쓸쓸한 빛이 새어났는지 희아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나, 어마마마 생각하며 지은 노래가 있는데, 이따가 거문고로 들려줄까?”
“좋아요. 같이 불러요. 아기씨랑, 세자 저하랑.”
이렇게 홍위를 앞세우고 희아의 손을 잡고 오백 년 전의 육조 거리를 가로지르니 문득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아우, 추운데요. 아기씨, 잠깐만.”
윤서는 희아의 담비 털 외투에 달린 모자를 너울 위로 씌워주고 끈으로 단단히 여며 주었다.
외투는 윤서가 서양의 망토 모양으로 그려 상의원에 명해 만든 겨울용 외출복으로, 안에 담비 털이나 여우 털을 달아 아주 따스했다.
벙벙한 한복 위에 입기에 편하고 딱 떨어지는 모양새가 멋스러워서, 요새 궐의 여인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하와 중전마마도 하나씩 지어 입으신 참이었다
이향 것으로는 윤서가 호피를 안감으로 만드는 중이고, 윤서는 이미 붉은 여우 털로 하나 지어 입었다.
윤서는 홍위에게도 모자를 씌워주고 마침 육조 거리라 넓어서 홍위 손까지 잡고 종종걸음으로 형조 건물을 향해 나갔다.
“굉장히 귀하신 분들이신가?”
"뉘집 마님과 아기씨들인지 참으로 예사롭지 않으시네."
지나는 이들이 옷차림새도 예사롭지 않고 건장한 시종이 열 명이나 붙은 윤서 일행을 힐금거렸다.
“원손 아기씨, 군주 자가, 권 승휘 마마님을 뵈옵니다.”
사역원 건물에 다다랐을 때 이미 통보를 받은 수석 통사 김을현이 다른 몇몇 관원들과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약식 방문이라고는 하나 장차 세손이 되고 세자가 되실 원손이 사역원을 찾아주었다는 것에 한학(중국어), 몽학(몽골어), 왜학(일본어와 유구어), 여진학(여진어) 등을 가르치는 주부와 교수, 봉사 등 관원들 모두 굉장히 고무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태종 때부터 대명 외교 실무를 책임져온 수석 통사 김을현은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윤서가 따로 다른 용무를 가지고 온다는 것을 빤히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홍위는 사역원 건물 안에 들어서자 윤서의 손을 놓고, 자선이 손도 잡지 않고 외투 모자도 벗은 채 아주 의젓하게 주부와 교수의 안내를 받아 한학 강의실로 향했다.
그래 봤자 아직 사등신도 안 되는 짧은 다리에 외투가 땅에 끌릴 지경으로 길어 꼭 눈사람이 보자기 둘러싸고 걸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유, 귀여워라."
윤서와 희아는 너울 속에서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사역원 관원들은 아직 허리도 닿지 않을 정도로 어린 원손이 이리 위엄 있게 홀로 걷는 것에 감동을 받았는지 머리를 허리까지 연신 조아리며 강의실로 앞서 안내했다.
“환잉광린 欢迎光临!”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홍위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한학 원생들이 모두 엎드리며 큰 소리로 홍위를 환영했다.
“인너나세요. 추운데 고생!이 많뜹니다.”
(일어나세요. 추운데 고생!이 많습니다.)
홍위가 의젓하게 말하자 와아 하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똑똑히 보세요! 불운하단 소문 속 원손 아기씨가 과연 어떤 분인지.'
윤서는 너울 너머로 수석 통사 김을현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