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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70화 (70/255)

제 70화. 세종은 잘난 아들들에게

“태종께서 내게 너는 왕이 될 일이 없으니 다양한 학문과 잡학을 마음껏 익히거라 하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렇게 다양한 분야를 익힌 덕에 오늘날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지. 그런 연유로 종학을 설립하여 너희에게도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술이 한두 잔씩 돌자 세종께서 다섯 아들을 하나씩 응시하며 말씀하셨다.

이향을 제외한 대군들은 말없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늘 자상하게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시는 부왕께서 세자와 세자가 아닌 대군의 처지를 나눠 말씀하시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오늘 유가 이뤄낸 혜민국의 종기 치료법이다. 둘째가 그간 의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리 짧은 시간에 전순의와 여러 의원을 이끌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게야. 그래서 내 생각한 바가 있다.”

세종은 권윤서의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오늘 구상한 바는 실은 권윤서와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평안히 살 수 있는 것을 굳이 왜 수고로움을 자처하느냐?”

의녀 중 빼어난 이를 선발해 의원으로 키워내고 여인을 위한 전문 치료소를 따로 개설해 운영하고 싶다는 권윤서에게 세종이 하문하였을 때였다.

“전하께서 사기를 읽고 군주의 심리를 분석하란 어명을 내리셔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사기는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사마천의 바람과 원망이 스며 있는 저작입니다.”

사마천이 한나라 무제에게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쓴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하기에 사기는 제후의 심리를 분석하기에 그닥 좋은 책은 아닙니다. 하오나 소첩이 배운 귀중한 가르침 있습니다.”

“무엇이냐?”

물으며 세종은 권가를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다.

승휘로 책봉된 후 권가는 이제 며느리도 되었으니 죽이진 않으리라 생각하는지 자신을 덜 무서워하고, 때로는 제법 친근하게 굴기도 했다.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왕실의 일원으로 여성 의원을 기르고 치료원을 세워 백성을 아끼시는 전하와 저하의 치세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습니다.”

작은 보탬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권가는 실은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지난 9월, 세자와 함께 한강에 배를 이어 붙여 다리를 만드는 걸 시찰하러 나갔을 때였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배 밑을 서로 얽어매고 배 위로 상판을 올리는 작업을 하는 수륙군 모두 권가가 만든 영법을 배워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낱 정4품 후궁에 불과한 권가도 백성을 위해 이리 노력을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그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재주도 많은 아들들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게다가 한강진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군기시에서 세자가 아직 미완성인 괘종시계란 것을 보여주었다.

"아, 아니 이것은!"

시계란 것은 여러 과학 이론에 밝은 세종에게도 벼락에 맞은 듯한 압도적인 경이로 다가왔다.

게다가 저 뾰족 바퀴를 이용한 동력 장치가 제대로 완성만 된다면!

그러면 응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해 보였다.

그런데 세자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한데 아바마마, 톱니라고도 부르는 뾰족 바퀴의 쇠가 물러서 몇 번 맞물려 돌아가면 뾰쪽한 부분이 자꾸 부러집니다. 야장들에게 물으니 더 단단한 쇠를 얻어내려면 훨씬 더 높은 온도로 쇳물을 만들어 찍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질 좋은 석탄 광산을 개발해 한양까지 운반해 와야 하는데, 그 일을 동생들에게 맡기면 좋겠습니다.”

석탄이 땅 밑에 든 검은 돌멩이로 오랫동안 태울 수 있어 땔감을 구하는 어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과, 엄자치를 비롯한 여러 내관을 보내 이미 매장된 곳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자에게 보고 받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쓰임새가 많으나 또한 잘못하면 중독 현상으로 많은 인명 사고를 낼 수 있는 위험 물질이기도 하기에, 왕실의 유력자가 책임을 지고 관리하고 판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잠잘 시간도 충분치 않을 터인데 저리 신기한 기물을 만드는 세자와, 또 그런 세자의 배우자답게 여러 치료법을 발전시키고, 여성과 빈민을 위한 의료원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권가를 보니,

세종은 왕의 적자인 신분 덕에 많은 편의를 누리며 풍류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잘난 대군들의 행태를 곰곰이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혜민국에서 큰 성과를 만들어 낸 수양을 기회로 삼아 그간 구상해 온 안을 구체화 하기로 드디어 마음의 결단을 내리신 것이었다.

“너희는 많이 배웠으면서도 왕의 아들이란 이유로 조정의 일에 참여할 수 없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것이 아비로서 늘 안타깝고 미안했다.”

“아바마마, 소자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큰형님 저하께서 저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영민하시고 성군의 자질을 갖추셨는데, 저희가 무슨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서예와 그림, 시문에 빼어나 명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안평 대군이 서둘러 고했다. 그로서는 어여쁜 궁녀들에게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고 빼어난 사대부들과 예술적인 교류를 즐기는 나날이 더없이 좋았기 때문에 수양 형님처럼 더러운 병자를 상대하는 일도 다른 수고로운 일도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안평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시고 말씀을 이으셨다.

“나를 닮아 영민한 너희 모두에게 왕실의 일원으로 우리 조선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먼저 수양!”

“예, 아바마마.”

혜민국 정도가 최고인데.

질병 앞에 누구나 간절한 공포를 느끼니 빼어난 의술을 발판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에 혜민국 만한 곳이 없는데 대체 무슨 다른 기회를 주신다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수양 대군의 머릿속에 부처님처럼 미소를 짓고 있던 권가의 얼굴이 하필 떠올랐다.

“수양 너는 한남군과 함께 대마도에 가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체결한 조약을 대마 도주가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 밑의 유구국에 가 활을 만드는 데 쓸 우각과 설탕 등을 무역해 오너라.”

“아, 아바마마!”

대마도는 그렇다 쳐도 유구국이라니.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그 험한 뱃길을 어찌!

당황한 수양 대군이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이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장 출항하라는 말씀이 아니시다, 유야. 거친 바다를 항해할 커다란 배와, 연안에 상륙할 때 쓸 작은 배도 함께 갖춰야 하고, 유구국에 다녀온 적 있는 길잡이도 여럿 섭외해야지. 배를 짓는 것부터 무역해 오는 것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유 네가 모두 책임을 지고 일을 추진하여 내년 중으로 출항할 수 있으면 된다. 일찍이 고려 초에는 대식국의 상인들까지 벽란도에 드나들었지 않았느냐. 유 네가 개척하는 길이 장차 우리 조선의 무역로가 될 것이니, 잘 부탁한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더니, 무턱대고 험한 뱃길을 명하시는 전하보다 상세한 조언을 곁들이는 세자 형님이 더 원망스러웠다.

수양 대군은 ‘어마마마, 말려주십시오.’ 하는 눈으로 중전마마를 보았다.

그러자 중전께서는

“아들 중 유 네가 제일 담대하지. 유구국에 설탕이 있다고 권 승휘가 그러더구나. 아들, 잘 부탁한다.”

하고 더 환하게 웃으셨다.

수양 대군은 하는 수 없이 명을 받잡았다.

“···예, 소자 우각과 설탕을 구해올 방도를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대군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안평은 계양군과 함께 함길도의 경흥에 가 검은 돌이라 불리는 석탄 광산을 개발하고, 한양으로 운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거라. 중간에 산맥이 가로막혀 육로 운송이 어렵다면 바다를 통해 인천으로 운반해 올 수 있는 해양 운송 방안도 찾아내야 한다. 일전에 동궁의 엄자치가 다녀와 석탄을 확인했으니 도움을 받거라.”

“아, 아바마마. 경흥은 본시 여진족의 땅으로 미개하고 척박한데 어찌 소자더러!”

“어허! 그동안 왕의 아들인 덕에 풍류를 즐기며 호탕하게 살지 않았느냐? 그곳의 야인들도 이제 조선의 백성이 되었으니 네가 키워낸 어여쁜 가기와 무동도 데리고 가 문화를 전파하면 될 것이야.”

“······.”

안평 대군은 거역할 수 없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세종께서는 개의치 않고 또 명을 내리셨다.

“임영은 강원도 삼척에 가 마찬가지로 석탄 광산을 개발해 한양으로 운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거라. 당장 육상 운반이 어려울 것이니 안정적인 수운 운송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삼척이라니요? 그 촌구석을!”

임영 대군도 안평 대군처럼 불퉁하니 화부터 냈다.

그러자 세종께서 엄한 얼굴로 호통치셨다.

“어허! 삼척에서는 절대로 물의를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야. 한 번만 더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정말로 폐서인해서 제주도에 쳐박을 줄 알거라.”

“······.”

“광평은 여러 학문에 두루 밝으나 몸이 약하니 혜민국에서 권 승휘와 함께 두창과 다른 질병의 치료법을 개발하거라. 전순의가 무슨 의서에서인가 두창 예방법을 본 것도 같다고 하더구나.”

“예, 아바마마.”

한양에 그대로 머물게 된 광평 대군은 공손하게 어명을 받았고,

“금성은 아직 어리나 여러 과학 기물에 능하니 군기감에서 세자가 구상하는 여러 기물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거라.”

“예, 아바마마. 형님, 잘 이끌어주십시오.”

본래도 세자와 함께 여러 실험을 즐겨하는 금성 대군도 대만족이었다.

세종께서는 이 임무가 장차 자신에게 어떤 기회를 줄지 벌써 따져보기 시작한 수양과,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안평, 임영 대군과 아주 만족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광평 대군과 금성 대군을 보며 심중에 담고 있던 말씀을 털어놓았다.

“왕가에 자손이 흥하는 것은 복이면서 동시에 큰 화가 될 수 있다는 걸 너희도 잘 알 것이다. 이 아비는 내내 왕실의 불행이 더는 없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이러한 아비의 뜻을 세자 또한 지극한 효성으로 이어받아 이제까지 너희에게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은 것은 너희들이 잘 알 것이다.”

“······.”

“······.”

“그러니 너희들도 이제 노력으로 증명하거라. 너희가 다른 사심 없이 몸을 아끼지 않고 백성을 위해 솔선수범한다는 걸, 이 아비와 어미에게, 형에게, 그리고 만백성에게 보여주거라!”

“······.”

“······.”

“대답!”

“예, 아바마마.”

“명 받잡습니다.”

“형님을 도와 반드시 빼어난 성과를 내겠습니다.”

결국 세종의 잘난 아들들은 이제까지 대군으로서 누리던 평안한 삶을 벗고 고되고 위험하면서 동시에 대놓고 제 세력을 키울 수도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대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아들들을 모두 물린 후 중궁전에는 이제 세종과 소헌 왕후만 남았다.

“서운하지 않으시오?”

세종의 물음에 소헌 왕후는 고개를 저었다.

“군주가 의심을 품게 되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신첩보다 잘 아는 사람이 조선 천지에 있겠습니까? 지금도 가끔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어찌 처신하셨으면 아바마마께서 아버님을 살려주셨을까 하고요.”

“중전······.”

“없었습니다. 우리 심씨 가문의 명성과 재산이 왕실을 위협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살아날 방도가 없었다는 걸 알 정도로 저도 왕실 여인이 다 되었지요. 이번 일은 향이가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소.”

“고지식할 정도로 정이 깊은 향이도 대리청정을 맡자마자 동생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죽고 없어지면 그땐 정말······.”

“향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오.”

“···향이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다른 아이들이 그럴 수 있지요. 권력이란 것은 불나방처럼 사람들을 홀리는 요물이 아닙니까.”

“······.”

“그러니 잘하셨어요. 잘하셨습니다, 전하. 지금 납작 엎드려 고난을 자처하지 않으면 향후 누구 피가 강물 되어 흐를지 모를 일이니까요.”

“······.”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세종께서는 중전 몰래 한숨을 쉬셨다.

이래도 저래도 잘난 아들들은 근심의 씨앗이었다.

그렇지만 홍위처럼 귀여운 손주는!

“우리 윤서는 아직 반가운 소식이 없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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