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67화 (67/255)

제 67화. 금아 현주의 중독 (2)

“권 승휘, 이 무슨 행패냐 묻지 않았는가?”

정 승휘가 윤서를 압박해 들었다.

“어머나, 마구 뒤졌나봐요. 홍 상궁 마마님, 가여워서 어쩌나.”

양 사칙이 입으로만 탄식했다.

홍 상궁의 이종 조카인 문 승휘는 울먹거리며 자신의 상궁, 홍 상궁의 나인들과 함께 조 상궁이 뒤져본 물건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윤서를 노려보았다

“흥! 왜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거지? 아까처럼 해 봐. 그 투기하는 입으로 한번 말 좀 해보라고!”

지원군을 얻은 홍 상궁이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서 윤서를 압박했다.

“권 승휘! 정말로 투기 때문에 이 사달을 낸 것인가?”

“아닙니다. 보여드릴 것이 있으니, 다른 분들도 잘 보고, 잘 들으세요.”

윤서는 홍 상궁의 거처 안쪽 벽에 놓인 반닫이 장으로 향했다.

허리께 오는 반닫이 장 위에는 아이들 주먹만한 작은 도자기 합이 사오십 개, 미인이 머리를 빗거나 눈썹을 칠하는 그림이 음각으로 새겨진 은제 화장품용 항아리 열댓 개가 빼곡하게 올려져 있었다.

“그, 그거 분이랑 연지라고.”

홍 상궁이 소리쳤다.

“······.”

윤서는 대꾸 없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숨을 참으며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다양한 종류의 백분 가루, 그리고 붉은 계열의 볼 연지와 입술 연지, 사향 가루 등이 들어 있었다. 몇몇 합 안에는 물에 타서 바르거나 마시는 가루 종류도 있었다.

윤서는 고개를 돌려 홍 상궁을 다시 살폈다.

유난히 희고 피부가 고운 홍 상궁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확인하듯 물었다.

“이거, 금아 아기씨 가지기 전에도, 가진 동안에도, 그리고 낳고 나서도 계속 바르고 먹은 것인가?”

“그게, 왜? 너 같은 거렁뱅이는 구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아기씨에게도 발라드렸겠지.”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 화장품도 그쪽에서 선물 받은 것인가?”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어렵게, 명나라 사행길 다녀오는 상인들한테 천금을 주고 구한 귀한 거라고.”

“다른 분들도 이런 종류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인치고 명나라에서 온 백분과 연지 없는 이가 있다던가? 권 승휘는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해명하시게.”

정 승휘가 윤서를 다그쳤다.

“정말로 투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면, 동궁 내궁의 수장으로서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없네.”

“그렇죠. 그냥 넘어가면 정말로 안 됩니다!”

윤서는 동의했다.

“금아 아기씨의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이 다 이 화장품에 든 성분들 때문입니다. 이 화장품에는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수은과 납이 대량으로 들어 있어요.”

“무슨, 헛소리를!”

“가져다 검사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수은과 납이 들어간 화장품은 아이의 신체, 두뇌  발달 모두에 큰 해악을 끼칩니다. 어른에게도 당장은 얼굴을 뽀얗고 예쁘게 만들어주어도 나중에 다 피부 썩습니다!”

“!”

“!”

“양 사칙도 바르셨다면, 선아 아기씨가 괜찮은 건 이런 분을 덜 발랐기 때문입니다.”

윤서가 말하자 홍 상궁이 이죽거렸다.

“거지여서 살 능력이 안 돼서 그런 거지!”

“홍 상궁 마마님!”

“뭐! 천한 것 주제에.”

“똑같이 상궁인데 천한 거 운운 좀 그만하세요!”

홍 상궁과 양 사칙이 말다툼을 시작했다.

정 승휘가 손뼉을 짝 치며 화를 냈다.

“그만, 그만들 하게. 권 승휘. 자네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는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없어요.”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치밀하게 벌써 약재를 치우게 한 것이 정말로 유감이었다. 이 연지와 백분 가루만으로 금아가 병약하게 태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약제 때문에 문제가 있게 태어났고,

거기에 중금속 덩어리인 화장품을 대책 없이 많이 바르고 심지어 아이에게까지 발라줘 더 심한 중독에 이르게 한 홍 상궁의 무지도 정말로 유감이었다.

입궐 초에는 청초하고 말수 적은 미인이었다던 홍 상궁이 저리 천박하게 말하게 된 것도, 금아의 두뇌발달이 지연된 것도 신경독인 수은의 영향일 것이다.

“홍 상궁 마마님. 부탁합니다. 이거 아기씨께 절대, 절대로 발라주지 마세요. 절대로! 아기씨 죽게하고 싶지 않으면 바르시면  안됩니다!”

너무 유감이어서 저도 모르게 나인 시절 말투로 진지하게 당부하자 양 사칙을 죽일 듯 노려보던 홍 상궁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윤서를 한참 노려보더니 갑자기 무엇인가를 깨달은 양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정말이야?”

홍 상궁의 목소리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저 분 때문에, 우리 금아가······.”

“정말이에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게 작작 좀 바르,”

“닥치세요, 양 사칙! 같이 자식 키우는 사람이!”

“······.”

“······.”

윤서의 호통에 갑자기 온 거처가 다 조용해졌다.

“거기, 이 상궁인가?”

윤서가 홍 상궁을 오래 모시고 있는 이 상궁을 불렀다.

“여기 분과 연지, 그릇째로 다 기름먹인 종이에 여러 겹 꽁꽁 싸서 사람들 안 다니고 짐승도 안 다니는 곳에 깊게 파묻게 하게. 태워서도 안 되고, 쏟아 버려서도 안 되고, 물에 흘려보내서도 안 되고. 이대로, 용기째로 깊게 파묻어야 해. 그리고 정 승휘님.”

“말하게.”

“이런 화장품 가지고 있는 궁인들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명을 내려주세요.”

말을 하면서도 그러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뭔들 못 하겠는가. 효과는 바로 나타나고 부작용은 훗날에야 나타나는데.

과학 지식이 없는 시대의 무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금아 아기씨는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윤서가 말하고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릴 때였다.

“이대로 그냥 가는가?”

정 승휘가 물었다.

“?”

“금아 아기씨를 해쳤으니 홍 상궁에게 책임을 물어야지.”

“백분과 연지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라, 아이에게 발라주지 말라는 궐내 규범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네만.”

“그럼 어떻게 물으시려고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을요.”

윤서는 어룽어룽 눈물을 흘리고 있는 홍 상궁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홍 상궁 따위는 못마땅했고, 언젠가 기필코 윤씨가 건네서 지속적으로 먹었다는 약재의 성분을 알아내고야 말 작정이지만.

이번 건은 무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벌을 받고 있었다.

윤서와 눈을 마주친 홍 상궁이 울먹이며 다시 물었다.

“···정, 정말이야?”

“저는 아이들 문제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윤서는 소리도 못 내고 끅끅거리는 홍 상궁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거처로 돌아왔다.

나중에 정 승휘의 보고를 받은 중전마마께서 윤서를 불러 상세히 물으신 후 납과 수은 성분이 들어간 명나라 산 백분과 연지의 사용을 금하셨다.

엉뚱하게도 그 여파는 박 상궁와 윤서가 함께 운영하는 운종가의 치약, 비누 상가에 미쳤다. 동백 기름을 베이스로 하는 고급 비누와 새로 만들어 판매를 시작한 밀랍 자운유 크림이 불티나게 팔려 박 상궁 입이 귀에 걸쳤다.

*******

화려한 연회가 펼쳐지는 추석도 지나고, 9월 내내 혜민국에서 각 지방에서 뽑혀 올라온 의녀 후보생들을 교육시키다 보니 본격적으로 추워지는 10월이 왔다.

추석 무렵부터 세종께서는 곧 정음을 반포하실 준비로 무척 바쁘셔서 윤서를 거의 부르지 않으셨다.

“아바마마께서 윤서 너와 또 너에게 배운 희아와 홍위가 정음으로 글을 짓는 것을 보고 지금 당장 반포해도 될 것이라 확신은 하신다만,”

늦게까지 비현각에서 일하다 찬바람을 묻히고 돌아온 이향이 차가운 손을 윤서의 배에 넣고 덥히며 말했다.

“사대부들이 반대할까, 또 명나라에서 문제 삼을까 근심하신다.”

“최만리!”

“응? 네가 부제학 최만리를 어떻게 아느냐? 그분은 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윤서는 흥흥 소리 내어 웃었다.

“그분은 전하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걸로 역사서에 박제되어서 대대손손 욕을 먹으실 운명이에요. 어지간하면 스승님께 그러지 마시라고, 대세는 전하의 새 문자라고 좀 전해주세요.”

으하하하. 이향이 윤서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이래서 난 부인이 좋소. 무얼 할 때 후대에 욕먹을 걱정이 하나도 없지 않소.”

유쾌하게 웃었다.

“그분이 무어라고 반대할지도 알아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에 어긋나고 또 문자를 가진 것은 오랑캐밖에 없다고 할 거에요. 아, 그래서 말인데요, 저하.”

윤서는 조 상궁이 은밀하게 모아온 소식을 떠올렸다.

윤씨와 그 세력이 은밀하게, 치밀하게 놓고 있는 수가 놀라웠다.

역이용하면 조선 지배층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저하, 정세 판단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기민한 자들 몇을 명나라에 상주하게 하는 건 어떤가요? 지금 최만리께서 주장하시는 근거는 죄다 틀렸어요. 명나라가 우리 문자를 가지고 시비를 걸 여력이 지금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 몇 년간 명나라 정세가 급변할 거라 전에 말씀 드렸지요? 우리도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윤서의 말에 이향이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수양을 명나라에 보내버리고 싶은 것이오? 혜민국에서 치워버리게?”

“아닙니다. 수양 대군은 명나라에 가서는 안 돼요.”

윤서는 조 상궁에게 들은 소식을 간략하게 정리해 전했다.

“으흠.”

이향은 한참 곰곰이 생각하더니, 훅 촛불을 불어 껐다.

“일단 잡시다. 자요. 내일 혜민국에서 전순의가 주관하는 종기 수술 시연이 있지 않소? 부인이 나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거니, 이제 그만 자고.”

“···저하?”

"으응?"

“겨울밤이 너무 길어요. 저하를 위해 종기, 수술법까지 만들어낸 부인이니, 상을, 주세요.”

"아까부터, 응, 주고 싶었는데, 부인이 너무 밝힌다고, 혼낼까봐."

이향은 몹시 기꺼이 뜨겁게 응해왔다.

****

다음날 혜민국에서는 전순의가 종기의 환부를 칼로 째서 농의 뿌리를 제거하는 시연이 열렸다.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 세자 저하와 대군들, 조정의 주요 신료들이 모두 참관하는 큰 행사였다.

이 행사를 위해 수양 대군은 그간 종기 치료 전문 의원을 양성하고, 혜민국 전체를 깨끗하게 단장한 후 필요한 장비를 들여오는 등의 일을 총지휘했다.

윤서는 동궁전의 유 승휘, 권 승휘, 장 사칙, 양 사칙과 함께 의원과 의녀의 동선, 귀빈의 참관 좌석을 배치하고 참관 후 접대할 다과를 준비했다.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공은 다 수양 대군이 가지시는 것인가요?”

약방 기생이라고 천대받는 관비가 아니라 전문적인 의료 소양을 갖춘 의녀를 키워내기 위해 윤서와 함께 가장 많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 유 승휘가 불만을 토로했다.

윤서는 유 승휘와 함께 전의감의 의학 교수를 설득하여 의녀 후보생 백오십 명 중 스무 명을 따로 뽑아 의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 배출될 여성 의원은 장차 취재 시험에는 응시할 수 없지만 사내 의원들에게 몸을 보이기 어려운 여성들의 질병, 특히 출산과 부인과 질병 등을 전담하여 치료할 예정이었다.

그것이 전문 여성 의료 인력의 시작이 될 것이고, 그 중 몇과 의녀 중 똑똑하고 야심 많은 이들은 윤서의 사람이 되어 여러 일을 함께 도모할 것이다.

“수양 대군이 말을 보태준 덕에 전의감에서 의녀의 의원 교육도 가능해진 것이니 공이 없진 않으시지요."

"하지만 그 전에 전하께 계속 애 낳다 죽는 여인들이 줄지 않아도 좋으냐고, 여자는 아파도 그냥 죽어야 하냐고 눈 동그랗게 뜨고 고하셨잖아요."

“하긴 칼로 종기 째는 거 무섭다는 의원들 윽박질러가며 수술도 하게 하고.”

전순의가 아무리 종기 부위를 째서 뿌리를 제거하는 시범을 성공적으로 보여도 직접 칼을 들길 꺼리는 의원이 많았다.

그럴 때 윤서가 매섭게 노려보며,

“자네, 사내가 되어 종기를 째고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의원이 되지는 못할망정!”

하고 호통을 치면 다들 마지못해 칼을 들었다.

하지만 세종의 아들답게 수양 대군의 일 처리는 깔끔하고 능숙했다.

윤서와도 곧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윤서가 따로 수양 대군의 심리 관찰 일지를 작성하고 있을 정도로.

그리고 표면적으로 수양 대군은 더 이상 노골적으로 야망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께서 다시 경계를 푸실 만큼.

“조만간 힘의 추가 우리 쪽으로 완전히 오긴 해야지요.”

그래야 혜민국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윤서가 수술 시연이 열릴 대치료실 쪽을 쳐다보며 속삭일 때였다.

“쉿! 두 분 승휘 형님들! 다들 오실 시간이 되었어요.”

권 승휘가 둘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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