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65화 (65/255)

제 65화. 수영 강습을 하였더니 (2)

이향이 대단한 점은 윤서가 대충 말한 것을 집요하게 파헤쳐 실현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석탄을 사용한 것 같더라는 윤서의 말에 이향은 원나라가 망할 때 조선으로 이주해 온 이들을 수소문하게 해서 정말로 난방과 도자기 굽기, 요리 등에 석탄을 사용해 온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밤에 처소에 와 윤서를 안고 말하길 (날이 더운데도 이향은 윤서를 죽부인처럼 안고 자길 좋아했다),

“고려사 편찬을 맡았던 권제를 불러 물었더니 명종 때 땅이 오래도록 탄 기록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또 삼국사기에도 검은 땅이 오랫동안 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도 석탄인가 싶고. 그래서 윤서 네가 말한 곳에 일단 내관들을 보내 조사하게 하려 한다. 그 아오지란 곳에는 아바마마의 어명을 받아 함길도에 여러 번 다녀온 엄 상전이 금성 대군과 함께 갈 것이다. 간 김에 단천에도 가서 은광도 조사할 것이고.”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의 집안이 단천 은광을 개발 독점권을 하사받아 부를 누렸다는 신문 기사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말했더니, 이향은 가장 신뢰할만한 내관 엄자치와 금성 대군을······!

엄자치는 그렇다고 쳐도, 금성 대군을?

“!”

윤서는 놀라 몸을 떼어내고 이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향의 눈동자가 검게 빛을 내었다.

“제가 언제, 말했어요?”

금성 대군과 엄자치가 홍위를 지키려다 죽었다는 말을 했었는지 묻자, 이향은 다시 윤서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부인. 말은 안 했는데 부인이 엄 상전을 무척 신뢰하고 내 동생을 보는 눈빛이 유난히 부드럽기에 내 짐작을 하였소.”

“···저하, 저하께서 좀 변하신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이향이 변했다.

역사에서 훗날 있었던 역모에 가담했거나 동조한 이들의 이름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 했으면서도 이따금 신하나 종친을 거론하며 윤서의 표정을 유심히 표정을 살피곤 했다.

또 전에는 성인군자처럼 두루두루 관대한 세자 저하였다면, 요새는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고 일을 제대로 못 해내는 자들에게 신랄한 비난을 퍼붓는 엄격한 세자 저하가 되었다.

윤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어서, 며칠 전 중전마마께서 중궁전으로 윤서를 따로 부르셨다.

“향이가 요새 신하들에게 말만 번드레하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제 실천을 해 성과를 내라고 자주 호통을 친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까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세자였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물으시는 표정이 ‘네가 어떻게 하길래 우리 향이가 그리 변하니.’ 하는 윤서에 대한 우려 반, ‘그간 너무 유하게 절제했지. 이제 대리청정도 시작했으니 위엄 있게 신하들을 이끄는 것도 좋지.’ 하는 아들에 대한 기대 반이셨다.

“대리청정을 맡으신 지 얼마 안 되어서 부러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

하고 얼버무렸지만, 짐작되는 바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이 밤, 윤서는 직설적으로 이향에게 물었다.

“저하, 전과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요?”

윤서가 묻자 이향은 흠칫 몸을 굳혔다.

벌써 삼경이 지난 시간, 어디선가 부엉이가 호로롱 호로롱 한참을 울고 나서야 이향이 어렵게 입을 뗐다.

“네가 말한 그 비극이 정말로 역사서에 기록된 일이라고 믿자, 사람들이 위선 덩어리로 보여 역겨울 때가 있다.”

“아, 저하!”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자신과 홍위의 비극적인 운명을 듣고도 굳건하게 감정의 동요를 억눌러오던 이향이 주변의 사람들을 의혹의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의심이 많으면 조정과 왕실에 피바람이 분다.

그렇지만 또 권력자가 순진하게 선의만 믿으면 간악한 자들에게 눈과 귀가 가려져 역사의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너무 믿어서도 너무 의심해서도 아니 되는 자리. 번쩍번쩍 찬란히 빛나는 왕관일수록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무거웠다.

“저하, 역정이 나면 역정을 내셔도 돼요. 이제까지 지나치게 선량하게, 완벽한 세자로 애쓰며 살아서 역사 속에서 그렇게 일찍 죽은 거에요. 홍위 좀 봐요, 저하. 요새 얼마나 떼를 쓰는 데요. 저하는 어릴 적에 그렇게 떼 써 본적, 없죠?”

“없다. 난 언제나 완벽한 장남이고 세자였어.”

“그러니까요. 인생에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제까지 못 떤 지랄들 요새 떤다고 생각하세요, 다만, 저하. 뇌에는 또 가소성이란 성질이 있지요.”

윤서는 우리 두뇌가 죽을 때까지 학습을 지속하고 변화한다는 현대 과학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 가소성에 따르면 마구 의심을 하기 시작하거나 화를 내기 시작하면 점점 더 그 성향이 강화된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 점을 의식하고 계시면 곧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실 거예요.”

윤서가 등을 토닥이며 속삭이자 한껏 굳어 있던 이향의 몸이 조금 풀렸다.

“윤서 네가 여기를 여염집처럼 꾸미지 않았느냐? 복잡한 의례 따위가 없이, 비가 오면 아이들하고 함께 그 부침개라는 것도 해 먹고.”

엊그제 오후, 원래는 홍위와 희아를 데리고 계곡에 만든 얕은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가야 하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그래서 중비에게 말해 밀가루 반죽에 호박을 썰어 넣고 돼지비계 기름에 지글지글 부침개를 해서 대청마루에서 함께 뒹굴거리며,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변에도 몇 장 나눠주고 비현각에서 일하고 있는 이향에게도 서너 장 보냈더니, 이향은 내관들에게 나눠주고 윤서의 거처로 넘어왔다.

마침 윤서는 안데르센 동화 <인어 공주>를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주고 있었다.

홍위가 이향을 보고 발딱 일어나 외쳤다.

“아바마마, 잉어 공주가 목또리를 잃고 다이가 생겼떠요!”

(아바마마, 인어 공주가 목소리를 잃고 다리가 생겼어요!)

“‘잉어 공주’가 아니라 인, 어, 공, 주. '목또리'가 아니라 목, 소, 리. ‘다이’가 아니라 다, 리. 따라 해 봐. 인! 어! 목! 소! 리! 다! 리!”

“눈나! 나는 똑!똑!해저 발!름! 갠찮아!”

(누나, 나는 똑똑해서 발음 괜찮아!)

“흥, 덜 똑똑하고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저번에도 여달이가 흉내 냈잖아.”

한동안 서먹하게 남처럼 굴던 평창 군주와 홍위는 요새 곧잘 투닥거렸다.

저러다가도 누가 홍위 발음을 놀리면 평창 군주는 “무엄하구나! 천자문도 완벽하게 다 외우는 천재 원손 각하께!” 하고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다투는 두 남매를 이향이 양쪽에 하나씩 안고 함께 인어 공주 이야기를 마저 들었었는데.

“그런 안온한 일상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너무 좋으면서도, 내 품에서 공기 방울이 된 인어공주가 불쌍하다고 통곡하던 어린 홍위가 얼마나 사무쳤는지.”

이향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처음 조선에 와 홍위를 볼 때마다 윤서가 느끼던 그 사무치던 연민을 이제 아버지인 이향이 뒤늦게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하께서 오래오래 사실 것이니, 그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저하도 곧 적절한 심리 안정을 찾으실 거고요. 하지만 작은 심리 요법 하나를 해드릴게요.”

윤서는 이향의 손을 잡고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눈을 감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자, 떠올려보세요. 달라질 미래를. 제가 와서, 그리고 얼핏 들으면 미친 사람 같은 저를 믿어주셔서, 저하가 바꿔나갈, 그 미래를 떠올려보세요.”

“······.”

“그리고 저하가 지금 느끼시는 분노를 동력 삼아 새롭게 이뤄낼 조선의 발전상도 그려보세요.”

“······.”

이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감정의 격랑을 겪을 것이다.

뒤늦은 사춘기를 앓는 청년처럼, 어릴 적부터 목각 인형처럼 억눌렀던 감정들이 훗날의 비극을 알게 된 분노와 함께 증폭되면서 불쑥불쑥 격한 배신감에 휩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향의 분노는 성군이신 세종 치하에서 점점 더 안일하게 타성에 젖어가던 지배층에게 이로운 경각심이 될 것이다.

이향은 부지런한 군주니,

“저하, 장성한 홍위에게 물려줄 저하의 조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부강한 나라일 것입니다.”

윤서는 이향의 넓은 등을 토닥이며 이향이 트라우마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소될 것이라 믿었다.

벌써 괘종시계가, 그리고 장차 석탄이 올 것만 보아도 확실하다.

*****

이향이 이향의 조선을 만드느라 분주하다면 윤서는 윤서의 동궁을 만드느라 또 분주했다.

“우리 선아 아기씨도 수영이란 걸 배우게 해주세요.”

햇살이 한창 가늘어지기 시작하던 오후, 홍위와 평창 군주 희아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양 사칙이 다섯 살 딸을 데리고 거처로 찾아왔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양 사칙의 딸 업동이는 이향이 지어준 이름 ‘선아’가 이미 있었다. 홍 상궁이 두려워 이름이 없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금아 아기씨도 데려가는 것이 좋겠네.”

어른은 미워도 아이는 죄가 없으니 금아도 데려가 수영을 가르쳐 볼까 나인을 보냈더니 몸이 안 좋아 보낼 수 없노라고 홍 상궁이 거절했다.

열여섯 살 권 승휘도 함께 갔다. 후궁에서 왕따를 당해서 빼빼 말라가던 권 승휘는 윤서를 언니처럼 따르며 하는 일마다 다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윤서 허벅지 정도 오는 깊이의 간이 수영장에 도착한 후 한쪽 칸을 나눠 마련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혀 나왔더니.

오호라. 양 사칙도 윤서가 입는 수영복처럼 생긴 옷을 솜씨 좋게 만들어 입고 나왔는데. 몸매가 아주 훤히 드러나게 딱 붙는 복장이었다.

워후, 늘씬하네, 양 사칙!

정 승휘가 내궁을 관장하게 된 후 홍 상궁의 마수에서 놓여나게 된 양 사칙은 서른이 되어가는 나이에 걸맞게 농염하게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조 상궁의 보고에 따르면 이향이 윤서의 거처로 건너오는 즈음 그 주변에 우연인 듯 서 있다가 딸 선아 아기씨가 아바마마를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였다.

그건 홍 상궁도 마찬가지인데, 홍 상궁의 경우는 금아가 아프다는 경우가 많았다.

“양 사칙은 경계할 것이 못 됩니다. 신분이 천해 사내아이를 낳는다고 한들 겨우 승휘로 올라올까 말까입니다.”

천한 후궁의 아들이니 우리 홍위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주기도 어렵고 오히려 양 사칙과 얽히면 저하께서 윤서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셔 더욱 굳건하게 총애를 더하실 수도 있다고 조 상궁이 조언했다.

반면에 홍 상궁은 친정 가문이 좋고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와 긴밀하니 경계해야 한다고 강하게 조언했다.

“전에 총애가 깊었으니 다시 자주 얼굴을 맞대면 잊고 있던 정이 다시 솟아날 수도 있고, 술수에 능한 홍 상궁이니 춘약을 동원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사내아이라도 낳게 되면 훗날 후계를 노리고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 아예 싹을 자르시지요.”

보고를 듣고난 후 윤서는 조 상궁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게. 아이들의 건강, 감정,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 관여해서는 아니 되네. 그리고 아이들과 아버지가 서로 그리워하고 아끼는 건 천륜인 것이니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고하지 말게."

다만 한 가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 하나 있었다.

금아를 진맥하고 탕약을 처방한 어의 전순의의 말이었다.

“금아 아기씨 피부에 옅은 반점이 군데군데 있고, 손톱 끝에 가로로 검은 선이 희미하게 있습니다. 입 안에도 염증이 자주 생겨 음식을 드시기 어려운지라 덩치가 또래보다 현저하게 작으신 것이지요. 지능도 또래보다 떨어지십니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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