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3화. 권윤서를 찾아 헤매던 밤, 이향 >
“권윤서!”
이향이 굳어진 목소리로 윤서를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행을 나올 때 입는 아청색 철릭이 어둠 속에 치맛자락처럼 펄럭거렸다.
이향을 보고서야 윤서는 실은, 오늘 하루가 무척 길고 힘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자 결국 해결점이 될 사내가 저기 서 있었다.
윤서는 어두운 비탈길을 구르듯 달려 이향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 당황한 듯 받아 안는 이향의 목을 감고, 한껏 발꿈치를 올려 수염 아래 드러난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유, 윤서야?”
당황한 듯 부르는 목소리를 탐욕스럽게 삼키며, 몸을 더욱 거리낌 없이 붙이며, 윤서는 이향이 왜 궁인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자신을 안고, 입맞춤을 하였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선언이었다.
이 여인은 내 여인이니 너희는 함부로 대하지 말라.
윤서도 선언하고 싶었다.
이 남자는 내 남자니, 너희는 함부로 시선을 주지도, 마음에 담지도 말라!
자신을 만나기 전의 인연이었다고 이성은 납득하고 있지만, 마음은 이 상황을, 이향 하나에 딸려온 여인들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화가 나 있던 이향의 몸이 점점 농염해지는 입맞춤으로 서서히 풀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영혼 전부를 빨아들일 듯 탐욕스럽게 입을 맞추던 입술을 떼어 윤서는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는 심장의 맥동이 역사 속 비운의 운명을 지녔던 사내가 자신의 남자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결국 시공간을 넘어온 자신의 영혼이 이 사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도.
“가요, 돌아가요.”
얼굴을 들어 말하자, 어두워진 밤보다 더 검어진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내려만 보던 이향이 이윽고 툭 말했다.
“네가, 윤서 네가, 한강을 넘어 도망친 줄 알았다.”
박 상궁에게 교태전 앞 연회에서 있었던 일과, 윤서가 그 후 자신의 후궁들 모임에 불려 갔다가 매금이와 둘이서 검은 야행복 차림으로 궐을 나가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향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그려진 풍경은 검은 강물에 엎어지듯 들어가 거침없이 강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권윤서의 모습이었다.
그간 써준 글과 말로 그가 살다 온 세계는 계급도 없고 혼인도 배타적인 사랑을 기본으로 맺어진다는 걸 이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홍위가 의젓하게 성장했으니.’
세책례와 그 후 연회에서 홍위는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의 태를 모두 벗고 눈이 부시게 당당하였다.
윤서가 말하는 ‘안정적인 정서’가 너무도 완연하여 문득 이제 밤에 홀로 잠들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숨을 고르고 나면, 권윤서는 늘 아무렇게나 벗겨졌던 옷을 다시 꼼꼼히 챙겨입고 서온돌로 넘어갔다. 홍위가 아직 홀로 깨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대청마루를 건너가는 여인의 뒷모습은 언제든 다른 이유로도 훌쩍 당신을 떠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향은 홍위의 정서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 윤서가 자신의 후궁들을 보고 이 복잡한 관계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탕약을 먹었어도 완전히 깨지 않은 술기운이 비관적인 추측에 상상력을 더했다.
온종일 홍위를 보며, 홍위를 애틋하게 보는 권윤서를 보며 뿌듯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야속함과 노여움으로 변질되었다.
‘정말로 한강을 헤엄쳐 도망쳤다면 어디로, 어떻게 찾으러 가야 하나.’
배를 타고 양재역 쪽으로 일단 건너가야 하는데. 거기에도 없으면 또 어디까지 가야 하나. 얼핏 들으니 저쪽 세상에서 충청도 홍주 근처가 고향이었다는데, 권윤서는 쉬지 않고 백 리를 달린다고 했으니, 백 리까지 홍주 방향으로 달려가며 일단 찾아보고. 그래도 없으면!
초조감에 의대 시중을 드는 내관에게 “손이 이리 굼떠서, 돼지 발굽을 가진 자라도 너보다 빨리 옷시중을 들겠다!” 고 생전 해보지 않은 고함을 쳤을 때.
이향은 문득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권윤서를 만난 후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다.
그전까지 이향의 세계는 아바마마께서 온 힘을 다해 만드시는 세상의 질서를 힘써 이어받기만 하면 되었다. 아바마마처럼 학문에 몰두하고,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 의견을 취합하여 조정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산술과 과학에 기반해 백성의 삶에 유용한 기물을 만들고, 그리고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를 물리칠 화포를 개량하고, 전투에 더 유용할 진법을 토론하고.
엄격하나 자상한 아바마마와 확고한 지지와 충성을 보이는 신하와 동생들이 있고, 사직을 이을 아들이 커가는 안온한 세상이었다. 그 세상에서 자신은 새벽부터 밤까지 단정하게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홍위를 향해 환히 웃던 권윤서를 마음에 담게 된 후 세상이 격변했다.
자신은 때 이르게 죽고 그 때문에 아들은 수양에게 쫓겨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들은 후, 그 역모에 가담했던 자들의 이름을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막았지만, 사람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성현의 말씀을 들어 군주의 덕목을 설파하면 ‘그러는 네 놈은 정작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의심부터 더럭 들었다.
자신 앞에서 늘 공손하게 예를 다하는 수양이 실은 아들과 신하들 절반을 넘게 학살한 악랄한 역적이라는 사실을 듣고 난 후 그놈의 면상을 보면 보면 침을 뱉고 당장 끌어내 사지를 찢어 죽이라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이향은 말타기 좋게 철릭으로 갈아입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때 함께 하는 호위 내관 천가를 불러 가장 날랜 이들로 넷을 준비하고, 갈아타고 달릴 말까지 열 필을 준비하라 명하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권윤서가 말한 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에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권윤서가 한 말이 자신에게 불러온 충격은 아버지와 삼촌이 극심한 고문 끝에 돌아가시고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어마마마가 받으신 충격만큼이나 컸다는 것을 이향은 문득 깨달았다.
수양 외에 누가 그 일에 가담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윤서의 태도를 지켜보면 짐작 가능한 인물들이 몇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후궁들, 특히나 한때 총애했던 홍 승휘는 수양의 부인과 가까우니 그 편에 서서 방조하거나 협력했을 것이고. 전순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경기하듯 혐오감을 표했으니, 그도 자신의 죽음이나 홍위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빈과 계양군과 그의 장인 한확을 말할 때 눈빛이 차갑게 변하는 걸 보면, 원래도 수양과 가까운 신빈과 그의 자손은 모두 수양의 편에 섰던 것이고.
윤서가 믿고 신뢰하는 엄자치, 박 상궁, 양 귀인은 아마도 홍위를 위해 목숨을 다했던 이들이겠지. 금성 대군을 말할 때도 표정이 부드럽게 펴진 것을 보면 그 동생도 홍위를 위해 변을 당했을 것이다.
비현각에서 김종서를 보았을 때 눈에 눈물이 고였던 것과 반대로 정인지는 아주 쌀쌀맞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래서 이향은 어느 때인가부터 누군가가 궁금해지면 윤서 앞에서 슬쩍 언급하고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아주 용한 술사에게 장차의 일을 하문하시던 아바마마처럼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싶은, 억제하기 어려운 충동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인재를 적재적소에 두고 써야 한다는 아바마마나 역사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권윤서를 마음에 담고부터.
“어디부터 갈까요, 저하?”
천가가 묻고 나서야 이향은 자신이 애마의 고삐를 쥔 채 넋을 빼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부터 가야 하나.
···가긴, 해야 하나.
순간 갈등이 들었다.
공자께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논하지 말라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식과 예언은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다.
아바마마조차도 잘난 왕자들이 많을 때 생기는 근심을 한사코 외면하려 하셨고, 자신도 아바마마를 따라 빼어난 동생들의 야망은 눈에 담지도 않으려고 해왔다.
그 결과를 홍위와 충성 깊은 신하들이 다 감당해야 했던 것이지만, 몰랐다면, 모른 채 죽을 수 있었다면 사직 앞에 죄인은 되었을지언정 죽을 때까지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 먼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유럽이란 곳에서 ‘마녀 사냥’이 일어났던 것이고, 그래서 윤서도 자신이 그들처럼 처형될까 두렵다고도 했겠지.
미래를, 금단의 지식을 아는 이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거리낌을 대상이 되니. 지금의 자신처럼. 내가, 윤서를 두려워도 하고 있었구나.
“금위군 훈련장부터 가자.”
“그럼, 일단 말은 한 마리만 타고 가셨다가, 못 찾으면 다시 한 마리 더 가지러 오시지요.”
응봉산 중턱 훈련장까지는 산비탈 길을 일각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된다.
건춘문을 나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말을 달리는 이향의 마음이 만 갈래로 요동쳤다.
그곳에 권윤서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정말로 한강 이남으로 도망쳤으면 어떻게 하나, 그럼 권윤서를 찾는다고 궐을 나가면 아바마마와 신하들은 여인 때문에 미친 세자를 두고 무어라 하실 것인가 하는 공포와,
권윤서를 이제 정말 부인으로 맞아 일생을 함께 하게 될 때 가지게 될 미지의 지식과 분별의 세계가 무엇일지 가늠되지 않는 두려움이 몸과 마음 모두를 어지럽혔다.
‘여인은 그저 후사를 잇는 용도거나 고양이처럼 잠시 쓰다듬는 것에 족하면 되었을 것을.’
권윤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살던 대로 평생 여인에 무심하게 평온하게, 이렇게 미친놈처럼 가슴 조이며 어둠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말에서 내려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임산부처럼 불룩한 달빛에 의지해 비탈길을 오르며 이향이 탄식할 때였다.
어둠을 헤치고 허깨비처럼 권윤서가 나타났다.
매금이라는, 정체가 미심쩍으나 권윤서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지킬 실력을 가져 붙여두는 방자와 함께 나타난 권윤서를 보았을 때.
이향은 노여움부터 들었다.
네가 부재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영영 도망친 것으로 두렵지 않았었더라면.
“권윤서!”
내가 너를 두고 이리도 복잡한 심정이었다는 것을 굳이 되짚어나 보았겠느냐.
“권윤서!”
너는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이냐.
노여움과 원망을 담아 부르는 이향의 품으로 권윤서가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평소에 남의 눈앞에서는 그토록 질색했던 애정 행각을 거리낌 없이 퍼부었다.
“유, 윤서야.”
부르는 외침마저 열정적으로 삼키는 윤서는 온몸을 후둘후둘 떨고 있었다.
받아 안은 손길을 풀면 빈 자루처럼 허물어질 것처럼 형편없이 몸을 떠는 윤서의 몸짓에서, 절박하게 혀를 얽는 애정의 행위에서 이향은 윤서도 실은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낯선 조선에서 윤서에게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과,
하필 그 의지 되는 이가 세자이기에 담백한 성정의 윤서가 얼마나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가 스르르 이해가 갔다.
저절로 이해가 갈 만큼, 그래서 가슴이 먹먹할 만큼 권윤서는 이향에게 절실한 여인이었다.
“보여줄 것이 있다.”
몸을 떼어낸 윤서에게 이향이 속삭였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얽힌 윤서를 없는 인연으로 만들 재주는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이향은 윤서를 앞에 태우고 군기시로 달려갔다.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군기시에서 고개 숙인 장인들과 함께 윤서를 맞이한 것은,
“···와, 이, 이게. 저하!”
2m가 넘는 커다란 괘종시계였다.
검은 목단 틀 안에 커다란 톱니바퀴가 여러 개 맞물려 있고, 그 밑에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70~80cm 정도의 추만 달려 있는 미완의 괘종시계.
“윤서 네가 여러 개의 뾰족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태엽이라는 원리와, 일정 속도로 움직이는 진자의 원리를 이용한다는 시계를 그려주었던 거 기억하느냐?”
“예.”
미래에서 온 영혼이라는 걸 고백한 지 사흘인가만에 그려주었다. 시계가 없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아직 미완성이다. 추의 길이를 우리 시간에 맞게 더 조절해야 하고, 진자에서 뾰족 바퀴가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 이음새 부분을 기능적으로 개선한 후 바늘을 붙여야 해.”
“그래도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는데요?”
“그래, 아직 자주 멈춰 서지만 그래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간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흐를 것이다, 윤서야.”
우리의 시간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흐를 것이다, 윤서야.
시간이 정말로 흐르고 있었다.
원래의 역사와 다른 시간이, 역사에 없던 저 시계를 통해 쉼 없이 흘러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역사를 만들어 낼 시간이 두 사람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승휘로 책봉해 주세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 제 63화. 권윤서를 찾아 헤매던 밤, 이향 > 끝
ⓒ 윤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