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62화 (62/255)

< 제 62화. 이향의 후궁들 (3) >

“그 책의 핵심 내용이 어린아이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 안전 속에서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전파하시고자 하시는 양육 환경이지요. 그런데 뺨을 때리는 이 흉악한 분위기에 왕손을 데려오다니요?”

“뭐가 흉악하다는 거냐? 이거 놓으래도, 아아! 팔 빠진다, 진짜! 여봐라!”

“제게 미심쩍은 약과를 먹이시려거든 직접 건네세요. 힘없는 어린아이 윽박질러 시키지 마시고!”

“미심쩍다니! 하, 권가, 너! 아야! 놓고 말해, 놓고!”

약과가 미심쩍다는 윤서의 말에 침묵하던 정 승휘가 나섰다.

“권가 나인, 미심쩍은 약과라니! 자네, 감히 나와 우리 승휘 모두를 의심하는 것인가?”

“맞아! 정 승휘, 이년이 겁대가리 없이! 아야야! 이년을 어서 끌어내 매타작을,”

“하, 홍 상궁! 좀, 조용히 하시오!”

“!”

언제나 자신의 눈치를 보던 정 승휘가 호통을 치자 홍 상궁이 놀라 딸꾹질을 했다.

'오호. 홍 상궁의 권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 재빠르게 자신의 권위를 굳히고 나서다니.'

그러면서 윤서에게 홍 상궁의 팔을 놓아주라고는 끝내 명하지는 않는, 꽤 재미난 태도까지.

홍 상궁, 평소에 좀 자중했어야지. 대체 인심을 얼마나 잃은 거야.

“보통의 약과였다면 제가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이것이, 사죄로 끝이 날 일인가?”

“아악! 이 팔, 팔부터 놓으라고 하라고!”

“제게 의심의 죄를 물으시려면 귀한 왕손에게 약과를 건네라 윽박지른 죄도 함께 물으셔야 합니다. 또한 저는 원손 아기씨의 보모 나인으로, 또 전하께서 인정하신 육아 이론 전문가로서 이 험악한 분위기에 두 귀한 왕손 아기씨를 노출 시킨 부주의와, 홍 상궁의 행위까지 모두 다 중전마마께 고할 것입니다.”

“!”

“!”

“!”

그러면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다 꾸지람을 받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 내궁을 책임진 정 승휘가 가장 많이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다.

정 승휘가 흠칫, 몸을 굳히더니 홍 상궁에게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들었는가, 홍 상궁? 이게 다 자네가 잘못한 게야.”

갑자기 모든 죄를 다 홀로 뒤집어쓰게 된 홍 상궁이 기가 막혀 소리쳤다.

“너! 너!”

“어허! ‘너’라니. 나는 승휘고, 자넨 상궁인 것을! 여봐라, 홍 상궁을 거처로 데려가라.”

“어머, 정 승휘 마마님. 어떻게 저희 종이모님한테.”

보다 못한 민 승휘가 나섰다.

그러자 정 승휘가 어깨를 쭉 편 위엄 있는 자세로 민 승휘에게 물었다.

“자네도 함께 끌려 나가고 싶은가?”

“···아, 아니. 저, 저는.”

어린 민 승휘는 처음 보는 정 승휘의 위엄 어린 물음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러자 홍 상궁이 민 승휘를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 현숙이, 너!”

“이모님, 가요. 제가 모실 게요.”

민 승휘는 그래도 친정어머니의 사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일어나 홍 상궁을 부축하였다.

윤서는 홍 상궁의 팔을 놓아주었다.

“앞으로 아무 한테나 손 함부로 올리지 마시고. 금아 아기씨 좀 잘 돌보십시오. 안색이 어째 나날이 더 창백해집니다.”

“하! 너, 너는 언제고.”

“어의 전순의를 보낼 테니 자세히 진맥 받고 치료받게 하세요.”

“흥, 착한 척은. 네까짓 게.”

착한 척은, 무슨.

오래지 않아 죽었다는 걸 아는 자로서의 최소의 양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약물에 의한 병증인지 알아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홍 상궁, 이만 돌아가게. 가서 오늘 소란을 일으킨 것을 반성하시게.”

정 승휘가 소리쳤다.

홍 상궁은 이 사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후궁들을 둘러보았지만 민 승휘 외에는 아무도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아픔과 배신감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대청마루로 나가더니,

“이리 와, 금아. 으흐흑, 가여운 것.”

울면서 금아를 안고 거처로 돌아갔다.

홍 상궁과 민 승휘가 나가자 정 승휘는 더욱더 당당해졌다.

그리고 홍 상궁과 달리 진중하게, 영민하게 내궁을 장악하려 했다.

“유 승휘는 그럼 권가 나인에게 장부를 배워 내가 내궁의 예산을 집행하는 것 좀 돕게나. 그래야 지금까지 내키는 대로 함부로 사치품 따위에 낭비하던 것을 막지 않겠나?”

하며 홍 상궁의 무분별한 씀씀이를 지적해 재기가 불가능하게 쐐기를 박으려 했고,

“양 사칙, 자네는 언제까지 우리 아기씨를 태명인 ‘업동이’로 부를 것인가? 이제 만 네 돌을 넘기셨으니 세자 저하께 어엿한 아명 하나 내려주십사 청하게.”

하며 양 사칙을 이향과 엮어 윤서를 견제하려 들었다.

“아, 그, 그럴까요?”

양 사칙이 윤서의 눈치를 보며 기쁜 듯 웃었다.

“그럼, 그래야지. 권가 나인 말처럼 왕손은 귀하고 소중하신 존재인데 이름이 너무 가볍지 않은가.”

이 말을 하고 정 승휘는 윤서를 바라보고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권가 나인?”

오호.

이 양반 조용하게 강적이네.

“그것은 정 승휘 마마님께서 사칙 마마님과 결정하실 일입니다. 저는 아직 보모 나인이니 내궁 일에 무어라 의견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런가? 의견을 내기 싫은 건 아니고?”

하면서 윤서와 양 사칙 사이를 벌써 이간질했다.

정말로, 이런 식의 돌려돌려 치는 공격은 아까 홍 상궁이 앵앵대는 것만큼이나 피곤했다.

그래서 윤서는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제게 의견을 낼 권한이, 정말 있단 말씀입니까?”

그 기세가 아까 홍 상궁의 팔을 꺾던 것처럼 흉흉했는지 정 승휘가 움찔했다.

때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몸짓이 더 큰 효과를 낸다. 특히 말로 모든 걸 다 삶아 먹으려 하는 궐의 여인들 틈에서는.

“아, 아니야. 그런 것은 아니고.”

얼버무린 정 승휘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의 소란은 홍 상궁이 모두 다 일으킨 일이네. 자네의 무례를 묻어줄 터이니 자네도 홍 상궁을 위해 이 일은 함구하게.”

다시 홍 상궁에게 오늘 일의 책임을 다 떠넘겼다.

이런 사람은 뒤로 은밀하게 일을 꾸며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에 아주 능하다.

그러니 미리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혜민국 일은 왕실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정 승휘 마마님께서 참여하는 인원을 모두 책임지고 통솔하셔야 합니다.”

“···자네는?”

“저는 혜민국 운영에서 약재와 치료법 개발, 의녀 교육과 인사를 왕명으로 이미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 후궁이 되기 전부터 하던 일이지요.”

“······.”

윤서가 명확하게 선을 긋고 나오자 정 승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 승휘가 다시 나섰다.

“정 승휘 마마님! 제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궐 밖 일을 해볼 기회가 없을 거에요.”

“하지만······.”

“왕실 내명부 일은 주로 중전마마와 양 귀인께서 전하의 후궁 마마님들과 처리하시니 우리 동궁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매일 좁은 전각에서 멍하니 있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저도,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계속 침묵하던 장 사칙까지 나서자 정 승휘는 마지못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권가 자네가 많이 도와주어야 하네. 자네도 이제 곧 우리 내궁 사람이 될 터이니.”

그리고 끝까지 윤서에게 한가닥 책임을 지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은 내세우되 책임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는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 정 승휘는 승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윤서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첫 후궁 인사를 마치고 뜰에 내려 서는데 유 승휘가 따라 나왔다.

“권가, 정말 고마워. 자네 제안이 없었더라면 내 몇 달 새 머리에 꽃 꽂았을 걸세.”

“아이고, 뭘요. 서로 도움이 되면 좋지요.”

“그래, 그리고.”

유 승휘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아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사실 내가 뭐 좀 썼는데, 언제 한번 읽어주겠나? 괜찮으면 나도 자네처럼······, 출, 출판하고 싶네!”

“!”

“여, 연정 기, 기담인데. 여, 여인들이, 조, 좋아할 거야.”

“!”

연정 기담이라니 김시습의 ‘금오신화’ 같은 것인가.

그런 것이 이런 시대에 유통이 되나.

그렇지만 없는 듯 존재를 지우고 살던 여인이 겨우 숨구멍을 발견한 듯 이리 흥분해서 말하는데 모르는 척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고심하는데 그럴 듯한 안이 생각났다.

“한문으로 연정 기담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일단 계속 쓰시면서 몇 달만 기다려 보세요. 좋은 기회가 올 것입니다.”

“며, 몇 달?”

“예,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몇 달이오. 몇 달 기다리시면 아마 기회가 올 것입니다.”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데 연정 소설만큼이나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분, 보아하니 남녀상열지사는 영 경험이 없으신 것 같은데, 애절하고도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행간에서 야한 느낌을 제대로 주는, 그런 로맨스를 제대로 쓰셨을까.

윤서의 의혹을 느꼈는지, 유 승휘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워, 원래, 못 해본 이들이, 더, 간절하게, 그런 법, 아니겠어?”

궐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다.

*****

그렇게 후궁의 거처에서 나오고 난 후 윤서는 매금이에게 부탁했다.

“나, 그, 칼 쓰는 법 좀 가르쳐 줘.”

“뜀박질?”

“뜀박질도 좋지만, 달리기는 마음을 유하게 푸는 것이거든. 그런데 오늘 보니, 궐에서 책임지고 살려면 마음이 독해져야겠어. 번뇌는 달리기로 날리고, 과감한 결단력은 칼로 키우고.”

언젠가 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은 본시 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 본능적으로 반감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회수한 총기 중, 2회에서 20회까지 재장전된 총이 많았다는 사실을 들었다. 서로 마주 보고 쏘는 전투에서 상대를 향해 겨냥하지 않고 쏘는 시늉만 하며 계속 총알을 재장전했다는 말이었다.

윤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의 도덕과 윤리 의식을 가지고는 가혹할 만큼 냉정하고 거친 권력의 중심부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는 이들을 필요에 따라 협력하고 또 때로 제거하며 살아남기가 만만치 않을 것을 오늘 절실하게 느꼈다.

정 승휘는 눈치가 빤하니 제 권력을 굳히려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승자에 붙으려 할 것이겠지만, 수가 틀렸다 싶으면 의외로 고약하게 나올 수 있을 법한 인상이었다.

유 승휘는 열정적으로 바깥일에 참여하고 사랑 이야기를 쓰느라 따로 암투를 벌이거나 하진 않을 것 같지만, 저런 인간이 돌면 더 무섭다.

그리고 양 사칙은 딸도 있고 미모도 고와 은근히 윤서에게 경쟁심을 느껴 정 승휘 계략에 이용당하기 딱 좋아 보였다.

장 사칙은 그 속을 알기 어렵게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홍 상궁은 이미 한물갔지만, 그 조카 민 승휘와 가여운 권 승휘는 또.

가까이서 상대해야 할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이 생겼다.

“가급적 서로 상생하며 살고 싶지만, 과감하게 움직여야 할 땐 움직이고 싶어. 그래야 나도, 나의 사람들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윤서는 박 상궁 마마님께 출패를 얻어 매금이와 함께 새벽 운동을 하는 응봉산 기슭 금위군 훈련소로 갔다.

그러나 매금이의 칼쓰기 강습은 일 각(15분)이 되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매금이의 무술은 죽이는 데에만 특화되어 있어 두세 번 검을 부딪치기도 전에 목에 칼날을 들이박는 식이라 정신을 수련하는 것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대체, 너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온 거야?”

살짝 피가 흐르는 목을 잡고 윤서가 물었더니, 윤서의 피를 아주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매금이가 대답했다.

“··· 깊은 데.”

“깊은 데?”

“······.”

매금이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팽 몸을 돌렸다.

칼쓰기는 그만 두고 같이 몇 바퀴 달리기를 한 후 어두워지는 산기슭을 내려오며 윤서가 물었다.

“호신술도 같이 수련 못 하겠네. 분명히 너는 목뼈부터 으드윽 돌리거나 어깨나 팔꿈치 관절을 탈구부터 시키겠지?”

“응!”

“듬직하다, 매금아. 진짜.”

네 덕분에 마음 놓고 난 훌륭한 왕실 여인이 되어갈 거야.

홍위와 평창 군주에게, 또 언젠가 태어날 내 아이에게 많은 지식을 전수하고, 그 지식을 다른 아이들도 배울 수 있게 보급하고, 이향이 더욱 좋은 나라를 만들게 돕고, 그리고 좋은 약재와 치료법을 개발해 백성들 삶을 돕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내 사람들을 키워 역사의 비극이 생겨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그래도 막기 어려우면,

네가 있잖아. 매금아.

그렇게 안심하며 내려오는데,

이향이 어두워진 길목에 서 있었다.

뒤에 호위 내관 다섯만 거느리고.

“권윤서!”

어째, 부르는 목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 제 62화. 이향의 후궁들 (3)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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