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1화. 이향의 후궁들 (2) >
“소인 권가 윤서 인사 올립니다.”
전에 홍 승휘가 쓰던 거처의 대청마루에 오르자마자, 윤서는 열린 문 안쪽을 향해 일단 절을 올렸다.
“안으로 들어오게.”
안쪽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는 댓돌 옆에 나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매금이에게 ‘부르기 전에는 얌전히 있어’란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라는 명령에 고개를 드는 찰나.
눈앞으로 휙,
뭐가 날아들었다.
윤서가, 더 정확히 말하면 윤서의 영혼이 들어 있는 권가의 몸이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것을 잡아 꺾었다.
“아앗! 아파! 아파요!”
앳된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손목이 꺾인 고통에 발을 동동 굴러 치맛자락이 펄럭거리는데도 윤서의 앉은 몸에 발길질이 날아들지 않았다. 애초 싸대기를 날린 것 또한 자의가 아니었다는 뜻이니.
“환영 인사가 너무 격하시긴 하셨지만, 그래도 반가워요.”
윤서는 팔을 놓아주며 씩 웃어 보였다.
“미, 미안해.”
열여섯 살 권 승휘가 흐흑흑 흐느끼며 사과를 했다.
애처로운 정도로 마른 손목엔 벌써 붉게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깡마른 어깨에서 그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가 훤히 보였다.
“어머, 권 승휘. 저하께서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고 그렇게 투기를 부리다니. 심성이 어째 그래?”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역시나 홍 승휘, 아니 홍 상궁이 보였다.
앞에 그동안 안색이 더욱 파리해진 딸 금아를 앉히고서였다.
“홍 상궁께선 거처를 못 나오지 않으십니까?”
“흥, 근신 기간이 끝났다!”
역시 양 귀인 말씀이 옳았구나. 이제 곧 승휘 작위도 회복하겠군. 그렇게 둘 순 없지.
“투기에 못 이겨 함부로 손을 놀렸으니, 권 승휘는 거처로 돌아가 반성하세요.”
“···예.”
앙칼진 홍 상궁의 목소리가 전각을 울리자, 권 승휘가 흑흑 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키는 대로 했다가 모함을 당하고 이제 왕따까지 노골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자, 한남군 부인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권 승휘 마마님, 제가 손목을 너무 세게 비틀어 탈골되었을 수도 있어요. 이따 찾아뵙고 좀 봐 드리겠습니다. 제가 혜민국에서 전순의 어의에게 간단한 처치 정도는 배워두었어요.”
“···괜찮은데. 괜찮아.”
홍 승휘 쪽을 심하게 힐긋거리며 말로는 연신 사양했지만 눈에는 고마움이 가득했다.
권 승휘가 홍 상궁에게 쫓겨나 거처로 향한 후.
윤서는 앞에 놓인 다과 상 위의 찻잔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재빨리 방 안의 인물을 살폈다.
역사 속에선 정 승휘와 홍 승휘, 민 승휘가 수양 대군의 협력자였다.
하지만 그 역사는 한참 후의 일이고, 윤서가 이 세계로 오면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 되었다.
이제 윤서는 미리 경계하고 대비는 철저히 하되 이향의 말처럼 지금의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로 미리 사람을 단죄하려 드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히 이향의 후궁들에겐.
이들 중 셋은 역사 속 역사 속 이향에게 배신자였고 우리 홍위에게 가해자였지만, 현재의 세계에서는 윤서가 이들에게서 마음에 품고 있으나 닿지 못하던 남자를 영영 빼앗는 입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악역으로 확실히 확인된 사람은 홍 승휘뿐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각자 스윽 훑었다.
제일 윗 상석에 “안으로 들어오게”란 말 외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이가 정 승휘였다. 상석에 앉아는 있지만 이 자리는 결코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듯 좌불안석 불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홍 상궁이 최고의 상전처럼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옷은 상궁 복장이었지만 머리 장식은 방안의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금아는 전보다 더 창백해졌어. 정말로,’
윤서는 홍 승휘 앞에 앉아 있는 금아가 역사에서처럼 내년에 죽을 것만 같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동시에 홍 승휘에 대한 맹렬한 증오를 느꼈다.
‘못된 짓은 혼자 다 할 것이면서 이런 자리에 자식을 데려오다니,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할 저 어린 나이에!’
어서 전하께서 막바지 작업 중이신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육아보감>이 빨리 퍼져나가야 한다. 그래야 이런 분위기 살벌한 암투 자리에 애들을 데리고 오지 않지!
분노를 삼키며 홍 상궁 옆을 살폈다.
연분홍 고운 비단에 금박 무늬가 정교하게 박힌 당의를 차려입은 이가 열여덟 동갑 민 승휘일 것이다.
홍 승휘 맞은편으로, 무늬 없는 짙은 감색 비단 당의를 입은 이가 아마 유 승휘일 것이다. 입궐한 지 사오 년이 되도록 이향의 관심을 받은 적이 거의 없어 없는 듯 지낸다는 말처럼 정말로 존재감이 없었다.
금아 맞은편으로 꼬마 여자애 하나가 주눅 든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저 아이가 다섯 살이라는 현주겠구나.’
그 아이를 방패처럼 뒤에서 안고 있는 이가 이향과 동갑이라는 스물아홉 사칙 양씨일 것이다. 신분이 천해서 딸을 낳았어도 승휘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옷도 수수한 상궁 복장에 장신구도 거의 없었지만 상당히 미인이었다.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상궁이 사칙 장씨이다.
윤서가 휘릭 훑어보고 입도 안 댄 찻잔을 다시 내려놓자 이윽고 정 승휘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곧 후궁 품계를 받게 될 것 같다 하여 인사나 나누자고 불렀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권가 윤서라 하옵니다.”
대답하며 윤서는 여인들 사이에 생겨난 균열을 예리하게 알아챘다.
지금까지는 홍 승휘 주도로 권 승휘를 희생양 삼아 왕따시키며 자기들기리 결속을 다져왔겠지만, 한 남자를 두고 총애를 다투는 입장이라 그 결속은 언제든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런 이들이 방금 전 세자 이향의 총애를 독점하며 동시에 전하께서 천추전으로 불러 여러 일을 시킬 만큼 동궁의 실세인 권가 나인이 가여운 권 승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홍 승휘가 지배하는 내궁 질서에 의심을 시작한 것이다. ‘홍 승휘가 지배하는 내궁이 과연 자신들의 일상에 이로운가?’ 하는 의구심을.
홍 승휘가 평소 인덕을 쌓았더라면 절대로 나지 않았을 균열이기도 했다.
한때 이향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끝내 세자빈이 못된 이유일 것이다.
‘나 또한 이향을 나눠가질 수는 없지만!’
일이 있다.
사랑이 아니어도 삶의 의미를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을 나눌 수 있고 또 나눠야 한다!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장차 우리 홍위에게도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윤서가 이들에게 차리는 한가닥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제가 뵙게 되면 말씀 드리고 싶었던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혜민국의 일입니다.”
그러자 사흘에 한 번씩 권가 나인이 혜민국에 나가 치료약과 치료법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던 후궁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귀한 신분의 궐의 여인입니다. 만백성 앞에 우리 궐을 대표하실 분들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생각하건데, 제가 혜민국에서 하는 여러 일을 함께 하신다면, 백성을 위해 늘 힘써 일하고 계신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윤서는 혜민국과 더불어 사대문 바깥에 있는 활인서의 운영 방식을 간략히 설명하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도 설명했다.
간단한 비누와 여러 상비약을 만들도록 의녀와 소속 관노비들을 교육, 감독하고, 세도가 여인들에게 곡식이나 면포, 은 등의 장신구 등을 기증받아 왕실 이름으로 빈민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설명하자 늘 좁은 전각에서 죄수처럼 갇혀만 살아야 하는 후궁들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당장이라도 하고 싶네.”
갑자기 유 승휘가 입을 열었다.
“나는 홍 승, 아니 홍 상궁이나 여기 양 사칙처럼 돌볼 아이도 없어. 그리고 난 글자를 좀 아네. 그러니 약방문도 잘 쓰고, 장부 정리도 할 수 있을 게야. 자네 장부 정리법이 신통하다고 소문이 났으니 내게 가르쳐 주게.”
“우리 업동이도 많이 컸어요. 저도, 해보고 싶어요.”
양 사칙이 맞은편 홍 상궁 눈치를 심하게 보면서도 쭈뼛쭈뼛 끼어들었다.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당하듯 그간 홍 상궁에게 어지간히 치여, 이 기회에 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제가 모레 혜민국에 나가니, 다 같이 나가 둘러보며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조율하겠습니다.”
“좋아요.”
“그것참, 좋은 일일세.”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정 승휘까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자, 입술을 꾹 내밀고 있던 홍 상궁이 버럭 소리쳤다.
“흥, 그게 네 마음대로 된다더냐?”
홍 상궁이 날카롭게 물었다.
“윗전 허락도 없이 함부로 약조를 해?”
“좋은 일이니 중전마마와 세자 저하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궁인들도 함께 가면 되니까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홍 상궁이 이죽거리더니 갑자기 맞은편의 양 사칙 딸을 불렀다.
“업동아, 저 나인이 저리 장하니 네 앞에 놓인 약과 좀 하나 가져다 상으로 주련.”
“에에?”
“천치냐? 앞에 놓인 약과 하나 짚어다가 저기 나인한테 주라고!”
“······.”
업동이라 불리는 어린 아이가 홍 상궁의 사나운 말투에 울지도 못하고 몸을 뒤로 빼며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양 사칙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홍, 홍 승휘 마마님, 우, 우리 업동이가 아직, 어, 어려서.”
애원하듯 말하는 어조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불안한 듯 방패처럼 딸 아이를 껴안고 있던 그 절박하던 모습에서,
윤서는 일이 어떻게 꾸며졌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매금아!”
윤서가 몸을 일으키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너!”
홍 승휘가 삿대질을 하려고 손을 올리기도 전에 매금이가 방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윤서는 험악한 방 분위기에 벌써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금아를 안아 들어 매금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매금아, 우리 원손 아기씨랑 놀아줄 때처럼. 절대 아기들 다치게 하지 말고. 여기 금아 아기씨와 저기 업동 아기씨를 뜰로,”
“이게 진짜, 여봐라!”
홍 상궁이 몸을 벌떡 일으켜 뺨을 치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윤서가 훨씬 더 빨랐다.
윤서는 홍 상궁의 팔을 잡아 등 뒤로 꺾으며 다시 매금이에게 말했다.
“업동 아기씨도 뜰로 데리고 나가 화초 보여주면서 그 물구나무도 좀 보여 주고.”
“아아, 놔! 이게 이게, 진짜! 여봐라!”
“매금아, 아기씨들 험한 꼴 보시지 않게, 어서!”
그러자 힐끗만 보고도 사람 분위기를 동물적으로 읽어내는 매금이가 홍 상궁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본 후 한 손으로는 금아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어서 나가라고 양 사칙이 슬그머니 앞으로 미는 업동이의 손을 잡고 뜰로 나갔다.
“너! 감히! 여봐라! 이 발칙한 년을!”
홍 상궁의 나인들이 윤서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윤서는 홍 상궁의 팔을 좀 더 꺾어 올리며 소리쳤다.
“더 다가오면 여기 홍 상궁 마마님 팔 부러진다! 영영 못 쓸 거야!”
그러자 홍 상궁의 나인들은 더 다가오지 못하고 발만 굴러댔다.
윤서는 아프다고 울부짖는 홍 상궁을 무시하며, 처음 목격하는 황당한 상황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는 이향의 후궁들에게 말했다.
“제가 정의 공주님과 함께 쓰고 주상 전하께서 감수하신 육아서 <육아보감>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나오게 됩니다. 전하께서 그 책을 모든 백성이 읽고 실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감히! 놔라, 아프다! 네가 전하와 공주님으로 호가호위한다고 내가 겁먹을 것 같아? 여봐라!”
그러자 홍 상궁의 나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윤서의 팔을 잡았다.
“······.”
“······.”
그러나 다른 승휘나 후궁은 모두 입을 꾹 닫고 침묵하였다.
홍 상궁은 늘 하던 대로 성질을 부려대지만, 자신들은 전하와 정의 공주 이름 앞에서 몸을 사려야 한다고 재빨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슬그머니 외면하는 눈동자엔 홍 승휘를 고소해하는 조롱도 하나씩 들어 있었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윤서는 팔을 잡아끄는 나인 둘을 괴력으로 떨쳐내고 이 사안이 가지는 엄중함에 대해 모두에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 제 61화. 이향의 후궁들 (2)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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