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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60화 (60/255)

< 제 60화. 이향의 후궁들 (1) / 심리 수정 >

“정 승휘 마마님께서 부르시네. 다른 승휘 마마님들도 함께 기다리고 계시니 서두르시게.”

윤서가 평창 군주를 만나고 세자의 잠재적인 후궁이자 도로 원손의 보모 나인이 되어 동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향의 후궁 승휘 정씨가 부른다는 전갈을 다시 받았다.

승휘 정씨는 돌아가신 세자빈 권씨가 간택 후궁으로 뽑혀 입궐할 때, 함께 승휘로 뽑힌 최고참 후궁이었다.

함께 간택되어 이향의 총애를 받았던 승휘 홍씨가 지난번 윤서의 쪽지를 저주를 쓴 종이라고 고변했다가 승은 상궁으로 격하된 후 동궁의 내궁을 관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양 귀인께서 먼저 부르셨으니 뵙고 와서, 또 우리 원손 아기씨를 뵙고 난 다음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아직 보모 나인입니다.”

윤서는 일단 만남을 미뤘다.

홍위가 더 큰 후 후궁이 될 계획이었던지라 이향 후궁 세계의 판도가 어떠한지, 후궁 세계는 보통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윤서가 알고 있는 것은 이향에게 후궁이 여섯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 간택으로 뽑힌 양반 출신 승휘가 넷, 그리고 궁인 출신으로 승은을 받은 종6품 사칙이 둘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까지는 아직 상세하게 꿰뚫고 있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그 누구보다 승은을 입어 종1품까지 올라간 양 귀인이 도움이 된다.

당장 갈 수 없다고 하자 정 승휘를 모시는 상궁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종1품인 양 귀인이 먼저 부르셨다는데 끌고 가려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럼 대략 언제쯤이나 된단 말인가? 여러 윗전을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자네 앞으로가 순탄하지 못할 것이네.”

“두 분 뵙고 찾아뵙겠습니다. 서두를 터이니 양해 말씀 올려주세요.”

그렇게 정 승휘의 상궁을 보내고 윤서는 양화당으로 갔다.

양 귀인은 큰며느리인 한남군의 부인 권씨와 함께 있었다.

“드디어!”

윤서가 후궁이 되기로 본격적으로 마음먹은 것을 가장 반기는 이는 세종의 후궁 중 가장 예리한 정치 감각을 지닌 양 귀인이었다.

“궁금해서 온 것이지? 어떻게 후궁들 틈에서, 그것도 간택 후궁도 아닌 승은 후궁으로 살아남아 뜻을 이룰 것인지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예, 맞습니다. 그간은 우리 아기씨가 좀 더 크신 후에야 후궁 품계를 받을 것이라 생각해서 통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에이, 솔직해야지. 내심 회임 먼저 해서 높은 품계로 편하게 후궁 생활 시작하길 노리고 있었으면서.”

“!”

그건 아니었다.

병자들이 있는 혜민국에 드나들어야 해서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안고 싶어하는 이향 때문에 여의치 않았지만.

“정확하게 지금 동궁의 내궁 판세가 어떻게 되는지요?”

“먼저. 다행인 건 홍 승휘가 승은 상궁으로 내려갔다는 것인데,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네. 홍 승휘 아비가 지금 한성 소부윤이고 앞으로도 벼슬길이 창창할 것이야. 그러니 주상전하께서는 홍가가 적당히 근신했다 싶으면 다시 품계를 회복시켜 주시려 하실 게야. 그 아비 체면이 있으니.”

“!”

겨우 치웠는데!

홍 승휘 가문이 계유정난에서 수양 대군 측에 적극 협력해 공신 가문으로 영화를 누렸고 홍 승휘도 오래도록 영화를 누렸다는 걸 아는 윤서로서는 입맛이 매우 썼다.

적으로 판명이 되면 정말 재기가 불가능하게 확실히 제거해야 한다는 박 상궁 말씀이 옳았다.

“그리고 지금 동궁 내궁을 관장하는 정 승휘는 홍 승휘와 같이 간택되었지만 저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네. 세자 저하께서는 관심이 없는 여인들에겐 박정한지라 자네를 더 고깝게 보고 있을 게야. 가문도 홍 승휘 못지않게 만만치 않고.”

“간택 후궁은 대부분 가문이 좋습니까?”

“그렇지. 후계를 낳을 가능성도, 또 장차 세자빈이나 중전으로 올라설 가능성도 있으니 전하나 중전마마께선 좋은 가문에서 뽑으려고 하셨지. 다만 대대로 왕비 가문이 험한 일을 당했고, 세자께서 처복이 없으시단 점사도 있고 하여 명문가에서 꺼려 성사되지 못한 것일 뿐.”

“제가 너무 총애를 받아서 경계심이 생겨서 그런가, 얼마 전에 수양 대군 부인 윤씨가 중전마마께 명문가에서 규수를 세자빈으로 내놓고 싶어한다고 고했어요.”

“!”

양 귀인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뒤이어 미간을 험하게 찌푸렸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것이냐? 하!”

“세자 저하께서 세자빈 간택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서는 이향의 마음과 애정을 확신했다.

그러자 양 귀인이 꼭 세 발 달린 짐승을 쳐다보듯 윤서를 삐뚜름하게 바라보다 “하!” 혀를 찼다.

“도로 멍청해진 것이냐? 국혼은 정치적인 안배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지, 무슨. 하! 어쩐지 요새 신빈이 내 앞에서 기고만장하게 웃더라니. 왜, 그 중요한 걸, 이제야!”

말을 할수록 화가 나는지 양 귀인이 앞에 놓인 서탁까지 쾅 내리쳤다.

그 소리에 윤서의 심장도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렇지, 여기가 조선이었지.

내가 너무, 순진하게 안일하였구나.

윤서는 말없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머님, 고정하시어요. 그래도 세자 저하께선 마음에 들지 않는 여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설사 빈이 뽑힌다고 해도 전의 두 세자빈처럼 소박을 당하시겠지요.”

군부인 권씨가 깜짝 놀라 시어머니의 진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 귀인은 더욱더 화를 냈다.

“그깟 총애 따위! 빈이라는 게 중요하지! 나중에 중전이 되고 대비가 될 것이 아니냐!”

“!”

“어쩐지. 왜 평창 군주가 빰까지 후려치며 방방 뛰나 했더니! 넌 어째 여덟 살 군주만큼의 감각도 없느냐? 그깟 상궁이 뭐라고 그 시퍼런 옷 따위를 걸치고 나다녀, 나다니길.”

“···혜민국 일로, 또 여러 가지 일로 전하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윤서가 반박하자 양 귀인은 옆에 놓인 차 주전자를 들어 따르지도 않고 주전자째로 벌컥벌컥 마시고는 탕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야 널 일 시키기 좋은 인재로 신뢰하시는 거지. 전하께선 며느리 기준이 깐깐하시다. 중전마마를 기준으로 두고 평가하시기 때문이야. 여인을 얼마를 취하든 절대 투기하지 않고 총애받는 후궁을 오히려 더 아끼신 중전마마처럼, 후궁이 되면 너도 그리 처신하길 바라실 것이다.”

“!”

“궐이 이런 곳이다. 마음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계산으로 살아야 하는 곳. 잠시라도 빈틈을 보이면 뒤통수를 때려 맞는 곳이란 말이다!”

“······.”

어떻게 매일 이렇게 계산을 하고 살지. 대체, 어떻게!

“왜, 그렇게 애쓰고 사십니까?”

윤서는 진작부터 궁금했던 것 물었다.

양 귀인은 그저 숨죽이고 있었더라면, 아니 적극적으로 수양 대군 곁에 붙으려 했었더라면 아들 한남군과 함께 천수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왜 끝까지 단종을 지키다가 교살을 당했을까.

“왜 그리 아기씨를 위해 저를 빈으로 만들려 하십니까?”

“너는 내가 신빈을 미워해서 원손 아기씨를 키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그것뿐이겠느냐?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아기씨를 친정어머니와 함께 내 자식처럼, 내 자식보다 더 정성스럽게 키웠다. 그런데 이제 전하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 전하께서 승하하시면 난 궐을 나가야 하고. 그러니 나 대신 우리 아기씨를 지킬 이를 심어 놓고 싶지 않겠느냐?”

결국 사랑하는 방식은 부족했고 신빈에 맞서 권력을 더 가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여도 결국 우리 홍위를 아끼고 사랑한단 말씀이었다. 그 진심을 이미 역사 속 죽음으로 입증하셨으니.

양 귀인은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동지였다.

윤서는 자세를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렸다.

“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마마님. 그러나 오늘 저는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궐은 진심 어린 마음을 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요. 아기씨를 지키기 위해 저를 키우려 하시는 것은 어느 편이 마마님께 유리할까 하는 계산이 아니라 아기씨를 향한 마마님의 애정 깊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 또한 저하와 아기씨, 군주 자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겠습니다.”

“하!”

양 귀인은 이 살벌한 궐에서 감히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겠다는 나인을 괘씸하단 듯 노려보았다.

“······.”

그런데 생각해 보니, 권가의 말도 맞았다.

자신도 결국 원손 아기씨를 자식처럼 사랑해 지키고 싶은 마음에 이러는 것이지.

그래서 양 귀인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자빈이 명문가에서 간택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그래야 한미한 가문의 승은 후궁인 네게 기회가 갈 것이야.”

“···왜 그들이 이제 와 세자빈을 노리는 것이지요? 우리 홍위가 이토록 건재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건재할 것인데.”

“세자 저하께서 여러 가지 개혁을 펼치실 거란 소문이 자자해. 그래서 대비를 하려는 게지.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계속 제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명심하거라. 가진 자들이 더 치열하게 대비하고 치밀하게 움직인다는 걸.”

“···결국 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더 큰 권력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의 일환이라는 말이로군요.”

후궁의 세계도 결국 정치권력 세계의 일환이라는 말이었다.

주로 지식 이론으로만 권력욕과 권력 의지를 접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권력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때라는 걸, 윤서는 직감했다.

[항상 선하게 살려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되,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괴물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게 되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될지니.]

라고 말한 니체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홍위를 해치려 하는 후궁과 기꺼이 맞서 싸우되, 그들처럼 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권력에 취해 그들처럼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윤서가 공손히 인사하고 양화당 뜰에 내려섰을 때, 한남군의 부인이 뒤따라 나왔다.

“내 막냇동생이 승휘로 있는 건 알지? 작년에 들어온.”

“···예. 들었습니다.”

“그 애 나이가 고작 이제 열여섯 살이야. 너무 어려서 그런지 세자 저하께선 한 번도 찾지 않으셨고. 그리고 다른 후궁들은 다 홍씨와 인척 관계거나 가문끼리 정치적인 입장이 같거나 하거든. 그래서 내 동생만 혼자 겉돌면서 매일 운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자네가 좀.”

어린 동생이 궐에 들어와 사랑도 못 받고 후궁들 사이에 왕따를 당하니 돌봐달란 부탁이었다.

“예, 제가 챙기겠습니다.”

어떻게 돌봐달라는 것인지 아직 감을 못 했지만 일단 약속했다.

이향이 말한 것처럼 이제 윤서도 원래 역사와 지금 현재를 면밀하게 구분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기로 했다.

‘원 역사에서는 새로 세자빈을 뽑지 않은 채 흘렀는데 여기에서는 명문가에서 먼저 세자빈을 넣으려고 하고 있지. 내 존재가 만드는 나비효과다.’

그럼 이향의 말처럼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짚어보며 채 동궁으로 돌아왔더니, 최가 나인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서온돌에서 쏙 나왔다.

“아기씨가 오늘 중궁전에서 주무신대. 그래서 갈아입으실 옷 챙겨가려고.”

한동안 깍듯하게 상궁 대접을 하며 존댓말을 했던 최가 나인은 윤서가 도로 나인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다시 스스럼없이 동료로 대했다.

궐은 이토록이나 철저하게 계급적인 곳이었다.

“같이 가자. 나 정 승휘 마마님 거처에 가기 전에 아기씨 좀 보고 가려고.”

“으이구. 아기씨는 이제 권가 너 없이도 잘 주무실 수 있어. 아까도 얼마나 짓궂게 영응 대군이랑 담양군, 도원군이랑 잘 노셨는데.”

마음 편하게 후궁들을 상대하라고 그냥 하는 말일 수 있지만 윤서는 최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홍위를 보면 이 복잡한 후궁 노릇 안 하겠다고, 그냥 보모상궁으로 살겠다고 다시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럴 순 없다. 여덟 살 평창 군주도 강제로 조숙하게 되도록 위기감을 느끼는데.’

윤서는 최가 나인만 홍위에게 보낸 후 매금이를 찾았다.

“정 승휘 거처에 가는데, 넌 뜰에 서 있기만 해. 정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부를 테니까 들어와서,”

“죽여?”

“아니! 절대 죽이면 안 돼! 그냥 나를 빼내는 정도로만.”

“······.”

뭔 그런 어려운 부탁을 하냐는 듯 힝 코웃음을 치면서도 매금이는 묵묵히 따라왔다. 그러다 문득 후궁의 전각들이 모여 있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윤서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 박가?”

박 상궁을 데려가란 말이었다.

“아니야. 이제부턴 내가 해결해야 해. 후궁은 상궁보다 품계가 높아서 박 상궁 마마님이나 엄 상전 나리도 도와줄 수 없어.”

이향마저도 도와줄 수 없는 장소가 후궁의 거처였다.

‘하아! 정말로 이런 싸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권력 투쟁이라고 해도, 표면적으로는 이향을 두고 싸우는 싸움이다.

윤서는 손을 교차해 양 어깨를 토닥이며 크게 심호흡을 일곱 번 하며 양 귀인에게 들은 정보를 다시 복기했다.

정 승휘의 가문은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 가문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고,

홍 상궁은 윤씨의 종조카이고, 그리고 민 승휘는 홍 상궁의 종조카로 연결되어 있다.

유 승휘는 가문도 스스로도 존재감이 거의 없고, 권 승휘는 승은 못 받는 어린 왕따이고,

사칙 양씨는 이향을 오래 모신 궁녀로 다섯 살 된 현주를 하나 두었고, 사칙 장씨는 오래 모셨어도 아이를 회임하지 못한다.

‘이들 모두는 다 이향이 나를 만나기 전 생긴 인연이다.’

윤서는 눈을 뜨고 문 안으로, 사랑과 함께 권력 투쟁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로,

걸음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뎠다.

< 제 60화. 이향의 후궁들 (1) / 심리 수정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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