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7화. 홍위의 세책례와 궁중 연회 (1) >
붉은 비단 띠를 홍위 허리에 매어주며 윤서는 또 속삭였다.
“생각 안 나면 그냥 안 난다고 하셔도 돼요. 아기씨가 정말 열심히 하신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휴우,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께서도 모두 아시니까요. 크흠크흠.”
목소리가 자꾸 떨려서 윤서는 부러 큼큼거렸다.
그러자 홍위가 윤서에게 폭 안기며,
“떠는 거는 거가 나잉이야.”
하고 놀렸다.
내심 긴장한 윤서와 달리 홍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발랄하고 활기찼다.
고작 세 살인데, 세종 대왕의 손주는 달라도 다르구나. 윤서는 새삼 감탄했다.
세책례가 열리는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자선당 대청마루를 내려서는데 마침 이향이 평창 군주의 손을 잡고 홍위를 데리러 왔다.
이향은 “아밤마마” 활기차게 부르는 아들과 새하얗게 질린 윤서를 보았다.
“심호흡 하고, 권윤서. 우리 중에 어째 네가 가장 긴장한 것 같다.”
이향이 윤서를 놀리자 며칠 사이 한층 얼굴이 밝아졌지만 여전히 표정은 도도한 평창 군주가 힐끗 윤서를 살피고는 홍위의 왼손을 잡았다.
홍위는 각각 윤서와 누나의 손을 잡고, 뒤로는 듬직하게 아바마마 이향을 세우고 동궁전의 내관과 상궁, 궁인을 이끌고 세책례 장소로 향했다.
세책례는 정전인 근정전에서 열린다.
사분합문을 모두 들어 올려 사방을 훤히 틔운 근정전에서 가장 상석인 북쪽 어좌에는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께서, 그 아래 상석에는 세자 저하가, 그리고 그 밑으로 지도 스승인 성삼문이 앉고, 남성 종친과 정승, 판서 등은 동편에, 여성 종친과 내명부 여인들은 서편에 나눠 앉는다고 하였다.
윤서는 엄 상전과 박 상궁과 함께 대전 내관이 서 있는 어좌 옆 구석에 서 있게 된다.
홍위는 맨 가운데에 홀로 서서 배강(천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외우는 것)을 하고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세책례가 끝나면 여인들은 중전마마의 교태전 앞에서, 남성들은 편전인 사정전으로 옮겨 연회를 즐길 예정이다.
근정전 앞 월대에 올랐을 때 안에 가득 든 사람들을 본 홍위가 비로소 흠칫 놀라더니 윤서와 평창 군주의 손을 뿌리쳤다.
“아기씨?”
너무 떨리시는 것인가.
윤서가 걱정스럽게 홍위를 부르자, 홍위는 윤서와 평창 군주와 이향을 차례로 올려다보더니 어깨를 쭉 폈다.
“호자 드어가 꺼야.”
(혼자 들어갈 거야.)
그렇게 홍위는 모두를 뿌리치고 혼자 짧은 다리로 높은 문턱을 타고 넘어 정전 중앙에 마련된 방석 위에 섰다.
이향은 평창 군주를 안아 문턱을 넘고 세자의 자리에 가서 앉았고, 평창 군주는 정의 공주 옆에 가서 앉았다.
윤서는 엄 상전과 박 상궁과 함께 대전 내관 옆으로 가서 섰다.
윤서가 깊은 숨으로 떨리는 호흡을 내뱉는데, 내시부 수장 상선 내관이 우렁우렁 외쳤다.
“원손 아기씨의 세책례를 시작합니다. 원손 아기씨, 스승께 인사를 올리십시오.”
홍위가 두 손을 모아 스승 성삼문에게 절을 올렸다.
상선 내관이 마침내 외쳤다.
“원손 아기씨는 배강(背講)을 시작하시지요.”
사방이 고요해져 들리는 건 숨소리뿐이었다.
윤서는 너무도 작은 몸으로 두 발을 단단히 딛고 몸을 꼿꼿하게 바른 자세로 세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배에 모은 홍위를 숨도 제대로 쉬지 않으며 바라보았다.
“쳔지형황 우쭈홍황, 하느 천! 땅 지! 검으 현! 누눌 황! 집 우! 집 쭈! 너블 홍! 거치 황! 하느는 검꼬 땅은 누드며 우쭈는 넙고 거치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칠다.)
정확한 발음을 내기 위해 각 글자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홍위가 암송을 시작했다.
신하와 종친, 시위를 서는 금군들까지 하면 백 명 가까이 되는 어른들의 시선을 홀로 받으면서도 홍위는 조금의 떨림을 보이지 않았다.
“꾸고심논 산녀소요, 구하 꾸! 옛 고! 차쯔 찜! 의논한 논! 흐터딜 산! 스, 생각할 녀! 노닐 또! 거닌 요! 옛것과 생각으 나누었젼 자취을 찾고, 걱정으 흩어 버이고 한가, 한가노이 노인다.”
(구고심론 산려소요 (求古尋論 散慮逍遙), 구할 구! 옛 고! 찾을 심! 의논할 론! 흩어질 산! 스, 생각할 려! 노닐 소! 거닐 요! 옛것과 생각을 나누었던 자취를 찾고, 걱정을 흩어 버리고 한가, 한가로이 노닌다.)
암송을 시작한 지더 벌써 이 각(30분)이 훌쩍 넘은 시간, 중반이 넘어가자 발음에 신경 쓰느라 각 단어에 힘을 주다 지쳤는지 조금씩 발음이 심하게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위는 암송을 멈추더니 크게 숨을 몰아쉬며 근정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홍위를 바라보며 속으로 천자문을 따라 외우고 있던 윤서는 홍위의 눈길을 받자 심장이 쿵 가라앉았다.
홍위는 윤서를 보고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 소리 내어 말했다.
“거가 나잉야, 목 말라.”
“하아!”
윤서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입 안의 살을 씹어 참았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홍위도 저리 작은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데 어른이 되어 눈물 따위를 보일 수 없다!
윤서는 눈을 몇 번 깜빡여 눈물을 감추고 홍위 앞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이제껏 조용하던 정전 안에 작은 속삭임이 일기 시작했다.
“저게 그 우리 원손 아기씨를 목숨처럼 위한다는 나인? 어려 보이는데?”
“저리 새초롬한 인상인데 방중술이 빼어나 세자 저하께서 정신을 못 차리신다고 하는 소문이.”
“쉿! 불경한 말씀! 주상 전하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이건 주로 대군과 군의 부인인 외명부의 여인들끼리 속삭이는 말이었다.
동쪽의 종친과 신료들은 여색에 극도로 무심해 조정의 근심이었던 세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 전하와 천추전에서 독대하며 내시부 최고 권력자 전균을 맞아 죽게 만들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의 주인공이 의외로 앳된 외모에 서늘한 미인임에 놀라고 있었다.
코끝을 붉게 물들인 보모상궁이 소리 없이 근정전 한가운데로 나와 원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원손 앞에 높인 소반에서 청자기 주전자를 들어 자기 잔에 물을 따른 후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올렸다.
윤서는 물잔을 올리며 고개를 들어 홍위를 살폈다.
정말로 목이 많이 말랐는지 급하게 잔을 비우는 홍위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 음력 6월 10일, 얇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고운 비단으로 지었다고는 하나 바지저고리에 긴 도포, 그 위에 쾌자까지 덧입고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대여섯 살 꼬마라 해도 긴장해 울음을 터트릴 상황인데, 우리 홍위는 이렇게 의젓하고 당당하게.’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복받쳐 다시 목이 메이려는 걸, 윤서는 깊은 심호흡으로 다스리며 홍위의 눈을 바라보았다.
비운 잔을 도로 건네며 홍위도 윤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숨기고 잘게 흔들리는 홍위의 눈동자를 보며 윤서는 살짝 입꼬리를 들며 조금, 아주 조금 홍위만 볼 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애쓰지 말고, 홍위야. 나랑 하던 대로. 발음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홍위는 아직 아기인데,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응, 거가 나잉야. 나, 자 하고 있쪄. 자 하 꺼야.’
무언의 격려와 안심이 둘을 마법처럼 감쌌다가 각자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홍위는 나머지 분량도 침착하게 다시 외워갈 힘을, 윤서는 홍위를 믿고 차분하게 지켜볼 힘을 얻었다.
“······!”
“······!”
“······!”
아직 만 두 돌이 되지 않은 세 살짜리 어린 원손과, 마찬가지로 열여덟 아직 앳된 외모의 상궁이 서로에게 눈을 맞춘 채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얻는 광경은 근정전에 든 모든 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으흠, 근정전을 세책례 장소로 정한 보람이 있군. 홍위가 저리 비범한 왕재를 선보이니, 권가가 지은 <육아보감>을 통해 새 문자를 보급하기도 아주 좋겠고.’
세종께선 희미한 시야로도 무조건적 지지와 애정을 주는 권가의 양육방식이 평소엔 발랄하고 유쾌하고 필요할 땐 침착하고 당당하기까지한 손주를 만든다는 것을 확인하며 더 큰 결과를 기대하셨다.
‘우리 홍위가 저리 영특하고 대범하니 촛대 부러진 일을 더 거론하는 것들은 없겠지. 우리 평창 군주도 차차 마음을 열어가고. 아, 이제 동궁에 어엿한 안주인만 있으면 되겠구나.’
소헌 왕후께선 이제 처복 없기도 유명한 이향에게 어엿한 세자빈만 찾아주면 될 것이라 안도하였다.
‘우리 윤서가 무슨 표정일지, 그 표정을 보는 우리 홍위가 어떤 마음일지 나는 잘 안다.’
이향은 등만 보아도 윤서가 어떤 표정으로 홍위를 올려다보고 있을지 훤히 그리며 자신이 몹시 사랑하는 윤서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이제 아비와 왕실의 자랑으로 자라난 어린 아들에게서 가슴이 뻐근하도록 진한 감동을 느꼈다.
“왕통이 저리 튼실하고 비범하게 이어지니 이제 난 마음 놓고 은퇴해도 되겠어요.”
영의정 황희는 옆에 있는 좌의정 신개에게 벅차게 속삭였고,
“그런 말씀 마세요, 영상 대감. 내년에 세손 책봉되시면 아마 세손 각하 보필하라 하실 것이에요. 참으로 보필할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개는 황보인, 김종서 등의 신하에게 주름 가득 웃어보이며 속삭였다.
이 자리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모두 원손이 저리 총명하시고 당당하시니 이제 금상 전하와 세자 저하의 성덕이 원손에게까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러나 계양군의 장인이자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과 막내딸 혼담을 주고받고 있는 한확만은 수려한 얼굴에 한가닥 싸늘한 냉기를 담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원손과 그 앞의 상궁을 주시했다.
종친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하, 형님은 나한테 그리 여색을 밝히지 말라 하시더니, 저 봐라 저 봐. 본인은 거의 끝판왕이 아니냐? 웃지 않을 땐 서늘하고 총명하고, 웃으면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인으로 변모하는.”
이 말을 옆자리 광평 대군에게 속삭이다가 “형님은 참 불경하시오.” 한 소리 들은 건 조선 제일 풍류남 안평 대군이었다.
세자를 따르는 동생들은 당당하게 변한 원손 조카의 자태에 기뻐하고 처복 없던 세자 형님께 저리 미인인 여인이 생겨 정말로 다행이라고, 서로들 기쁘게 쿡쿡거렸다.
그러나 수양 대군과, 수양 대군을 따르는 임영 대군, 그리고 신빈 김씨의 계양군을 비롯한 왕자들은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그려낸 채 고요히 침묵했다.
‘형님께서 오래 용상에 있지 못하고, 저 조카는 단명한다는 예언이 현실화 되려면 저 앳된 상궁부터 처리해야 한다.’
주눅 들어 있던 세 살배기가 저리 비범하게 변한 데에 일등 공신이 저 상궁이니, 저 상궁을 없애면 세자도 원손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니.
이날 수양 대군, 그리고 그와 정치, 경제적 이익을 함께 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내심 내린 결론이었다.
윤서가 다시 어좌 옆자리로 돌아온 후 홍위는 차분하게 배강을 이어가, 마침내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를 외웠다.
“이어조자 언재오야, 이는 위! 맛쯤 어! 도웃 조! 놈 자! 어찌 언! 어조자 재! 어조자 호! 이끼 야! 어조자라 잇커는 것은 ‘언!, 재!, 호! 야!’ 이다.”
(위어조자 언재호야 (謂語助者 焉哉乎也), 이를 위! 말씀 어! 도울 조! 놈 자! 어찌 언! 어조사 재! 어조사 호! 잇기 야! 어조사라 일컫는 것은 ‘언! 재! 호! 야!’ 이다.)
마침내 반 시진하고 일각 (1시간 15분) 동안 이어진 배강이 끝이 났다.
홍위는 마지막 “이다!”를 외친 후 곧바로 어좌 위 세종을 바라보며 고했다.
“할바마아, 다이가 아파서 소존 앉겠쯥니다!”
외치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시 암송을 재개했던 이후 처음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홍위의 눈부신 성장을 개화를 눈물로 지켜보던 윤서는 온 얼굴로 환하게 홍위에게 웃음을 보냈다.
‘잘했어요, 아기씨. 정말로, 잘했어요.’
와아!
한 박자 늦게 근정전에서는 환호와 찬탄의 박수가 울려 퍼졌다.
작은 몸으로 끝까지 침착하게 천자문을 다 외운 후 당당하게 다리 아픔을 고하며 앉을 수 있는 용기와 담력까지.
보위를 탐내는 이들조차 원손이 비범한 왕재(王才)를 지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권 상궁은 가서 우리 원손에게 물을 따라주거라.”
어좌 위 세종께서 명하셨다.
윤서는 아까부터 끅끅 같이 울고 있던 박 상궁이 건넨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홍위에게 다가갔다.
“우리 원손 홍위가 이리 장하오. 홍위야, 오늘 정말로 잘했다.”
세종께서 칭찬하시자 좌중 모두 임금을 향해 엎드리며 외쳤다.
“우리 조선의 홍복이자 만백성의 기쁨이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주상 전하, 세자 저하!”
“천세, 천세, 천천세!”
어지러이 환호하는 무리 속에서 홍위는 물을 먹여 주는 윤서에게 작은 몸을 기대고 속삭였다.
“땀 났쪄. 옷 갈아입고 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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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에서의 세책례가 끝난 후, 홍위는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 이향과 함께 사정전으로 갔다.
윤서도 세수하고 박 상궁과 함께 교태전 앞 차일이 늘여진 연회장으로 갔다.
화려하게 성장한 내명부 왕과 세자의 후궁, 그리고 외명부 종친의 부인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옆자리와 담소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서가 끄트머리 상궁 자리로 다가가는데, 중전마마 곁에 앉아 있던 평창 군주가 계단을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유모 백씨와 함께였다.
윤서 앞에 선 평창 군주가 그 싸늘한 표정으로 “합을 잘 맞춰야 할 거다!” 속삭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평창 군주가 윤서의 뺨을 매섭게 올려 치며 소리쳤다.
< 제 57화. 홍위의 세책례와 궁중 연회 (1)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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