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56화 (56/255)

< 제 56화. 중전마마의 자애로운 웃음 뒤 >

홍위의 세책례 날이 다가왔다.

책을 한 권 다 외우고 완벽하게 익힌 기념으로 여는 세책례는 원래 주상 전하 내외분과 세자 저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의 주요 인사 정도 참석하여야 했다.

그렇지만 이번 원손 홍위의 세책례는 지난 날 세자 이향의 세책례보다도 더욱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세자 이향이 처복이 없고 원손 홍위의 출생 징조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을 평소 마음 한쪽에 걸려하셨던 중전마마께서 이번 기회에 명석하고 총명한 홍위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앞으로 동궁에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 선언하고 싶어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뭄 때문에 열지 못했던 5월 단오 궁중 연회를 세책례 후 연회로 대체하겠다고 공표하시며 왕실의 종친에게 초대장을 보내셨다.

이에 따라 지방에 있는 양녕 대군을 제외한 전하의 형제들, 그리고 세자의 형제들과 그의 가족들, 정의 공주와 그의 가족, 정현 옹주와 그의 가족 등 왕실의 직계와 방계가 모두 참여하고, 신하들로는 집현전의 학사들과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가 세책례에 참석할 예정이라 하였다.

홍위의 양육을 책임진 윤서로서는 생각이 많아졌다.

유아기의 배움과 경험이 일평생의 정신 건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고, 하루 세 번이나 여러 스승에 의해 엄격하게 진행되는 유학 경전 중심의 왕실 조기 교육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천추전에서 세종과 이향의 격의 없되 치열한 토론을 보고 난 후 윤서는 최고의 천재 세종은 정작 왕실의 엄격한 세자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마침 저녁에 이 각 (삼십 분) 정도씩 이향에게서 중국의 역대 군주의 행적을 다룬 사기의 본기 내용을 듣고 있어서 더 깊게 생각할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책례를 하루 앞둔 저녁, 비현각에서 삼황오제 편을 다 듣고난 후 윤서가 이향에게 물었다.

“저하, 내년에 홍위가 세손이 되면 정식으로 강서원이 차려지고 교수진이 꾸려지겠지요?”

“응, 그래야지. 조선 건국 이래 첫 세손 교육이라 세심하게 준비할 거다.”

“그럼 저하. 그 교육 내용이 주상 전하나 저하 어릴 때 받으신 것처럼 다양한 과목을 포함하게 하시고, 또 매 단계마다 스승의 평가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응?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거라.”

비현각에서 서로 가르침을 주거나 받을 때 이향은 늘 앉는 업무용 책상에 앉고, 윤서는 회의용 탁상에 앉아 거리를 엄격하게 유지했다.

가까이 앉아 있으면 서로 몸을 더듬게 되고 결국 공과 사가 어지럽게 뒤얽히게 되고 마는 걸 윤서가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윤서는 부러 의자에서 일어나 이향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향의 무릎에 앉아 목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제가 장차 조선을 이끌 우리 홍위의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왜 당신께 이리 교태를 부리는 것일까요?”

이향은 즐거운 듯 윤서를 끌어안았다.

“베갯머리 송사인 것이냐?”

“예, 저하. 저하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저도 뭔가를 관철해야 할 때 이렇게 적극적으로 제게 유리한 수를 쓰는 것처럼, 장차 홍위를 가르칠 스승도, 그들이 아무리 충성스러운 신하라 할지라도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수를 쓸 거란 걸 보여드리기 위해서예요.”

“···으흠?”

신하들이 쓰는 수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향이지만, 윤서가 먼저 이렇게 유혹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지라 이향은 그저 놀라는 척 능청스럽게 윤서의 말을 들었다.

윤서는 이향에게 세종께서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세자가 아닌 대군 신분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자유롭게 익혔고 그 과정에서 책 하나를 통달할 때마다 지금 홍위가 치를 책례처럼 엄격한 평가를 받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저하께서 이리 다방면에 출중하신 것도 세자 시강원에서 배워서만이 아니라 엊그제 천추전의 토론에서처럼 전하께 직접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또 직접 실제 현장에 적용해봐서가 아닙니까?”

“···그렇다.”

윤서가 하고자 하는 말의 맥락을 이향은 단숨에 파악했다.

“홍위의 교육을 집현전의 인재들이나 학문적으로 빼어난 신하들에게만 맡겨두지 말라는 것이냐? 그들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 때문에?”

“예, 저하.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제가 저하께 이렇게 아양을 부려 저하의 관심을 끌며 홍위의 교육 과정에 개입하려는 건, 홍위의 나라가 전하와 저하의 나라만큼 위대해야 제가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저하, 마찬가지로 신하는 신하의 한계 내에서 군주를 가르칠 수밖에 없어요.”

“···으흠.”

“그리고 매번 평가 위주로 배움을 시행하면 배움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지요. 특히 그것이 성인군자의 덕이란 추상적인 잣대로 평가하고 요구할 땐 더욱 그러합니다.”

“이번 세책례처럼 평가를 하는 것이 오히려 배움의 의지를 꺾는단 말이냐?”

“예, 저하. 후대에 가면 저하, 신하들이 자기들도 실천하지 못하는 유교적 덕성을 세자와 임금께 하루 세 번씩 강요하며 군주를 손에 쥐고 흔들려 하였습니다. 법치가 미비한 신분제 국가에서 왕권이 흔들리면 힘 있는 자들이 겉으로는 군자인 척하면서 뒤로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 다 해 처먹는 위선적인 국가만 됩니다.”

“어허, 윤서야.”

윤서의 과격한 주장에 중세 조선의 성리학적 애민 군주 이향이 흠칫했다.

윤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진하게 입맞춤을 한 후 다시 속삭였다.

“저하, 정신이 혼미해 지지요? 저도 이러한 수를 씁니다.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어요. 제가, 우리가 아무리 무얼 한다고 해도 미래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리라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윤서는 이제 이향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제가 이렇게 한 가닥 불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제 영혼이 진성(鎭星)이 빛날 때 여기에 왔기 때문이에요. 태양과 달리 별빛은 시시때때로 변하니 저의 운명도 함께 변할까, 그리하여 우리 홍위의 운명도, 저하의 운명도 변할까 두려워 그러는 것이에요.”

윤서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대신 일부만 이야기했다.

미래에서 온 영혼이란 사실까지 다 밝히던 종전과 달리 적절한 선까지만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일을 겪고 세종과 중전마마를 몇 번 뵈면서 현대와 여기 15세기의 궁궐에서의 남녀 관계가 달라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군주에게 필요한 여인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며 육체적인 기쁨을 주로 주면서도 요행히 살아남는 종류의 미인이든지, 아니면 매사 든든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심신의 동반자 같은 여인이든지 해야 했다.

백치 미인이 되기에는 미모가 부족하고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윤서는 그래서 이향이 미처 신경 쓰기 어려운 부분을 적극적으로 짊어지는 파트너 같은 여인이 되기로 포지션을 정했다.

이를테면 방금 전 말한 진성(鎭星)에 대해서는 더 많은 뒤의 이야기가 있었다.

지난번 천추전에서 진성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전하께서 관상감에 물어보시고 고문헌을 참조한다고 하셨던 것이 못내 걸려 윤서는 다음날 엄 상전에게 별의 움직임에 대해 잘 아는 분을 물었었다.

“별의 움직임은 수학과 천문에 밝으신 이순지 영감이 최고인데. 왜 그러는가?”

“그럼 그분께 진성이 예외적으로 밝게 빛나는 것의 의미를 좀 물어 알아봐 주세요.”

그날 저녁 엄 상전이 듣고 전해준 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 영감의 말씀에 따르면 진성은 예로부터 왕자와 왕후를 상징한다네. 진성이 밝게 빛나고 한 자리에 머물면 왕후에게 복이 생기고 왕후로 인해 왕자가 더 강건해지고 영토도 늘어나고, 만약 진성이 어두워지고 떠나면 왕후가 박복해지고 덩달아 왕자도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하셨네.”

“그럼 요새 진성은 계속 밝다고 하시던가요?”

“그건 세성, 형혹성, 태백성, 진성(辰星), 진성(鎭星) 등 오성(五星)이 있는데, 나머지 별들과 함께 움직이는 징조를 보아야지 하나의 별로만 가지고는 읽어낼 수 없다고 하셨네.”

21세기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윤서에게 별이 어쩌고 하는 언급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허황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진성이 빛나는 날 홍위를 지키라는 절규와 함께 가락지 하나를 매개로 조선에 오게 된 윤서에게 진성만큼은 무관심할 수 없는 별이었다.

더구나 이향 곁에 머물겠다는 결심에 우물에 던져버리려 할 때 손가락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아 결국 그 가락지를 다시 반닫이 장 깊숙한 곳에 넣어둔 일까지 있었던 경우에는.

윤서는 결국 가락지의 일을 이향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떠날까 내심 두려워하는 이향에게 더 염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징조 같아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윤서는 홀로 다짐했다.

‘방심하지 말아야 해. 매사 모든 일이 다 일어날 수 있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매사에 다 대비하고, 홍위도 그에 맞게 대비시켜야 한다.’

세종께선 세종의 일을 하시고, 이향은 세자의 일을 하시고, 윤서는 윤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하늘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명의 흐름을 의지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이것이 윤서가 신하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유교식 제왕 교육을 홍위가 받게 하지 않으려는 이유이고,

그리고 근심을 절반만 털어놓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매사 책임질 것이 많은 이향에게 불확실한 일로 불안감과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윤서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향에게 청했다.

“그러니 저하, 우리 홍위가 고루한 유학적 가르침과 여러 스승의 엄격한 평가에 매몰되지 않도록, 그리고 세책례에서 너무 가혹한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강건한 군주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저하께서 전하께 받으신 교육 방식대로 직접 홍위의 교육을 챙겨주세요.”

좀처럼 먼저 유혹하지 않는 윤서가 베갯머리 송사를 시연한 후, 다시 돌아가 진지하게 홍위의 교육을 말하자 이향은 윤서가 끝내 말하지 않는 불안을 알아차렸다.

“알겠다. 홍위 교육은 아바마마와 내가 배우고 익힌 방식을 기초로 세심하게 정하겠다. 지금처럼 즐겁고 씩씩하게, 총명하게 클 수 있도록 늘 살필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그리고, 윤서야.”

이향은 여전히 자신보다 홍위를 더 많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위하는 윤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홀로만 간직하고 있던 염려를 털어놓았다.

“홍위가 잘 크고 있으니 너도 네 불안을 내려놓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홍위가 세손으로 정식으로 책봉되면 너는 보모상궁 자격으로 홍위 옆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저하!”

“상궁은 후궁이, 빈이 될 수 없어. 그게 아바마마께서 정하신 법도니라.”

“그, 그게?”

아무도 그런 말을 윤서에게 해주지 않았다.

윤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듯했다.

“지금은 홍위가 책봉 전이고 너도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아 중전마마께서 밖에서 너 대접받으라고 편의상 상궁 직위를 내렸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게 이미 어머마마께 말씀드려 두었고. 그러나 내년부터는 다르다, 윤서야. 네가 내 여인이 되려면 달라져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저하.”

기계적으로 답을 올리며, 윤서는 중전마마의 자애로운 웃음 뒤에 과연 무슨 계산이 들어 있었는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그리고 또 그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 결국 자신의 부탁이었다는 사실도 아프게 떠올렸다.

******

드디어 세책례 날이 밝았다.

오늘 홍위가 보여주는 모습이 윤서가 제시하고 정의 공주가 함께 공저한 <육아보감>의 근거가 될 것이기에 특히 세종께서 기대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중전마마께 들었던 윤서는 정말로 긴장되었다.

수능 보러 갈 때보다 더 긴장되어서 전순의에게서 특별히 얻은 청심환을 두 알이나 먹었다.

“아기씨, 제가 구석에 서 있을 것이니까 떨리면 저를 보시고.”

윤서는 이날을 위해 상의원에서 특별히 만든 금박 자수가 어여쁜 복건을 머리 위에 씌우고 흑청색의 쾌자를 홍위에게 입히며 당부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 제 56화. 중전마마의 자애로운 웃음 뒤 > 끝

ⓒ 윤인수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