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5화. 윤서의 불안 >
이향은 호랑이 머리를 넣어 기우제를 지내는 침호두(沈虎頭) 대신 기이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윤서에게 한강을 헤엄치게 하였더니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고 비가 내렸다는 말을 고하면서,
“윤서가 가진 지식이 장차 조선을 밝힐 양(陽)이라서 한강의 용신이 반응한 것일까요? 지식에도 음양의 속성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하고 윤서에게는 낯선 질문을 했다.
그러자 세종께서는 잠시 고심하시더니,
“우주 만상이 음양의 원리로 움직이니 지식 자체도 음양에 따라 움직인다고 볼 수 있겠지. 백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고 덕치를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지식은 양이라고 하고,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특한 지식을 음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세종과 이향은 갑자기 지식의 종류를 음양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어떤 지식이 양에서 음으로, 또 음에서 양으로 변화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무슨 요인으로 변질되는지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붓까지 들어 주역(周易)의 여러 괘를 그리면서 어떤 지식이 정(正)인 양의 자리를 차지하는지, 또 어제까지 흉이었던 지식이 어떤 지점에서 무슨 효를 얻어 길인 정(正)의 자리로 변모할 수 있는지 격의 없이 치열하게 토론하였다.
두 부자가 나누는 대화에는 친밀함과 신뢰가 가득하였다.
그러자 문득 윤서는 왜 조선 최고의 성군이시고, 뒤이어 성군이 될 자질이 충분했던 저 두 사람이 수양 대군의 야망을 끝내 견제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의 역사상 중전에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어 왕이 된 임금은 고작 일곱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 오래도록 살아 왕다운 치세를 펼친 이는 열세 살에 즉위한 숙종뿐인데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신하들이 왕의 변덕에 죽어 나갔는지야 말할 것도 없다.
열아홉 살에 즉위한 연산군은 폭군으로 끝을 맺었고, 나머지 단종, 인종은 아주 짧은 치세만 이뤘고 순종은 망국의 황제였다.
강력한 절대 권력자의 밑에서 오랫동안 이인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유교 국가에서 세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란 유교적 이상을 끊임없이 주입받고 실천하길 요구당하며, 위로는 권력을 나눠주길 본능적으로 꺼리는 임금, 아래로는 자신들도 실천하지 못하는 바름을 끝없이 요구하는 신하들의 평가에 매일 노출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이 오래도록 지속되어 생겨난 비극의 정점이 아비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 세자이고, 그와 대조적으로 그러한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화롭게 부자지간의 정과, 임금과 세자로서의 협치를 이뤄낸 이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향은 일곱 살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올해 스물아홉, 벌써 이십삼 년째 이인자로 살고 있다. 그리 오래도록 매사 삼가야 하는 세자 노릇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또한 아버지에게 완벽하게 효자인 것이 가능한가.’
그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 장남이 저렇게 옆에 있었으니 세종께서는 수양 대군을 불안해하면서도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신 거다.
그래서 이향이 더욱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론적인 것과 별개로 윤서가 가진 수영 능력은 수륙군에게 전수하게 하는 편이 이롭겠습니다, 아바마마. 왜구뿐 아니라 두만강 이북의 야인 여진 무리 일부가 수전(水戰)에 능해 이를 대비할 수군을 키울 필요가 있고, 또 공물을 쌀로 거둬들일 때 육로 운반을 위해서는 강과 하천 위로 다리를 놓아야 하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갑자기 이향이 이제 윤서를 수영 강습에도 동원할 계책을 내어놓았다.
“여인의 몸으로 직접 수영을 가르치기는 곤란하니, 이미 수영을 잘하는 호위 내관들에게 윤서가 하는 영법을 보충하여 익히게 지도하고, 그들이 수륙군과 다리 건축 시 수중 작업 인력을 지도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음, 권가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종께서 갑자기 윤서에게 물으셨다.
이향이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하는 바를 마음껏 이야기하라는 듯 환히 웃어주었다.
수려한 애인이 저리 다정하게 웃으니, 없는 아이디어도 다 짜내어 내놓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전하, 제 생각도 세자 저하의 계책이 탁월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거기에 더해 전하와 저하, 그리고 다른 많은 고위 계층이 시달리는 종기 문제가 실은 땀을 내어 하는 운동이 부족하고, 고려 때와 달리 목욕을 즐기지 않는 생활 습관, 그리고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어야 하는 예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서가 또 종기를 이야기하자 이향이 씩 웃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종기에 대한 치료법과 예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모두 다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수영은 물속에서 떠다니기에 관절이 아파 걷기에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무리없이 하실 수 있는 운동이고, 또 목욕까지 함께 해결되고, 정신 건강에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 이참에 전하와 저하, 왕실의 모든 이들을 위한 수영장도 함께 건립해 이용하고 차차 민간에도 보급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 수영장이란 걸 어찌 지어야 하는지 안이 있느냐?”
세종께서 물으셔서 윤서는 주춤주춤 일어나 붓을 잡았다.
“여기 이렇게 땅을 판 다음에 물이 새지 않게 하려면 방수 재질이 있는 벽돌을 구워야 할 것이온데, 소인이 알기로는 석영 모래가 많이 들어가게 해서 진흙을 굽거나 아예 도자기 재질로 벽돌을 만들어서,”
“아 그럼, 아바마마. 여기 수영장 옆으로 물을 데울 수 있는 커다란 가마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데운 물이 수영장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면 추울 때도,”
“아니 그러면 좀 더 작게 만들면 아예 온천처럼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온천처럼 만들고, 전하. 그러고 보니 습식 건식 사우나란 것도 있습니다. 황토가 피부에 좋은데 전하와 중전마마를 위해서 황토방 사우나를 만들면,”
결국 셋이 머리를 맞대고 따스한 물까지 넣을 수 있는 수영장, 온천 좋아하시는 전하와 중전마마를 위한 목욕탕과 황토 찜질방의 개략적인 겉모습 설계를 끝냈다.
실제 구현해 내는 것은 측우기를 직접 만들 정도로 실용 과학에 조예가 깊은 세자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세종께서 결론을 내리셨을 때는 벌써 한 시진이 훌쩍 지난 다음이었다.
한숨 돌리며 각자 자리에 와서 앉자 기척도 없이 스르륵 천 상궁이 나타나 전하와 이향 앞에만 따스한 차와 달달한 다과를 놓아주었다.
역시, 조선은 신분제 사회로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 하고도 차는 왕과 세자만 마시는.
윤서가 속으로 웃는데.
"권가에게도 한 잔 주거라."
전하께서 명하셨다.
감격하여 정 자세를 하고 마른 목을 축이는데, 세종께서 갑자기 말씀하셨다.
“향아. 나는 섭섭하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예?”
“권가가 이렇게 신기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데 그간 너만 그걸 듣고 배우고 있었지 않았느냐?”
“아니, 아바마마. 윤서는 저의 여인인지라.”
“어허, 지식을 배우는데 여인이고 사내고가 무슨 관계야? 밤마다 비현각에서 너희가 무엇을 한다길래 그 연애란 것을 하나 했더니, 으흠. 안 되겠다. 이틀에 한 번은,”
“이틀에 한 번은 너무 많습니다. 사흘에 한 번.”
“아니 매일도 아닌데.”
“저도 윤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바마마.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두 분이서 일방적으로 윤서의 밤 일정을 채워 넣으셨다.
오늘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보니 윤서도 무척 즐거웠다.
지적인 자극도 되고, 사실 이제 못하나 싶었던 심리 관련 연구도 지속할 수 있고.
즐거운데.
이분들은 이 나라 주인이고, 윤서는 피고용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기여한 만큼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전하, 그럼 저도 보모상궁 수당에 지식 연구 수당을 더해 받고 싶습니다.”
돈이 많아야 일을 벌일 종잣돈이 모이고, 돈이 모여야 자본주의적 경제 운용의 탁월함을 실현할 수 있다!
윤서의 요구에 세종께서 이향을 보셨다.
“넌 권가한테 따로 수당을 안 주는 게냐? 아하, 이렇게 고지식해서는. 여봐라, 창의 밖에 있느냐?”
“예, 전하.”
“잠시 들어오너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전균의 후임으로 대전 내관이 되었고, 왕실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소의 전수(典需)를 겸직하고 있는 조창의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자는 제조상궁 조씨 라인이라고 했는데.’
제조 상궁 조씨는 죽은 전균과 밀접했고, 그러면 수양 대군 쪽의 사람이란 뜻이다.
윤서가 유심히 살피는데, 조창의는 아주 담백하고 신실한 얼굴로 전하를 향해, 그리고 이향과 윤서를 향해 차례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여기 권 상궁에게 상궁 월봉의 두 배를 매달 더 지급하고, 연구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어주고, 무창 쪽에서 얼마 전에 올라온 산삼이 있었지? 그걸 전순의한테 내주어서 세자와 우리 권 상궁 몸을 보하게 하거라.”
산삼!
오호, 산삼이라고요?
인삼이 있었구나!
이거 된다, 돈 된다!
박 상궁이랑 진짜 큰 돈 벌 기회 된다!
“···예, 전하.”
조 내관의 대답이 한 호흡 늦게 나왔다.
역시, 요주의 인물이로군.
조창의가 나가고 이향도 이만 동궁전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고하였다.
두 밤 자고 세 밤째 되는 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깊게 허리를 굽히고 나오는데 전하께서 또 갑자기 윤서를 부르셨다.
“권가야, 내일 미시까지 홍위 데리고 장악원으로 오너라. 우리 홍위가 부른 노래가 못 들어본 음계인데, 음계를 쓰는 폭이 훨씬 다양하더구나. 박연이 그 분야에 탁월하니 함께 듣고 채록하여 연주하게 해야겠다.”
“윤서야, 희아도 함께 데려가거라. 나는 음률은 잘 모르지만 홍위와 희아는 아바마마를 닮아 음률에 밝을 것이니.”
“예! 세자 저하!”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이 두 분, 정말 인재를 탈탈 부려 먹으시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으시다.
이렇게 세종과 이향 밑에서 몇 년만 일하면 정말 다방면에 엄청난 행정 능력을 갖춘 전문 신료로 거듭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세종 때의 명재상들은 다 이렇게 조련되었군.
이향의 손을 잡고 자선당에 돌아왔을 때 홍위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토실토실한 뺨을 한 채 잠들어 있는 홍위를 보는데, 윤서는 문득 아까 진성이 흔들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세종이 보이신 어두운 표정이 생각났다.
‘모친 원경 왕후께서 편치 않으실 때 세종께서는 재액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를 가마에 모시고 술사와 소수 시종 인원만 거느리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셨다는데. 그래서 때로 상왕인 태종께서도 세종과 대비께서 가 계신 곳을 몰라 모두 근심하셨다고 박 상궁이 말씀해 주었는데.’
그만큼 세종께서는 주역에 밝고 여러 가지 천문 징조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다.
‘왜 별이 흔들릴 때 일어난 기이한 현상 자체에만 신경을 쓰신 것일까.’
윤서는 세종께서 박 상궁 마마님처럼 다식에 들었던 독에 신경을 쓰시리라 짐작했는데, 관상감에 자문도 구하고 고문헌도 봐야 한다는 말에 더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날 데려온 현덕 왕후의 힘이 오로지 아들 홍위만 살리는 데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러자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진 만큼 불안은 시시각각 더 커져 맥동이 뛸 때마다 관자놀이에 지끈지끈 두통이 눈까지 아프게 했다.
윤서는 서둘러 동온돌로 건너갔다.
마침 이향은 내관의 도움을 받아 곤룡포를 벗고 있었다.
“저하, 오늘 목욕 시중을 제가 들겠어요.”
이날 윤서는 향나무로 만든 동궁의 목욕탕에서 등롱을 환히 밝히고 손에도 작은 유리 등롱 하나를 든 채 이향의 온몸을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으나 피부 속에서 곪기 시작한 종기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온몸을 쓸어도 보았다.
다행히 요새 아침에 윤서가 뛸 때 일 각 가량 함께 뛰고 활쏘기를 한 후 목욕을 해서인지 피부는 모두 다 깨끗하였다.
“다행이에요, 저하. 아무 것도 없이 깨끗해요. 앞으로도 종종 제가 종기가 나는지 살필 터이니, 저하께서도 조금만 이상하면 보여주셔야 해요.”
비로소 안심한 윤서가 긴장을 풀며 한숨 돌리는데, 이향이 몹시도 즐거운 듯 낮게 웃더니 윤서를 확 안아 욕탕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제, 부인, 차례입니다.”
< 제 55화. 윤서의 불안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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