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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54화 (54/255)

< 제 54화. 평창 군주와 홍위와 세종 (3) >

“그래서 네가 그렇게 내 아들 수양을 경계하는 것이냐?”

방금까지 봄날의 꽃밭처럼 따사롭던 천추전의 분위기가 단숨에 칼바람 부는 한겨울 대청봉처럼 변했다.

젠장.

윤서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윤서가 유를 경계하는 것은 홍위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너한테 묻지 않았다.”

눈을 감아 한층 예리해진 청각이 ‘아바마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권윤서는 제 여인’이라 선언하는 이향과, ‘네 여인이든 뭐든 내 아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고, 또 그 의심의 근거가 무엇인지 난 들어봐야겠다’ 고집하시는 세종의 속뜻을 잡아냈다.

‘혜민국에서 윤씨가 저지르려 했던 만행을 감춰주지 말았어야 할까?’

곱씹은 물음에 윤서는 ‘아니다’란 결론을 빠르게 내렸다.

그 일을 알렸더라면 세종은 오히려 크게 진노하셨을 것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백성을 지극히 아끼는 성군이 되시고자 하는 평생을 노력하신 세종의 신념 체계의 한 부분이다.

세상에도 없던 문자를 백성을 위해 만드실 정도의 그 강한 집념과 같은 맥락으로 일평생 추구해온 왕실의 화목, 천하의 개망나니 양녕 대군과 그의 아들까지도 한사코 품어온 무혈의 화목이 며느리 하나와 아직 며느리도 아닌 것에 의해 깨지는 걸 참으실 리가.

분란의 씨앗이 되는 윤서 하나를 제거해 덮으려 하실 것이다!

‘하지만 세자의 여자를 쉽게 죽이려 하시진 못하시는 것이 또한 정이 깊은 전하의 마음이실 것이니.’

만에 하나 죽이려 하신다면, 다 밝히면 된다.

미래에서 온 영혼이란 사실과, 역사서에 무엇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 다 밝힐 것이다.

그러면 괴력난신의 괴이한 존재라고 죽임을 당하게 되더라도 수양 대군은 제거하고 이향과 홍위는 지킬 수 있다!

빠르게 결론을 내며 윤서는 가만가만 티 안나게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셔 폐를 한껏 부풀렸다가 입으로 끝까지 숨을 뱉는 깊은 심호흡을 세 번 행한 다음, 눈을 떴다.

그리고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어앉았다.

“윤서야!”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이향은 윤서를 불렀고,

“······.”

세종께선 그저 묵묵히 그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운 시선으로 윤서가 하는 양태를 지켜보셨다.

“소인이 전하께 올리는 말씀은 심리 지식에 의거한 추론이지 제 사심으로 억지로 엮어낸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

“인간은 생존 본능만큼이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원손 아기씨께서 귀엽게 노래와 율동을 하시는 것은 스스로 즐겁고 흥겨워서도 있지만, 전하와 중전마마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평창 군주께서 원손 아기씨의 귀여운 춤에 웃지 못하셨던 것은 자신도 받고 싶은 어른들의 인정을 동생이 독점하였기 때문입니다.”

윤서는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을 기반으로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더 큰 상위의 욕구, 가족과 더 큰 무리 속에 속해 애정과 인정을 받고 싶고 나아가 타인의 존경을 받으며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고 설명드리고,

“수양 대군 자가께선 어릴 적 홀로 사가에 떨어져 계심으로써 이 세 번째 욕구, 가장 가까운 무리인 궐 안의 가족에게 속해 애정과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 욕구가 좌절되는 아픔을 겪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세자 저하와 대군 자가들께서 모두 출중하시니 이미 한번 상처받았던 마음에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더 예리하게 느끼고 극적으로 반응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충족되지 못한 인정 욕구의 좌절과, 또 향이와 용이와 비교할 때 뒤떨어진다는 열등감이 변질되면, 그럼 권가 네가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더냐?”

두리뭉실하게 고하였는데도, 세종께서는 맥락에 맞춰 정확하게 분석을 내어놓으셨다.

“······.”

“그런 것이야?”

“소인은 그에 대해서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

“다만 인정 욕구, 형제와 비교되는 자격지심 등이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 더 나은 인간, 더 훌륭한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강력한 심리적 추동력이 될 수 있는 측면은 그 누구보다도 전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

“!”

세종과 이향은 권가가 말하는 속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전하께옵서는 세자로 책봉되시기 전 잠저에서 대군으로 보내시던 나날을 되짚어보시면, 지금 수양 대군이 느낄 좌절감과 왕위를 향한 야망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은 자신이 감추어둔 두려움을 정확하게 읽어낸 권가에게 전율했다.

그리고 이향은 어심을 정확하게 읽어낼 줄 아는 신하에게 군주가 품는 이중적인 감정을 수습하려 나섰다.

어심을 미리 살펴 군주가 행하고자 하는 일을 먼저 나서 청하는 신하는 충신으로 어여삐 여기지만, 감추고 싶은 어심을 읽어냈음을 드러내는 신하를 군주는 본능적으로 꺼릴 수밖에 없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유를 아끼시어 미리 경고를 하시듯, 윤서 또한 우리 홍위를 아껴 혹여 있을지 모를 일을 대비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사람을 정확히 읽어내 적재적소에 쓰시는 아바마마시니, 윤서가 흉계를 먼저 꾸미는 성품이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 팔불출하고는!”

세종께서 비꼬는데도 이향은 꿋꿋하게, 진실된 어조로 말씀을 올렸다.

“이 모든 일은 아바마마께서 강녕하시면 떠올릴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무슨 야망을 어떻게 품고 있든 간에 유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감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바마마, 부디 오래도록 만수무강하옵소서!”

“만수무강하옵소서.”

윤서도 서둘러 이향의 말을 따라하며 엎드렸다.

“하아.”

세종은 탄식하며 효심 깊은 장자이자 듬직한 후계자인 이향의 말에 수긍하였다.

수양은 몰라도 이향만큼은 자신이 죽은 뒤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이 먼저 형제들을 도륙할 성품이 아님을 세종은 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저리 효성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세자이기에 그 옆에 두려움에 떨면서도 일관되게 홍위를 지키고자 하는 뜻을 꺾지 않는 권윤서가 있는 것이 든든하기도 했다.

아들의 말처럼 저 아이는 사무사(思無邪)라, 생각에 사특함이 없으면서도 장차 있을지 모를 사악함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니.

세종께서 홀로 그리 결론을 짓는 동안, 엎드린 윤서는 정말로 세종과 이향이 오래 살면 이 모든 일은 근심할 필요가 없는 일이란 사실을 다시 곱씹고 있었다.

‘그러니 혜민국에서 종기 치료 및 다른 질병 치료 의학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윤서가 다시 다짐할 때

“권가야.”

세종께서 윤서를 부르셨다.

“예, 전하.”

“네가 사람의 마음을 이리 잘 알면서 또한 의학에도 밝으니, 혜민국을 수양과 함께 키우면서 수양의 야망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챙기거라.”

“전하, 그것은.”

“중전께서 변하셨다. 사적으로 보자면 원수의 자식이라 할 수 있는 내게 마음을 다시 여셨어. 그러한 기적도 일으킨 네가 아니더냐?”

[그것은 전하께서 오랜 세월 일관되게 중전마마께 보이신 진심과, 그 일은 크게 보아 정치적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는 중전마마의 넓은 혜량이 빚어낸 결과이지 저의 심리치료 기법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외치고 싶었지만 윤서는 고개를 숙이고,

“어명, 받잡습니다, 전하. 다만 외용약뿐 아니라 종기를 절제하여 치료해야 할 경우 사용하여야 할 외용약과 복용약, 그리고 남성 의원에게 진료받기 어려운 여인들을 위해 의녀중 일부를 의원급 전문 치료 인력으로 키우는 것 또한 지원하여 주십시오.”

고하며 수양을 상대하는 대신 필요한 것을 얻어냈다.

정말로 변화할 수 있을까.

권력욕은 혜민국에서의 성취 정도로 채워지는것이 아님에도 해보겠다고 말씀드린 것은 직업적인 호기심이 일 할, 그리고 늙어가시는 세종 대왕에 대한 연민이 구 할이었다.

윤서가 홍위를 지키고 싶듯 세종께서도 아들을 지키고 싶으실 따름이시다.

수양 대군이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왜 모르시겠는가.

아니 오히려 내심 예상하고 있으시기에 역설적으로 이리 집요하게 윤서를 통해 공연한 우려라고 확인받고 싶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목숨을 다해 홍위를 지키라는, 권력자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요구를 거리낌 없이 행하고 계신 것이겠지.

감상에 젖어 있는데, 세종은 숨 돌릴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권가야. 너는 대체 네가 심리학이라 부르는 이 지식을 어디서 얻게 된 것이냐?”

“!”

기어이 두려워했던 질문이 나왔다.

“아바마마, 윤서는,”

“어허!”

세종께서 더는 끼어들지 말라고 이향에게 엄히 경고하셨다.

“전하께서 온양 행궁에 다녀오시는 동안 제가 한 번 독이 든 다식을 먹고 죽음의 경계에 놓였던 적이 있습니다.”

윤서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답을 올렸다.

“독이라니! 누가 우리 홍위를, 감히!”

“아닙니다, 전하. 낯선 나인이 제게만 건넨 다식이었습니다.”

윤서는 진성이 유난히 밝게 빛을 내던 날 독이 든 송화 다식을 받아먹고 생사의 경계에 머무는 임사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때 낯선 지식이 머릿속을 꽉 채우는 환상을 본 후 기이한 지식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고했다.

“···진성이 반짝였다고?”

전하는 임사체험이란 말보다 그날 기이한 천문 현상이 있었다는 것에 더 신경을 쓰시는 듯했다.

“예, 아바마마. 그날 어가가 장호원에 머물던 날입니다. 진성이 유난히 밝게 흔들리던 날이라 소자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진성은 왕비의 별자리이자 후계의 별자리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큰 기회를 준 것이라면······.”

전하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 말고, 세자와 윤서를 바라보시다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짚어보시며,

“관상감과 논의를 하고 천문 현상에 대한 문헌도 좀 찾아봐야겠구나.”

혼잣말처럼 말씀하시고도 한참을 더 생각하시더니, 이윽고 또 말씀하셨다.

“들어보니 권가 네가 인정 욕구란 것과 또 권력욕에 대해서도 제법 일가견이 있는 것 같구나. 육아보감 초고가 완성되었으니 내가 의문스러운 점이나 더 보강되어야 할 내용을 정리하는 동안 너는 내일부터,”

내일부터 또 뭐를 시키시려고요!

아까 잠깐 보이신 전하의 어두운 표정이 걸려 윤서는 부러 속으로 화를 내었다.

“사기(史記)에 나온 인물들, 특히 왕조를 개척한 위인, 수성기에 접어든 국가를 다시 중흥시킨 왕, 왕위를 찬탈하려 한 자들의 심리적 특징에 대해 분석하여 글로 쓰거라.”

“하오나, 전하. 저는 한문을 모르옵니다!”

이향이 음과 뜻을 달아준 천자문도 이제 겨우 눈에 익을랑말랑 하는 지경인데, 사마천의 사기를 무슨 재주로 읽는단 말입니까.

윤서가 싫은 표정을 보이자 세종께선 ‘이렇게 총명한 네가 한자를 어찌 모른단 말이냐? 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냐?’ 불신에 찬 눈으로 윤서를 보셨다.

그러자 또 이향이 나섰다.

“아바마마, 윤서는 정말로 한자에 서투니, 제가 윤서에게 사기의 내용을 가르쳐주고, 그를 바탕으로 아바마마께서 명하신 것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권가가 쓴 걸 바탕으로 셋이서 함께 한 번 더 정리해 ‘제왕학’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내자꾸나. 그래야 후대에서 보고 배워 우리 조선이 오래도록 백성을 위한 훌륭한 나라가 될 터이니. 권가, 알아들었느냐?”

“···예, 전하. 혜민국에서 전순의와 함께 여러 치료약과 또 여러 치료법을 더 발전시키는 일을 하는 동시에 수양 대군의 심리 상담을 진행하면서, 또 사기의 내용을 우리 저하께 배워 역사 속 위인의 권력욕을 해부하는 심리 분석 자료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쓰겠습니다.”

“생색은! 우리 중에 권가 네가 제일 젊고, 후궁 품계도 받지 않겠다 하여 내명부 대소사도 면제받고 있으면서 뭘 그리 엄살을 부리느냐.”

역시 세종께는 안 통하는구나.

“···예, 전하.”

윤서는 체념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릎 아프니 그만 다시 의자에 앉고.”

“예, 전하.”

영혼 없이 답하며 다시 탁상 앞 의자에 앉는데, 인재를 아낌없이 부리는 점은 아버지를 똑 닮은 이향이 말하였다.

“아바마마, 윤서가 또 탁월하게 할 줄 아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열사나흘 전 비가 오던 날 말입니다.”

“저하!”

아니 수영한 일을 밝히시면 어찌하십니까!

15세기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동방예의지국 조선에서!

이러다 영영 다시 수영을 못 하게 되면요!

윤서는 소리 없이 절규하는데, 이향은 자기 아버지라고 격의 없이 그날의 일을 고하기 시작했다!

< 제 54화. 평창 군주와 홍위와 세종 (3)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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