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2화. 평창 군주와 홍위와 세종 (1) >
속마음이야 어떻든 윤서의 호의를 하나 받은 수양 대군은 혜민국 일에 열성을 보였다.
윤서가 전순의와 함께 만든 외용약의 약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치료 효과를 확인하고 표에 임상 결과를 기록하는 일도 직접 참여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의녀로 키워낼 똘똘한 10대 초반 여자 관노비를 뽑아 올리기까지 석 달 남짓 걸릴 것이라기에 윤서는 혜민국의 상당 일을 수양 대군에게 맡기고 몇 가지 급한 일들을 처리했다.
첫 번째는 박 상궁의 재산관리인 노산대를 만나 한 가지 부탁을 한 것이었다.
운종가 비누 상점의 밀실에서 급하게 노산대를 만나게 된 것은 혜민국에서의 일을 듣고 난 박 상궁이 등짝을 후려치며 윤서를 혼냈기 때문이다.
“저하랑 몸을 섞는다고 네가 세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게냐? 저하야 자기 동생이니 애틋하시다지만 한낱 상궁 나부랭이인 너는! 네가 한번 봐줬다고 하면 수양 그놈이 퍽이나 고마워하겠다. 오히려 너같이 하찮은 것한테 당했다고 모욕감을 느껴 더 독살맞게 굴겠지!”
궐에서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권력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아온 박 상궁의 살벌한 꾸지람에 윤서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활딱 깨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엄 상전도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자네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품계 높은 후궁이나 빈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는, 아니 올라섰다고 해도 자네도, 그리고 우리도 결국 죽은 전균과 다를 바 없는 처지라고. 은혜는 가진 자들이나 베풀 수 있는 특권이네. 배신을 응징할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시혜를 베푸는 게야!”
이 두 사람의 호된 깨우침이 녹아내릴 듯 달콤한 이향의 사랑에 폭 빠져 있던 윤서를 흔들어 깨웠다.
그래서 윤서는 그 길로 박 상궁과 함께 운종가의 상점으로 향한 것이었다.
“수양 대군의 명례궁에 간자 대여섯 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요. 수양 대군이 평소 사냥을 빙자해 왈패들을 모으는 거야 뭐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요?”
두 사람을 밀실로 맞아들인 노산대가 유들유들 답했다.
윤서는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노산대에게 물었다.
“간자로 넣을 만한 이들 중에 특히 순라군과 성문을 지키는 파수 업무를 서는 자들이 있습니까?”
“!”
그러자 노산대는 얼굴을 굳히더니, 박 상궁에게 물었다.
“마마님, 이 항아님, 아니지. 이제 상궁 마마님이시지. 이 애기 마마님은 뭐 땜시 이리 진지하신 겝니까?”
그러자 박 상궁은 빠른 말투로 윤서가 실은 세자 저하의 승은을 받은 몸이고, 원손 아기씨의 보모상궁으로 현재의 권력과 장차의 권력 모두에 발을 걸친 실력자이자 장차 우리를 조선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줄 귀인이라고 자랑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산대는
“있소. 내 순라군에도 아는 동생이 있고, 사대문의 수문을 하는 군관 중에도 아는 조카가 여럿 있소. 번을 안 설 때는 녹봉이 나오지 않아 내게 일을 받아 근근히 사는 자들이니, 걱정마시오.”
말하며 조만간 그들이 수양 대군의 무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굳게 약조했다.
원래 역사에서 수양 대군의 정변은 순라군, 수문장 등 하급 군관들과 왈패의 협조 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세종도, 그리고 이향도 건재한 지금 상황에서 수양 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는 것은 자폭 행위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일은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라 일단 윤서는 할 수 있는 대비를 해두기로 했다.
수양의 무리에 들어간 이들과, 이제 석 달 뒤부터 훈련 시킬 의녀들이 장차 윤서의 눈과 귀가 되어줄 것이고 또 윤서의 조선의 시작이 되어줄 것이다.
*****
그렇게 노산대를 만나고 돌아와 윤서는 홍위 손을 잡고 중궁전으로 향했다. 평창 군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훗날 경혜 공주라 불렸던 평창 군주는 여덟 살로 신기하리만큼 귀티를 풍기는 새초롬한 아이였다.
군주가 궁으로 돌아와 중궁전에 거처하게 된 시기가 공교롭게도 윤서가 혜민국 일과 <육아보감> 초고를 마무리하는 일로 바쁠 때와 겹쳤다.
그래서 윤서는 평창 군주와 겨우 눈인사나 나누고 말았는데 이제 수양 대군 덕분에 짬이 좀 나 홍위와 함께 군주를 보러 가게 된 것이다.
평창 군주는 마침 햇빛을 쬐러 교태전 뜰에 나와 서 있었다.
누나의 모습을 발견한 홍위가 윤서 손을 놓고,
“눈나! 눈나! 눈나!”
외치며 다다다다 달려가자, 군주는 힐끔 홍위를 보더니 팩 몸을 돌렸다.
홍위를 보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몸을 팽 돌렸는데도 홍위는 그대로 달려가 군주의 허리를 꽉 껴안고 소리쳤다.
“눈나! 거가가 왔쪄. 거가 나잉야, 눈나가 왔쪄!”
윤서와 중전마마, 그리고 아버지 이향의 사랑을 듬뿍 받다 보니 눈치 보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홍위는 누나가 자신을 귀찮아할 거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못했다.
“눈나, 거가 나잉 에쁘지? 거가 나잉야, 눈나 에쁘지?”
소리치며 자기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사실만 너무 좋아 발을 동동 굴렀다.
평창 군주는 홍위를 밀어내지 않고 다만 다리에서 떼어내 손을 잡고는 “얌전히 굴어야지. 곧 세손이 될 터인데 이렇게 뛰면 어떡하니?” 어른처럼 혼을 내고는 고개를 돌려 윤서를 바라보았다.
“군주 아기씨,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보모상궁 권가이옵니다.”
윤서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자 군주는 무표정하게 검은 눈동자로 윤서를 응시하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아기씨 궐에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
진심을 담아 말해도 그저 표정 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윤서는 군주의 냉랭한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고는 해도 어머니를 잃은 현실에 적응도 하기 전에 궐 밖에 홀로 나가 살아야 했으니, 어린 마음에 버림받은 듯 느꼈겠지. 마음을 열고 다시 아버지든, 할머니든, 홍위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하지만 생애 최초의 시기에서 다섯 살까지 돌아가신 (그리고 나를 여기로 데려온!) 홍위 어머니께서 고이고이 기르셨을 터이니 기본 정서는 밝고 안정적일 것이다. 게다가 위탁받아 키워준 조유례 부부와도 정이 깊다니 곧 마음을 열고 잘 지내겠지.
윤서는 자신의 역할은 그저 지켜보는 정도에 그치리라 생각했다.
홍위처럼 애착과 돌봄이 간절히 필요한 어린 나이도 아니고, 아직 정식으로 가족 관계로 묶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서 먼저 터졌다.
“아니, 윤서 아가씨. 이게, 얼마 만입니까?”
공주 뒤에서 붉은색 해 가리개를 들고 서 있던 유모가 놀란 눈으로 윤서를 살폈다.
“근데 아가씨. 윤서 아가씨가 맞으십니까? 어째 이리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매서운 눈매로 윤서를 살피는 이는 세자빈 권씨가 친정에서 데리고 들어온 또 다른 여종 백어리니였다!
권씨의 친정에서 온 여종이기에 어릴 적부터 권씨 집에 더부살이 해 온 이 몸의 원래 주인 권가를 너무 잘 안다는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또 애초 이 몸 권가는 일종의 보디 가드로 세자빈이 입궐할 때부터 같이 들어왔고, 백씨는 권씨가 군주를 낳은 후 아이를 키울 유모로 뒤늦게 궐에 데려왔었다는 사실과, 그래서 백씨가 세자빈의 총애를 두고 권가를 무척 경계했었다는 기억도 순식간에 윤서의 머리를 채웠다.
기억을 되짚은 윤서는 일단 활짝 웃으며 백씨를 반기는 시늉을 했다.
“유모. 반가워요. 우리 군주님께서 유모 덕분에 이리 잘 크셨네.”
그러자 평창 군주가 싸늘하게 윤서를 흘겨보았다.
“내 유모면 홍위의 보모상궁인 너와 품계가 다를 바가 없는데도, 네 어찌 내 유모에게 말을 놓는 것이냐?”
“···예, 아기씨. 어릴 적 습관이 남아서, 송구합니다. 유모, 반가워요.”
그러자 유모 백씨가 군주의 뒤에서 윤서를 보며 씨익 웃었다.
“······!”
지나치게 영악한 백씨의 웃음이 마음에 걸렸지만 윤서는 환한 웃음으로 되돌려주었다.
군주가 이리 나서서 편을 들 정도면 유모와 애착 관계를 잘 맺었다는 소리고, 아이에게 애착 관계를 안정적으로 맺은 보호자가 존재하는 것은 바람직한 정서 발달상 아주 중요하다.
‘한데 권가의 본래 기억에 따르면 세자빈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군주와 권가와 상당히 가까웠는데, 왜 이리 싸늘하게 대하는 거지?’
이 몸의 기억으로는 아이라면 정신 못 차리고 좋아하던 권가가 어린 군주를 업고 많이 놀아줬었다.
군주도 다른 이들과 달리 온몸으로 놀아주는 권가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적대감까지 보이는 것인지 윤서는 궁금했다.
그 의문은 중전마마와의 알현에서 풀어졌다.
홍위와 윤서, 평창 군주와 유모 백씨가 중궁전에 들어갔을 때, 홍위는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할마마아아!” 소리치며 도도도 뛰어가 중전마마께 덥석 안겼다.
안기는 홍위도 활짝 웃으며 안아주시는 중전마마도 모두 서로 거리낌 없이 친근감과 애정이 넘쳤다.
그와 달리 군주는 도자기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조용 걸어가 중전마마의 서쪽에 소리 없이 앉았다.
사람이라기보단 잘 빛은 밀랍 인형처럼 생기 없는 얼굴이었다.
“!”
소외감을 느끼고 있구나. 군주가.
군주는 어느날 갑자기 궁에서 내쳐졌다가 어릴 적에도 별로 교류가 없었던 할머니의 궁으로 또 갑자기 들어오게 된 현실에 적응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우리 군주도 이리, 할미한테 오세요.”
하고 소헌 왕후가 불렀지만 평창 군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시늉만 할 뿐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홍위는 낚시 놀이 하러 나가고, 군주는 유모 백씨와 중궁전 뒤편의 거처로 돌아간 후 중전마마께서 윤서에게 따로 어려움을 토로하셨다.
“안쓰럽고 사랑스러워. 친손주인데 어찌 아니 그러겠니? 하지만 도통 웃지도 않고 제 유모랑만 말을 나눌 뿐 내겐 마음을 열지 않아서 공연히 데려와 아이만 괴로운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윤서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씀드렸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중전마마. 머리로는 알아듣는 것 같아도 마음으로는 버려진 것처럼 두렵고 쓸쓸하고 슬펐을 거에요. 어른도 어머니 돌아가시고 갑자기 혼자가 되면 얼마나 두렵고 슬픈데요.”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참을 수 없게 눈물이 났다.
스물여덟 생일 하루 앞두고 아빠와 엄마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에 어떻게 갔는지도 모른 채 동료가 운전하는 차로 대전의 병원으로 달려갔던 그 막막한 시간과, 갑작스러운 이별을 인정할 수 없어 오랫동안 길을 걷다가도 상담을 하다가도 무얼 하다가도 후둑후둑 울었던 막막한 슬픔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죄송, 합니다.”
고하고 엎드려 흐느끼자, 중전마마께서도 “아이고, 참. 권가야.” 하시고는 함께 우셨다.
한참을 같이 흐느끼고 난 후, 발개진 눈으로 중전마마는 다시 명하셨다.
“난 네 덕분에 숨이 좀 쉬어져. 지금처럼 마음껏 같이 울기도 하고. 그러니 네가 군주를 홍위처럼 다시 웃게 하거라. 내 마음이 아파서 저리 무표정한 얼굴을 더는 못 보겠다.”
“···예. 며칠만 말미를 좀 주셔요. 어찌해야 할지 소인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윤서는 상담을 할 수 있을 뿐,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어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은 이향을 비롯한 왕실 어른들인데. 이향더러 적극적으로 군주와 시간을 함께 보내라고 조언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동궁으로 돌아오는데 홍위가 "눈나는 호위가 시은 거야?" 하고 물어왔다.
"아니에요, 아기씨. 오랜만에 봐서 수줍어서 그러신 거에요."
대답하는데 뜻밖에도 세종께서 저녁 수라 후 홍위가 잠들면 이향과 함께 천추전으로 건너오라는 전언을 대전 내관을 통해 보내셨다.
<육아보감> 초고를 들고 오라는 명도 함께였다.
'무얼, 어떻게 물어보실까.'
긴장된 마음으로 이향과 나란히 윤서는 천추전을 향했다.
< 제 52화. 평창 군주와 홍위와 세종 (1)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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