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50화 (50/255)

< 제 50화. 수양 대군 권가를 만나다 (2) >

“이제야 귀하신 대군 자가를 뵈옵니다!”

말하며 권가가 활짝 웃자, 일순 번득였던 증오와 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단숨에 매혹적인 미인만 남았다.

그러나 저 눈빛!

매력적으로 흰 치아를 내보이는 입가의 웃음과 달리 웃음기라곤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은 서늘한 눈빛은 ‘네 시커먼 속을 내 모를쏘냐’ 꿰뚫는 듯했다.

권가의 눈빛이 왕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오랫동안 꿈꾸다 빌어먹을 원손의 탄생으로 강제로 체념을 강요당하는 수양 대군의 좌절감을 예리하게 자극했다.

수양 대군은 내심 자신이 할바마마 태종을 특히 쏙 빼어 닮았다고 자부했다. 증조 할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걸리는 모든 것들을 피로 해치우고 조선 왕실을 반석 위에 올린 태종을.

‘그리고 내겐 나를 세워 경제적 이득을 함께하고자 하는 동지들이 있지.’

고아한 형님은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덕치를 펼치면 백성들은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지만, 순진도 하셔라.

정치는 결국 부귀영화와 출세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들이 서로 뜻을 합해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이익 공동체인 것을.

지금 조선 최고의 부자인 정현 옹주 남편 윤사로는 나의 장인인 윤번과 육촌이고, 장인의 아들 윤사균 또한 당대 최고의 부자이고,

또 대신들 중 가장 거부인 정인지 또한 홍위 그것이 태어나 태실을 정할 때 불길한 정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내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다.

또 처형의 남편이 한계미고, 한계미는 명나라 황실과 혼인으로 얽혀 있는, 감히 전하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한확의 일족이니.

이들은 모두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고, 이들의 경제적 이득 기반이 되는 공물 대납을 아예 없애려는 원칙주의자 형님보다 나를 왕으로 세워 더욱 큰 정치 경제적 이득을 실현하려 할 터.

기회만 잡으면 된다.

태종께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때려죽이고 경복궁에서 이방석을 때려죽여 대업을 이루셨듯 나도 걸림돌을 제거할 결정적 기회만 잡으면 된다!

이것이 수양 대군이 내심 가져온 믿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혜민국에 와 보니 저 권가의 눈빛이!

입만 활짝 웃은 채 싸늘하게 빛을 내는 권가의 눈빛은 수양 대군의 그 오랜 은밀한 야망을 꿰뚫어 보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는 듯 조롱하는 듯했다.

그것이 바로 수양 대군이 강하게 분노하게 된 원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윤서는 수양 대군의 야망을 꿰뚫고 있었다.

혜민국에 처음 오기 전날 밤, 윤서는 목욕을 한 후 서온돌의 곁방에서 서탁 위에 흰 종이를 펼치고 세붓을 들어 수양 대군의 심리를 분석해 보았었다.

북으로 난 작을 창을 통해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깊게 잠든 홍위의 토실한 뺨을 바라보며.

그리하여 절대 객관적일 수 없는, 애끓는 모정에 기반한 분석이었다.

[수양 대군의 심적 동인(動因)은]

여기까지 적고 윤서는 이향과 박 상궁과 엄 상전 등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훗날 전개되었던 역사를 꼼꼼히 되짚어 본 후 다시 붓을 들었다.

{수양 대군의 심적 동인은 콤플렉스다.

학문적 성취와 빼어난 외모를 함께 가진 세자 형에 못 미친다는 자괴감, 또 당대의 사대부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동생 안평 대군 이용의 예술적 성취에도 못 미친다는 열등감.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 형제들 모두 궐에서 대군으로 자라날 때 홀로 여덟 살까지 사가에서 위탁 양육되면서 느꼈을 암암리의 소외감과 서러움.]

여기까지 쓰고 윤서는 어둠 속에 짙게 음영 진 홍위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저 어린 것이 나중에······.’

끝까지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윤서는 붓을 놓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물리적으로, 정말 쥐어짜듯 아팠다.

인간 심리의 다양한 어둠을 직업적으로 목격해 왔으면서도, 이 낯선 이방의 땅에서 홍위가 가질지 모를 장차 운명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들도록 무서웠다.

“아이를 낳았더니, 이 아이가 어떻게 될까 너무 무서워. 그래서 때로 울며 기도를 해. 우리 현호는 제발 나보다 오래 살게 해달라고. 자식은 부모보다 오래 사는 게 제일 큰 효도고 반드시 해야 할 효도야.”

라고 말했던 대학 동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윤서는 홍위를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역사 속 홍위를 생각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종이 위에 번졌다.

윤서는 코를 팽 풀고 다시 붓을 들었다.

[왕가에서 피의 다툼은 흔하나, 수양 대군의 정변은 정치적 야망이 아닌 개인적인 콤플렉스 한풀이 속성이기에 유독 더 인재를 가차 없이 죽이고, 어제까지 동료였던 자의 부인과 여식을 성적 노리개로 거리낌 없이 배분해 가지는 패륜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조선은 국초의 건강한 기풍을 잃고 거리낌 없이 제 무리의 이익만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헬조선으로 타락해갔다.

[그러니 나의 홍위를 지키는 것이 결국 조선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까지 썼다가 윤서는 붓으로 ‘조선’에 밑줄을 그었다.

[이제 이 조선은 나의 조선이기도 하다. 내가 발 딛고 살아야 할 나의 공간.

그럼 나의 조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조선에서 살고 싶은가.]

인간은 목표를 가질 때 주체적으로 살아갈 동인을 얻는다.

이제까지 홍위와 한 줌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 이향의 여인으로 여기 조선에 뼈를 묻기로 한 나는.

[나와 이향, 그리고 홍위의 조선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또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다. 도망치지 않았으므로.]

여기까지 쓴 생각 정리 종이를 들고 윤서는 비현각으로 갔다.

비현각 이향의 책상 뒤로 열쇠가 없으면 절대 열어볼 수 없게 만들어진 강철 궤짝 하나가 윤서 전용으로 생겼다.

잘 살려면 때로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써야만 하는 윤서가 상단부에 투표함처럼 종이를 밀어 넣을 수 있는 강철 금고 설계도를 보여주었을 때 이향은 “비밀이 많은 나의 미래인 부인”이라며 놀렸지만,

“저하가 사람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말라시니, 저는 이렇게라도 사람에 대해, 또 저의 내밀한 심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야 해요.”

진지하게 요청하는 윤서의 말에 선선히 설계한 대로 궤짝을 만들어주고 누가 함부로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게 자신의 집무실에 두게 하였다.

******

‘그러니 수양 대군 이유! 당신이 나의 홍위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 당신을 기필코 죽일 것입니다!’

혜민국 첫 만남에서 윤서가 활짝 웃는 웃음 속에 숨긴 속뜻이었다.

수양 대군은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눈을 반짝이는 권가에게 격노했지만 아바마마 앞에서 늘 해오던 것처럼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고 자연스럽게 칭찬부터 했다.

“권가 상궁이 재주도 많고 수고도 참 많네. 일전에 전하께서 혜민국을 맡기시며 자네가 만든 자운고를 주셨는데, 내 아주 감탄을 하였어.”

“조그만 재주를 두고 이리 칭찬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세종께서 보시면 기뻐하실 화기애애한 대화였다.

동궁전의 상궁과 수양 대군 사이에 은근히 알력이 있으리라 조마조마했던 혜민국의 주부, 의학 교수 및 모든 관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위에서 권력을 다투면 아랫것들만 중간에서 죽어 나가는데 우리 혜민국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는 안심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할 것이니 자네들은 이만 물러가 보게.”

수양 대군이 사람들을 물렸다.

이제 집무실에는 회의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수양 대군과 윤서, 그리고 윤서를 보조하는 내관 강인구와, 내관 복장을 한 매금이만 남았다.

윤서는 열린 문을 통해 혜민국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별저를 쳐다보고 매금이를 바라보았다.

매금이가 윤서에게 고개를 까딱한 후, 전순의가 주로 약제를 배합하는 안쪽 책상으로 물러났다. 윤서의 업무 보조 내관 강인구도 매금이 뒤를 따랐다.

수양 대군은 여인과 이리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영 불편해서 차를 홀짝 한 모금 마시고, 앞으로 그럭저럭 잘 지내볼 요량으로 사과부터 했다.

“그간 내 안사람이 동궁 내의 일과 자네를 대함에 있어 본의 아니게 몇몇 실수가 있었던 듯하이. 안사람도 많이 후회하고 있네. 나 또한 사과하겠네.”

“!”

윤서는 수양 대군을 바라보며 이향이 말한 ‘자기실현적 예언’이란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엄 상전에게 우리 홍위가 태어났을 때 대전의 촛대가 부러진 일을 두고 흉조라고 믿는 자들이 바로 홍위의 불운을 불러오고 있다고 일갈했던 것처럼, 이향은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 믿는 윤서의 믿음이 그들을 원래 역사의 궤도로 올라타게 떠밀 수 있음을 경고했다.

‘다르게 대한다고 달라질 가능성이 있을까?’

윤서는 홀로 되물었다.

인간의 기질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심리학계의 중론이다.

특히나 콤플렉스를 추동으로 하는 출세욕과 권력욕의 경우 원하는 목표를 거머쥐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거의 충족되지 않는다.

그러니 형보다 잘난 왕이 되고 싶은 수양 대군의 욕망은 기필코 왕이 될 때까지 언제 터질지 모를 휴화산처럼 안에서 부글부글 끊임없이 끓어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향의 말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단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그렇게 단죄할 수 있도록 세종께서 보고만 계시지도 않을 것이다. 수양을 위태롭게, 자신의 아들을 위태롭게 하면 죽이겠다고 하셨으니!’

그래서 윤서도 ‘배우자에 대한 예의’의 일종으로 일단 수양 대군을 믿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고 공손하게 사죄의 인사로 화답했다.

“저 또한 아직 궐의 예법에 서툰지라 부부인께 실례를 하였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 말씀 전해 주십시오.”

“하하, 아바마마께서 자네가 우리 세자 형님께 중요한 여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더니, 과연. 예의도 바르고 아주 총명하시구먼.”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사과와 칭찬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저쪽에 있던 매금이가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퉁퉁 다가와 윤서의 어깨를 살짝 흔들고 별저를 가리켜 보였다.

갑자기 뛰어든 어린 내관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수양 대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대군 자가, 제가 대군 자가께서 오시길 무척 기다린 이유가 실은 따로 있습니다. 저와 같이 저 별저의 환자를 살펴보시겠습니까?”

수양 대군이 윤서가 가리킨 방향을 힐끗 보았다.

“별저? 저긴 신분이 좀 높은 자들이 머물며 치료받는 곳이 아닌가? 한데 자네는 아무리 그래도 형님의 승은을 받았다면서 어째서 사내들 치료받는 곳까지 둘러보려 하는 게야?”

수양 대군이 권가를 위하는 척하며 조심성 없는 행동이라고 살짝 꾸짖었다.

“예, 하온데······. 가 보시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윤서가 공손히 고하고 먼저 일어서자, 수양 대군은 아까 처음 본 차가운 미소가 정말 자신의 착각이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따라 일어섰다.

권가의 말투와 행동거지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당히 친근했기 때문이다.

병자 중 귀한 분들을 따로 치료하기 위해 마련된 별저는 혜민국 건물 중 가장 안쪽에 있어 밖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 한적한 공간이었다.

별저로 들어가는 일작문 앞에 다다랐을 때,

“!”

수양 대군의 얼굴이 갑자기 뻣뻣해졌다.

안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 은밀하고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이게?”

당황해 묻는 수양 대군에게 윤서가 덤덤하게 물었다.

“예, 자가. 이런 실태를 아셨습니까?”

“아, 아니 나는.”

수양 대군은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혜민국 소속 의녀들이 문란하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설마 대군이 와 있는 대낮에까지 이 지경일 줄이야.

혜민국은 서민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기능 외에도 의원과 의녀를 선발해 교육시키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의녀란 것이 지방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 중 똑똑하고 용모도 참한 여자 노비들을 선발해 뽑아 올린 것이라 의료 지식을 배워 갖춰도 신분은 결국 천인(賤人)에 불과했다. 때로 기녀와 함께 국가 행사에서 가기(歌妓)로 동원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혜민국에서 치료받는 사내들이 의녀를 함부로 희롱하는 일이 잦았고, 의녀들 스스로도 험한 일을 하며 함부로 취급받는 것보다는 부유한 양인의 첩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어 사내들을 유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현황을 파악한 윤서는 음란한 의녀를 내보내고 새로 어린 의녀를 선발해 교육시켜 장차 휘하에 거느릴 조직 중 하나로 키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는데 수양 대군이 마침 해주어야 할 역할이 있었다.

“수양 대군 자가, 저 음란한 것들을 여기 혜민국에서 내쳐주시겠습니까?”

윤서가 요구했다.

때마침 누구에게 들었는지 혜민국 책임자인 종6품 주부와, 종6품 의학 교수, 종7품 직장 등의 관원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자, 자가. 이, 이것이!”

주부와 의학 교수가 해명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수양 대군은 평소 문란한 여색에 관해서는 그의 형 이향만큼이나 엄격했기 때문이다.

“여봐라. 저 안의 더러운 것들을 끌어내라!”

분노한 수양 대군의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혜민국에서 부리는 노복들이 별저로 달려 들어갔다.

곧 쪽마루 뒤 방문이 벌컥벌컥 열리고, 안에서 음탕한 유희를 벌이던 몇몇 가짜 병자와 상대 의녀들이 거칠게 끌려 나왔다.

그런데.

“!”

수양 대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제 50화. 수양 대군 권가를 만나다 (2)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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