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화. 수양 대군 권가를 만나다 (1) >
윤서는 혜민국에 나가보고 나서야 자신이 혜민서와 활인서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니 드라마 허준에서는 가난한 서민 병자들을 진료하던데.’
실제는 입성이 제법 화려한 양반과 서민을, 마찬가지로 얼굴이 제법 고운 의녀들이 지극하게 돌보는 고급 치료 시설 비슷한 형태였다!
“가난한 병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윤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더니, 내의 전순의가 빙그레 웃으며 공손히 답했다.
“권 상궁 마마님, 가난하고 의탁할 데 없는 병자들은 동소문 밖과 서소문 밖의 활인원에서 돌보고 있습지요.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 여러 왕실 귀빈이 거하시는 도성 내에 그리 위험한 자들을 두기는 어렵습니다요.”
그렇다.
윤서는 최근 보모 나인에서 정5품 보모 상궁으로 승진했다.
홍위도 계속 돌보면서 밖의 활동을 할 때 너무 낮은 품계로 곤란한 일을 겪지 말라고 이향이 중전마마께 고해 얻어준 품계였다.
혜민국의 첫 방문을 앞두고 종기와 여러 전염병에 쓸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도록 약제에 밝은 의원 하나를 붙여달라고 청했더니, 이향은 어의 중 가장 유명한 ‘그’ 전순의를 붙여주겠다고 말했다.
문종의 종기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데도 평상시처럼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고 활쏘기를 직접 시찰하게 하여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전순의’를!
“저하! 그 전순의는,”
윤서가 본능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말을 이으려 하자, 방금 전까지 다정하게 몸을 더듬고 있던 이향이 돌연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윤서를 꽉 껴안고는,
“내가 명하지 않았더냐? 사람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네가 언젠가 엄 내관에게 ‘자기실현적 예언’이란 말을 했었다지? 그건 네게도 마찬가지다, 권윤서!”
엄하게 경고했다.
역사에서 일어났지만 여기 조선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로 사람을 가리지 말라는 경고이자, 장차 군주로 다양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자신의 판단에 선입견을 심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그런데 혜민국에서 만난 전순의는 ‘권 상궁 마마님’께서 앞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적극 보필하겠다며 아주 공손하였다.
권력자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라면 웅담 대신 자신의 간이라도 빼어 고아 올릴 자라고 박 상궁 마마님께서 말씀하시더니, 과연!
“제가 듣기로 권 상궁 마마님께선 외용으로 바를 약을 만드시고자 하신다고요. 그럴 경우 약재 추출 성분과 바를 수 있는 매개 성분과의 합도 따져야 할 것입니다.”
전순의는 아주 진지하게 윤서의 일을 돕고자 했다.
그래서 윤서는 일단 소독의 개념을 설명하며 높은 도수의 술을 한 번 더 증류해 순도 높은 주정을 얻어내고, 그걸 희석해 여러 감염증 예방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전순의에게 물었다.
또 만약 종기가 심해져서 절개를 해야 할 경우, 주정을 이용한 소독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지도 알아내 달라 요청했다. 문종의 사인이 종기 상처로 감염된 급성 패혈증일 수 있다는 글을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나서이다.
그렇게 소독약과 외용약의 가능성을 전순의와 논하고, 전의감에 있는 약재들 중 목적에 부합하는 약재를 가져다가 약 성분을 추출해 외용약으로 만들어 볼 계획을 짜는 동안.
만날 수 있으리라 예상했던 수양 대군은 한 시진이 흘러 궐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군 자가께서는 급하신 용무가 있어 지금 오실 수 없고, 이따 오후 늦게 따로 들르셔서 감독하시겠다고 하옵니다.”
나중에 수양 대군의 명례궁에서 사람이 와서 윤서에게 고하였다.
그 이후로도 사흘 간격으로 두 번을 방문하는 동안 수양 대군을 볼 수 없어서, 일부러 피하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정작 수양 대군은 윤서가 없는 틈에 혜민국에 와 권가 상궁이 하는 일과, 그 일을 혜민국의 기존 업무에 어떻게 통합시킬 수 있는지를 상세히 보고받고 있었다.
수양 대군이 권가 상궁과 얼굴을 직접 맞대는 것을 피한 것은 여러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다.
첫째는 혜민국의 체계적인 운영방안을 개선해보라는 어명을 받을 때의 미묘한 상황 때문이었다.
온양 온천행을 시종하고 돌아온 후 전하께서 따로 부르셔 맡기시는 일이 없어 슬슬 불안하던 차였다.
그러나 빼어난 사냥꾼인 수양 대군은 불안할 때일수록 더욱더 숨을 죽이고 존재감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섣불리 화살을 날렸다간 오히려 사냥감의 경계심만 부추겨 놓치는 결과만 남는다.
그래서 권가 나인이란 요물을 만나고 온 부인이 그냥 둘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뛸 때 결정적인 한 방이 아니라면 그냥 두라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덤덤하게 위로했었다.
그래도 아바마마께서 다른 곳도 아닌 천추전으로 들라는 어명을 내리셨을 땐 무척 반갑고 가슴이 뛰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선택받은 소수만 드나들 수 있는 천추전에 들었더니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내 즉위 초부터 여러 곳에 약초밭(藥田)을 조성하여 우리 토양에 맞는 한약재를 길러온 것을 잘 알 것이다. 한데 약재를 이용하는 행태가 주로 탕제로 복용하는 것에 그치고 있지 않느냐? 네가 약재의 약리 성분을 추출해 외용약으로 개발하는 일을 맡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예, 아바마마. 소자 내의원과 전의감과 협력하여 반드시 탁월한 외용약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의학을 발전시키는 일은 그 유용성이 지극히 크고 조정 신료와 백성 모두에게 큰 칭송을 받으며 세를 넓힐 수 있는 일인지라 수양 대군 이유는 내심 크게 기뻐하며 어명을 받잡았다.
그런데.
“이것 좀 가져가 사용해 보거라.”
하면서 전하께서 천 상궁을 통해 종이에 싸인 조그만 덩어리 하나와 여인들 연지를 담는 것과 같은 용기 하나를 하사하셨다.
“그게 바로 홍위의 보모 권가 나인, 아니다, 지금은 보모 상궁이 된 권가가 만든 비누와 자운고란 것이다. 내 그 비누란 걸 써보니 몸이 아주 깨끗하게 잘 닦이고, 자운고는 자잘한 가려움증이나 모기 물린데 아주 잘 듣더구나. 이런 걸 만들 줄 아는 권가가 혜민국에서 더 효능이 뛰어난 외용약을 만들고자 하니 너도 혜민국에 나가 권가와 함께 개발에 참여하거라.”
하고 명하셨다.
아바마마까지 ‘권가’ 이야기를 하시다니.
다른 곳에서는 대범한 부인이 유독 권가란 자에 대해서만 이성을 잃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하는 걸 달래다가 입궐한 길이었는데.
수양 대군은 뒷골이 당기며 골치가 아파졌다.
“···소자에게 권가란 상궁의 보조 역할을 하란 명이십니까?”
그래서 늘 공손하게 부왕의 뜻을 받들어온 이유가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여쭙자, 세종께선 놀란 표정으로 둘째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다. 권가는 세자의 승은을 받았지만 원손의 보모 상궁에 불과하니 혜민국에 가서 일을 추진할 때 어찌 권위가 서겠느냐? 대군인 네가 가서 모든 일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감독하라는 뜻이니라.”
말씀하시고는 잠시 침묵하시다가 의미심장하게 또 덧붙이셨다.
“권가는 장차 세자의 중요한 여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너도 친밀하게 협력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예, 아바마마. 소자 성실하게 감독해 탁월한 외용약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말로는 고하고 천추전을 나오기는 했지만 수양 대군은 자신이 아바마마께 한낱 세자 후궁 후보에 불과한 상궁 나부랭이와 동급으로 묶였다는 생각에 서운함과 좌절감을 크게 느꼈다.
게다가 그 소식을 들은 부인은 당분간 권가를 직접 대면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소첩이 겪어본 바도 그렇고, 국무당 무가이도 말하길 권가 그것은 앞으로 내내 자가 하시고자 하는 일에, 또 우리 일에 건건이 걸림돌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소첩이 지금 영험한 무당과 법사에게 명해 저주술을 행하고 있는데, 혹여 자가께서 그것 옆에 가셨다가 안 좋은 영향을 받으실까 두렵습니다.”
후계가 없는 세자의 바로 손아래 동생, 두 번째 왕위 계승자로 오래 살아온 수양 대군은 전하께서 권가와 협력하라 명하신 것이 단순히 의학 발전을 이뤄내고 혜민국의 기능을 더욱 발전시키란 것 외에 더 큰 뜻이 있으시리라고 짐작했다.
또 부인이 저주술 외에 더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잠재적인 왕세제로 암암리에 대접받던 자신이 원손이 태어난 이후 이제 세자의 후궁 후보까지 챙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분노와 자괴감에 권가를 보면 함부로 대해 오히려 아바마마와 형님의 경계를 살까 두려워 부러 권가가 없을 시간에만 혜민국에 들러 현황을 보고받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양 대군이 생각을 고쳐 권가를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마음 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
“대군 자가, 이것 좀 보시지요.”
권가가 돌아갔을 신시(오후 3시)가 지나 혜민국에 들렀더니 연교, 금은화, 창출, 석검 등 각종 약재의 강렬한 향이 진동하는 가운에 내의 전순의가 기름처럼 보이는 소량의 액체를 조합하며 실험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운고보다 더 강력한 외용약을 만들기 위해 실험하는 약재와 그 추출 방식입니다.”
권력자 누구에게나 지극히 공손한 전순의가 수양 대군에게 책자 모양으로 엮은 기록지를 보였다.
그런데 기록 방식이 상당히 특이했다.
기껏해야 항목을 세로로 죽 적고 그 옆에 해당 내용을 적어 정리하는 정도의 기록법과 달리 권가 상궁이 만들었다는 기록지는 가로세로로 ‘표’라는 걸 만들어 약재 추출물 이름, 각각 투입된 양, 배합 방식, 배합 비율 같은 것을 한눈에 파악되게 하는 형식이었다.
“이 표라는 걸 권가 상궁이 만들었다는 말인가?”
“예, 대군 자가. 그리고 권 상궁 마마님께선,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전순의가 기름종이로 꽁꽁 싸매둔 납작한 종지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강렬한 소나무 향이 코를 자극했다.
“이것은 술 고리처럼 생긴 것에 생 솔잎을 넣고 증류한 뒤 물 위에 뜬 기름만 걷어낸 것입니다. 이 기름은 그냥 탕약으로 끓이는 것보다 원래의 향이 훨씬 더 강하고, 약재 성분도 훨씬 더 많이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금은화, 연교, 당귀, 차조, 백지, 작약 등을 말리지 않은 생약제 그대로 꽃과 잎, 줄기의 성분을 각각 추출하고 있습니다.”
전순의의 목소리엔 희미한 흥분의 기미까지 감돌았다.
탁월한 침술 실력과 탕약 제조 실력으로 이미 전하께 의복까지 하사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최고의 어의가 한낱 상궁 나부랭이가 하는 일에 감탄을 하고 제 업적처럼 자랑스럽게 읊는 모습은 전순의를 알아 온 이래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순의는 그저 권력자에게 충성하여 일신의 안위와 영광을 도모하는 소인배에 불과한데, 그러한 자가 대체 왜!
‘권가란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아바마마께서 정음을 만드는 일에 쓰시고, 또 이제는 여기 혜민국의 일까지 맡기시는가. 또 매사 대범한 부인은 어째서 권가에게만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모략을 꾸미는가.’
무엇보다 일평생 여자에게 극도로 무심했던 형님이 왜 권가에게만은 광인처럼 집착하시면서도 여러 가지 외부 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호위 내관과 업무 보조 내관까지 따로 붙이셨단 소문이 도는가.
그래서 수양 대군은 직접 권가를 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권 상궁이 언제 또 여기 오는가?”
“사흘에 한 번씩 오시니 모레 오시(오전 11시) 경에 오실 것입니다.”
“으흠.”
수양 대군은 그럼 모레 와서 권가가 하는 일의 꼴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수양 대군은 열흘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권가가 해낸 일을 숙지하고, 드디어 말일, 오시에 맞춰 혜민국으로 왔다.
“종기라고 하는 것에도 종류가 다양하니, 그럼 이 약을 발랐을 때 치료 양태가 어떻게 되는지 각각 따로 기록해야 합니다. 우선 그렇게 치료 경과를 보고, 빼어난 치료 효과를 보인 종기 종류에는, 그럼 이 약에 들어간 성분 배합을 달리하여 어떤 배합이 가장 탁월한 치료 효과를 내는지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권가 상궁의 집무실 앞에 섰을 때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차분차분 말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록색 당의를 입고 머리는 그냥 단순하게 올려 쪽을 쪘으나 상궁치고는 지나치게 앳되어 보이는 여인이 혜민국 치료 의원인 종8품 봉사 두 명과 의녀 여섯 명에게 실험 방식을 설명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의녀 하나가 수양 대군을 보고 반색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대군 자가 오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권가 상궁이 고개를 돌려 수양 대군을 바라보았다.
“!”
서늘한 미인의 눈에 일순 강렬한 살기와 증오가 스치는 걸 빼어난 사냥꾼 수양 대군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런 눈빛을 했다는 듯, 그것은 당신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놀리는 듯 권가 상궁이 활짝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이제야 귀하신 대군 자가를 뵈옵니다.”
순간 수양은 강렬한 짜증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 제 49화. 수양 대군 권가를 만나다 (1)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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