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윤씨는 길길이 뛰었지만
“어마마마, 소첩이 잘못하였습니다.”
중궁전.
윤씨가 중전마마의 앞에 납죽 엎드렸다.
“홍 승휘, 아니 이제는 상궁이 된 홍가는 제 종조카입니다. 궐에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나 저하의 마음을 온전히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조카가 가여워 패물이며 비단 같은 것을 챙겨주었더니, 그 아이가 저를 의지 삼아 동궁의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뿐이옵니다. 어마마마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제가 무엇이 아쉬워 번잡한 일을 벌였겠습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오소서.”
윤씨가 사죄와 변명을 올리며 흐느꼈다.
“그날도 어마마마께서 괴로워하시는데 저기 권가가 제게 물러가라 소리쳐 어마마마께서 조용히 안정하시게 해야 한다는 마음에 돌아가는데······.”
조카가 직접 나와 제 손을 잡아끌며 의논드릴 일이 있으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사 하도 간곡히 말하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잠깐 조카의 처소에 들렀던 것이다. 라고 시작하여.
홍 승휘가 권가가 원손 아기씨를 해치는 주술을 쓴 증거를 찾아내었다고, 비단 주머니를 내보이며 흥분해서 말하기에 그런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니 일단 세자 저하께 고하라고 충고했는데, 저하의 총애가 최근 권가에게만 가 있는지라 경솔하게도 주상 전하께 달려간 듯하다고 애달픈 어조로 설명하였다.
“호되게 혼내서라도 후궁의 본분은 그저 인내하며 성심으로 저하를 모시는 것임을 명심하게 해야 했었는데, 총애를 독점한 권가를 질투하는 조카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조카의 처지를 너무 가여이 여기는 마음에 엄히 훈계하지 못하여 이 사달을 낸 소첩을 벌하여 주시오소서, 중전마마.”
참으로 능수능란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잘 못 하였다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잘못이 모두 홍 승휘에게 있다는, 자신은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조카를 동정한 선량한 마음밖에 없었다는 교묘한 포장이기도 했다.
윤씨의 한참 뒤에 엎드려 있는 윤서는 고요히 중전마마의 말씀을 기다렸다.
“···그래. 네가 철철마다 귀한 약재로 보약까지 지어주며 조카를 아낀 것은 내 잘 안다. 잘 알아. 하나······.”
“!”
보약이라고?
윤서는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중전마마의 말씀을 흘려들으며 홍가의 딸 금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파리한 안색, 두뇌 발달이 느리고 행동이 어눌한 것이 그 보약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홍가가 그간 윤씨에게서 받아 복용했다는 약의 성분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서가 그리 결론을 짓는 사이, 중전마마의 훈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세자의 다른 후궁들도 너와 가까운 친인척 관계가 아니냐? 네가 홍 승휘에게 하듯 그들과도 격의 없이 왕래하며 이야기를 옮기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어마마마. 소첩 앞으로는 동궁의 내궁과 거리를 두고 근신하겠습니다. 한 말씀을 더 올려도 될는지요?”
“무엇이더냐?”
윤씨는 다시 납죽 엎드렸다 중전마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동궁의 내궁에 수장 자리가 비어 있고, 여러 승휘는 궐에 들어온 후로 세자 저하를 자주 모시지 못해 당황스러운 마음에 허둥거리며 왕실에 들어온 지 오래된 제게 자꾸 사람을 보내 물어오는 경우가 적지 아니 합니다.”
“···그래? 으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예, 중전마마. 그나마 그간은 입궐한 지 가장 오래된 홍 승휘가 내궁의 수장 노릇을 하였는데 지금 저리 죄를 지어 내쳐지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어떠하겠습니까?”
“!”
어째 이야기의 방향이 난데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현덕 빈께서 안타깝게 승하하신 후 시일이 많이 흘렀고, 전하께서도 일전에 새로 세자빈을 뽑기 위해서 금혼령을 내렸다가 중지하신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사단이 다 동궁의 안주인이 비어 있어 생겨나는 일이니 이제라도 금혼령을 다시 내려 참하고 현명한 반가의 규수를 빈으로 맞이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으흠.”
“전에야 여러 이유로 명망가에서 세자빈 간택에 참가하길 꺼렸사오나, 이제 세자 저하께서 인품이 고아하시고 성군의 자질이 출중하신 걸 모르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지금이라면 간택에 참가할 명문가 규수들이 많을 것이니, 외로우신 원손 아기씨와 우리 평창 군주를 생각하시더라도 든든한 외가를 새로 만들어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지요, 어마마마.”
윤씨는 과연 강적이었다.
윤서를 직접 제거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되자, 대번에 다른 음모를 꾸며 온 것이다. 직접 손을 댈 수 없다면, 궐 내에서 윤서를 견제하고 대신 싸워줄 강력한 경쟁자를 집어넣을 작정인 것이다.
“권가야,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중전마마께서 윤서에게 물으셨다.
그러자 윤서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 윤씨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한낱 나인이 무슨 말씀을 올리오리이까? 권가는 그저 저하의 총애를 바랄 터인데요. 그러나 세자빈의 자리는 막중한지라 승은은 입었다 한들, 한미한 가문의 나인 출신이 감당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허! 네게 물은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리 근신하라 방금도 일렀거늘!”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윤씨가 다시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중전마마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윤씨의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몸을 굽혔다 일으키는 윤씨를 보며 윤서는 다시금 깨달았다.
이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우리 홍위를 지키는 것은 물론 이향의 사랑을 지키는 것도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권가야,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중전마마께서 다시 물으셨다.
윤서는 전날 세종께 올렸던 말씀 “윗전의 일에 어찌 소인의 의견을 감히 고하리까” 하였던 말씀을 올리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세자 저하를 연모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저는 무어라 말씀드릴 처지가 되지 못하옵니다, 중전마마.”
“여, 연모라니, 천한 태생이라 부끄러움도 모르고!”
윤씨가 아연한 표정으로 윤서를 쳐다보았다.
중전마마께서도 뜻밖이라는 듯 윤서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여인을 본 적이 없어서이다.
그러나 윤서의 표정은 평온하였다.
단정히 앞에 모은 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몸도 한 치의 흔들림을 보이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마음밖에 없다면, 그 마음을 오롯하게 내보이는 것이 가장 강한 설득력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
중전마마께서는 권가 나인의 말을 곱씹어보시고,
한편으로는 세자가 권가에게 보이는 지극한 애정을 떠올리셨다.
‘저희끼리 저리 좋다는데 지금 당장 세자빈 간택은 좀 무리수일 수도 있겠지. 기껏 귀한 규수 뽑았는데 세자가 거들떠도 보지 아니 한다면······. 더구나 그런 와중에 권가가 턱 하니 회임이라도 하면 오히려 일이 더욱 복잡해지기만 하지 않겠나.’
그러나 ‘어엿한 명문가 출신 참한 규수의 세자빈’이라는 윤씨의 말은 소헌 왕후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걸 윤서는 그 모습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윤씨가 저렇게 나오는 것은 윤씨와 결탁한 세력 사이에서 세자빈 자리를 두고 어느 정도 교감을 주고받았다는 뜻이겠지?’
누구와 무슨 거래를 주고받은 것인가.
이제까지 꺼려하던 세자빈 자리를 채워서라도 자신을 견제하고 그 사이에 다시 또 뭔가 획책하려는 것일까.
그 무엇인가는 장차 다가올 이향의 치세와, 그리고 더 멀게는 우리 홍위의 안위와 통치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권가야. 세자의 여인이 가질 자리는 연모하는 마음만으로는 얻어내기도, 지켜내기 어려운 자리이니, 권가 너 또한 지금 나온 이야기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중전마마께서도 같은 짐작을 하셨는지 넌지시 윤서에게 경고하셨다.
“예, 중전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중전마마, 권가는 한낱,”
“어허!”
윤서가 말하자, 윤씨가 끼어들어 무엇인가 또 말하려 하자 중전마마께서 앞에 놓인 서안을 탕 치셨다.
“이제까지 무얼 들은 것이야? 동궁의 일에 네 감히 왈가왈부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현동이가 원손의 머리를 때린 일로 휘하 궁인이 태장을 맞고도 아직도 원손의 어린 말투를 흉내 내며 놀리는 일도, 네가 공공연히 동궁의 잠자리까지 거론한 일도 없던 것처럼 이처럼 묻어주었는데! 정녕 이 모든 일들을 문제 삼는 걸 볼 참이냐?”
“어, 어마마마!”
윤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 그간 비어 있는 세자빈을 대신하여 왕실의 여러 일을 잘 처리해 왔기에 내 너의 공을 높이 사 과거는 묻어주려 한다. 하나 이번 한 번만이다. 앞으로 절대, 절대! 동궁의 일을 입에 담지도 떠올리지도 말거라.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어마마마.”
윤씨가 입술을 즈려물며 고개를 숙였다.
화려한 스란치마 자락을 움켜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핏기가 사라졌다.
“현동이도 앞으로 원손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고. 내년 초에 우리 홍위를 정식으로 세손으로 책봉하게 되면, 세손 각하라 똑바로 경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야!”
“예, 어마마마.”
윤서는 엎드려서 홀로 웃기는 했지만, 마음이 썩 통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든든한 뒷배경이 없는 자신이 왕실 내명부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게 된 까닭이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혜민국 일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며 부를 쌓고 힘을 길러 외부의 세력을 모으는 것 못지않게, 왕실 내의 지지 세력을 만드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구나.’
장옥정이 왕비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이 가진 탁월한 미모 덕분도 있었지만 오라버니 장희재의 엄청난 금력과, 남인을 이용해 서인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숙종의 정치적 필요가 함께 어우려져 가능했던 일인데.
윤서는 이향의 지극한 애정 외에는 아직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수야 있나.
미래에서 온 영혼이라는 사실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하며 온전히 사랑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이향을 생각해서라도 기죽어 있을 수 없다!
잔잔하던 날씨가 윤서가 중궁전 뜰에 내려서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저 앞에서 먼저 중궁전을 나갔던 윤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서는 허리를 살짝 굽혀보이며 예를 갖추고 윤씨를 빗겨가려 하였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닐 것이야.”
“?”
윤씨가 성큼 윤서의 앞으로 다가서 속삭이듯 말했다.
미리 일러둔 것이 있는지 윤씨 뒤에 서 있는 조 전언과 수행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양 딴청이었다.
“한 건 했다고 좋아하고 있었겠지?”
윤씨가 윤서를 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하나, 네가 훗날 내 앞에서 송구하다고, 잘 못 했다고 오늘 일을 울며 빌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내 너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이니.”
“누구 마음대로?”
“뭐?”
“그게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아?”
“뭐, 뭐, 네, 네 마음?”
“왜? 과연 누가 찢길지 한 번 볼까?”
“이, 이년이, 감히!”
윤씨가 눈을 허옇게 뜨며 분노했다.
늘 고아한 체하던 부인이 눈을 저리 뒤집으니 보기가 참 좋네.
“너무 흥분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부부인 마님. 부디 존체 보중하시지요. 그럼 이만 소인은 물러가옵니다.”
윤서는 방금까지 반말은 언제 했냐는 듯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이고 그 자리를 떴다.
“네, 네 이년! 네가 감히 지금 나에게 협박을 한 것이냐?”
윤씨가 대노해 펄펄 뛰었다.
“예? 협박이라니요?”
윤서가 깜짝 놀라는 얼굴로 윤씨를 돌아보았다.
“방금 네년이 내게 협박을 했지 않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바, 방금 그, 그······.”
윤씨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자신을 바라보며 맑게 웃는 윤서, 아니 다시 보니 서늘하게 웃는 그 눈을 보면서, 윤씨도 이젠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일부러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게 이야기한 것을 이용했다는 것을.
아무리 화를 내고 당장 중궁전으로 달려가서 고변을 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무고를 했다고 윤서가 둘러대면 할 말이 없을 것임을.
누가 믿을 것인가.
한낱 나인이, 부부인 마님에게 막말을 했다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했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저년,
저년을 절대 그냥 두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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