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평온하고 따스한 일상을 위하여, 투쟁!
“전하, 근자 기근이 심해 굶주린 백성들이 쉽게 병이 들어 혜민국에 병자가 많다 들었습니다. 소인이 미천한 재주로 비누와 자운고란 연고를 만들어 병이 확산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세종께서 끝내 수양 대군이나 다른 아들을 지키고자 하실 것이란 건 성품의 일관성 면에서 예상 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도와 왕위에 올린 처가 민씨 가문과, 계모 강씨 가문을 도륙한 냉철하고 박정한 태종께서 세력이 너무 커진 며느리 심씨 가문, 국정을 농단하는 기미가 보이는 이숙번 등의 공신까지 가차 없이 쳐 내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렸다면.
어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여 새로운 문자까지 만드시고 여노비에게 백 일의 출산 휴가까지 챙기시는 세심한 애민 군주가 하물며 아들을 내치실 리가.
그러니 세종께선 세종의 일을 하시고, 나는 내 일을 할 수밖에!
윤서는 서늘한 진실을 뼈아프게 인지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머리를 굴렸다.
원래 역사대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향이 오래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홍위가 장성하여 보위에 오를 수 있다.
이향이 오래 살려면 무엇보다 종기 치료약의 개발이 시급하다.
윤서는 자운고의 항생, 항염 성분을 더욱 강화한 고약의 개발과, 개발한 약을 임상에 적용해 볼 수 있는 방안을 고심했다.
아! 있다!
명문과 실리를 모두 추구할 수 있는 곳.
“전하, 세자 저하와 동궁전의 이름으로 혜민국에 나가 병자를 돌볼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십시오.”
“···혜민국에?”
되물으며 세종은 이틀 전 써본 비누를 떠올렸다.
확실히 몸이 깨끗하게 잘 닦여 근질근질하게 부스럼 기운이 있던 것이 많이 덜 해졌다.
또 자운고라는 걸 바르니, 조그만 뾰루지 같은 것은 확실히 금방 없어지기도 하였다.
“좋다! 지금 위의 관리 서넛 빼고 나머지는 무당들이나 승려가 주로 맡아서 하고 있는데, 왕실에서 나서서 하는 것도 좋지.”
애민 군주답게 전하께서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덧붙이셨다.
“수양 대군과 함께 하거라!”
“예에?”
이 무슨 개 같은 말씀이란 말인가!
정신없이 어심을 헤아리는 윤서에게 전하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영민한 너이니 내 뜻을 잘 헤아릴 것이다.”
"···예, 성심을 다하여 전염병을 예방하고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겠습니다.“
윤서는 윤서의 일을 하기로 결심했으므로 전하의 어명을 일단 공손히 받잡았다.
*****
“그러게 내가 후궁 품계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궁전으로 돌아온 윤서가 엄 상전과 박 상궁에게 천추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엄 상전이 얼굴을 찌푸리고 타박했다.
“자네가 나인에 불과하니 수양 대군처럼 왕실 자제를 붙여야 한다는 어명을 내리신 걸세.”
“흥, 우리 권가가 후궁이 되었으면 궐 밖에 나가서 그리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겠소? 나인 신분이니 나가서 그런 일도 한다고 나설 수 있는 것이지.”
이번에 윤서의 쪽지 주머니 덕에 평소 마음에 안 들던 나인들을 싹 물갈이하게 된 것이 지극히 만족스러운 박 상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후궁이면 우리 원손 아기씨를 못 모신다니까. 우리 권가에겐, 그리고 우리에겐 세자 저하와 원손 아기씨가 제일 중요한 것을!”
“그건 자네 말씀이 맞네만, 내 속상해서 그러네. 전하께선 어찌 그리 아들들을 골고루 공평하게 사랑하신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잘나신 대군 자가들께 너무 공공연하게 공식적인 업무까지 맡기시니. 하아, 지금이야 전하 건재하시어 괜찮다지만 나중에는······.”
엄 상전이 그간 불만이었던 것까지 한꺼번에 쏟아냈다.
“막말로 태종께선 그 부분을 얼마나 칼같이 정리하셨나? 그 덕에 우리 금상 전하께서 이리 마음 놓고 선정을 펼치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일세.”
확실히 오랫동안 저 아랫자리부터 지금의 동궁전 책임 내관까지 나름의 권력을 쟁취하며 올라온 엄자치 상전은 원래 역사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벌써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이 많으시니 백성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하실 수 있으신 거에요. 우린 우리 일을 치밀하게 하면 됩니다.”
윤서가 위로하자 엄 상전과 박 상궁이 “오호, 우리 권가는 매사 긍정적이네, 심하게 긍정적이야!” 하는 눈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번은 동궁 안에서 수양 대군의 끄나풀을 정리해낸 것으로 만족하세나. 이제 그럼, 혜민국의 병자를 관리하기 위해서 우리 동궁전에선 무엇을 하면 되는가?”
“위생 개념이란 것이 있습니다, 나리. 마마님.”
윤서는 현대 세계의 기본 상식인 위생 개념을 간략히 설명했다.
끓인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손발을 자주 씻고, 알코올 대신 아주 도수 높은 술을 만들어 소독하고 하는 것 등이었다.
“호오, 평소 궐 안에서 적용해도 좋겠구먼. 난 비현각에 우리 저하를 모시러 가겠네.”
엄 상전이 나가고, 박 상궁과 윤서 둘이만 남았다.
그러자 박 상궁은 습관처럼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중전마마께선 네 덕에 가끔 일으키시던 발작적인 우울에서 상당히 벗어나셨고, 이제 내일 윤가와 너를 함께 부르신다고?”
“예, 내일 중궁전으로 들라고 최 상궁이 전언을 보내왔어요.”
“이참에 돈으로 사람 부려대고 동궁전에 간자 심고 홍 승휘, 아니지 이제 홍 상궁을 부추겨 댄 그 윤씨 좀 내치면 좋겠다. 저만 돈 있나? 나도 돈 하면, 응?”
윤서는 재물 모으기에 정말로 진심인 박 상궁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 오랫동안 정을 주셨는데 하루아침에 어떻게 또 정을 똑 떼시겠어요. 그렇게 무정하고 박정한 분이시면 오늘 저를 어여뻐하신다 해도 내일도 어여뻐하시리라 믿을 수 없지요. 인간사 모두 다 그러합니다, 마마님!”
“하이고, 부처님 나셨네, 부처님 나셨어. 그래서 그 얄미운 홍 승휘, 아니 승은 상궁 홍가가 금아 아기씨를 계속 키우게 해달라 청한 게야?”
“아기는 죄가 없잖아요. 그리고 그리 오래······.”
어른들 때문에 상처받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막막한 연민에 목이 메어, 윤서는 꿀꺽 치미는 슬픔을 애써 삼켰다.
그런 윤서를 보며 “하이고, 쓸데없이 정만 많아서” 혀를 찬 박 상궁이 또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너, 저하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일이 많다. 지금 봐라. 응? 늦은 오후부턴 아기씨 먹이고 놀아드리고 토닥토닥 재워주고 난 후 저하랑 비현각에서 반 시진 뭘 또 이야기하지, 그러면 낮에라도 마음 편히 쉬어야 하는데 또 정의 공주랑 뭐하고 이제 또 천추전에 가서 뭘 해야 한다며. 거기다 혜민국까지. 하! 고급 비누랑 고운 소금으로 만든 치약이라는 거 팔 매장을 크게 차렸는데. 아무리 노산대가 수완이 좋고 물건 철저히 만든다고 해도 네가 가끔 들여다봐야 할 것 아니니!”
“돈 버는 건 마마님 전문이시잖아요. 전 새로운 물건 만드는 데 집중할 테니, 파는 건 마마님이 노산대 영감하고 같이 하세요. 어차피 이익도 반반 나누는데.”
“···돈도 다 내가 댔는데. 에휴. 하긴 그 물건들이 물건이긴 하지. 암만. 매향이가 비누 작은 조각이랑 가루 치약 기생들하고 또 거기 오는 뚜르르한 가문의 사내들한테도 돌리고 있으니 조만간 주문이 폭주할 거다.”
주먹만한 거 한 덩이에 면포 두 필이나 하는 비누와 대나무 통에 넣어 구운 소금 가루 치약이 곧 동날 정도로 팔려나갈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짓던 박 상궁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시더니 은밀하게 또 물으셨다.
“그런데 저하께선 진짜로 네게 손끝도 안 대시니? 아무리 기우제 때문에 몸을 삼가신다지만, 사내들은 그렇게 못 참는다는데. 저하께서 도로 예전의 그 금욕남으로 돌아가신 거 아니냐?”
“그럼 마마님은 더 좋으시잖아요. 보모 나인에서 보모 상궁으로, 또 우리 아기씨 훗날 임금까지 되시면 더 출세할 것이고요. 덕분에 마마님이랑 더 재물도 많이 쌓을 것이구요.”
윤서가 놀리자 박 상궁이 복잡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그것이 제일 좋긴 하다만. 또 네가 딱 한 번 그리 요란하게 승은을 받고 나서 평생 소박을 맞는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또 영 마음이 쓰라리구나. 아, 권가 너 때문에 내가 너무 복잡하게 매양 마음이 쓰인다.”
“그게 바로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랍니다.”
윤서는 웃으며 박 상궁을 껴안았다.
박 상궁은 징그럽다면서도 밀어내진 않으셨다.
****
“모두 다 물러가거라. 한 상궁 자네도.”
그날 저녁 수라에서, 수저와 젓가락 한 벌과 밥과 국 한 그릇을 더 가져오라 명하신 세자께서 수라 시중을 드는 나인과 기미 상궁까지 싹 다 물렸다.
법도가 아니라고 버티던 한 상궁까지 나간 후 자선당 서온돌에는 이향과 홍위, 그리고 윤서만 남았다.
“윤서야, 너도 함께 먹자.”
“···저하. 저는 아까 미리 먹었어요.”
“그래도 먹자. 오늘 힘들었지 않느냐?”
천추전에서 전하를 뵈었던 일을 이향이 다정하게 위로하자, 홍위가 윤서 무릎에 앉으며 거들었다.
“거가 나잉야, 먹다. 가치 먹다! 아밤마아, 내이도 가치 머거요?”
“내일도 같이 먹고 싶니?”
“예, 아밤마아. 거가 나잉이낭 가치 먹고 시퍼요.”
“안 돼요. 안 됩니다, 저하. 기왕 오늘은 이리 되었으니 제가 먹겠지만 내일부터는 아니 됩니다. 동궁전에서 궐의 법도를 함부로 무시한다는 말이 밖으로 나가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전하께서 혜민국의 일을 수양 대군과 함께 보라고 명하시는 걸 듣고 윤서는 깨달았다.
세자의 지위라는 것이 참으로 미묘하고 겉보기와 달리 위태롭다는 것을.
임금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멀쩡한 세자를 폐하고 다른 잘난 왕자를 올린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막아설 이는 없다.
뒤주에 가두고 팔 일을 굶겨 죽이는, 박정하고도 무도한 임금도 있는데.
전하께서 절대 그리하시지 않으시고 이향도 탄탄하게 조정을 장악해가고 있지만, 굳이 없어도 될 흠결을 만들어 구설에 오를 필요는 없다.
“저를 위로하시는 마음은 기쁘게 받겠습니다, 저하. 감사해요.”
윤서가 말하자, 이향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끝까지 윤서를 지키겠지만 자잘한 부당함까지 다 막아줄 수는 없는 데서 오는 미안함의 몸짓이었다.
이날 저녁 수라는 여염의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수다스럽고 정이 넘쳤다.
홍위는 낮에 중전마마께서 이만한 잉어 한 마리를 연못에 잡아다 넣어주셨다면서 양팔을 쭉 펴 보였고, 또 사흘 후 누이 평창 군주가 드디어 오면 중전마마와 함께 경회루 연못으로 낚시 놀이를 가기로 했다면서 눈을 빛냈다.
“눈나도 연난리기 가티 하다, 거가야.”
하고 미리 꼬리가 붉은색으로 긴 연을 두 개 만들어 달라는 말도 했다.
이향은 묵묵히 홍위 앞에 놓인 생선 가시를 서툴게 발라내 홍위와 윤서의 밥 위에 놓아준 후, 자신은 두부 부침과 연근조림과 여러 채소 반찬을 먹었다.
‘정말로 식구(食口)가 된 것 같아.’
식구, 밥을 함께 먹는 사이.
이런 평온하고 따스한 일상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투쟁할 만하다고, 윤서는 문득문득 목이 메는 가운데 생각했다.
******
그리고 다음 날 중궁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