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화. 권가를 대하는 세종의 자세 (2)
윤서는 면으로 된 속저고리와 속바지를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새삼 생각했다.
천추전에 들어 세종을 알현하는 동안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지 않은 날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땀을 잘 흡수할 수 있는 속옷을 갖춰오길 잘했다고 속으로 절규하며 윤서는 오늘도 납작 엎드렸다!
세종은 엎드려 벌벌 떠는 권가를 무심히 보며 하문하셨다.
“내게 고할 말은 없느냐?”
“고할 말이라 하시면······.”
“네가 썼다가 파기한 이 문건들, 정녕 그냥 숨긴 것 뿐이더냐?”
큰 소리도 아니고 조용한 물음이셨다.
하지만 윤서의 등골에 식은땀은 벌써 비 오듯 뚝뚝 떨어졌다.
목이 탔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렇사옵니다. 제가 수를 쓴 것이옵니다.” 고하는 건 “저를 전균처럼 죽여주시옵소서.” 고하는 것과 같다.
“소인은 그저 원손 아기씨께 생긴 일들이 너무 답답하여···, 속을 끓이다가···. 죽여주시옵소서.”
윤서는 다시 납작 엎드렸다.
“······.”
잠시 침묵이,
죽을 것 같은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느린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렀다.
이윽고 전하께서 다시 물으셨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
윤서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여 세종을 바라보았다.
“감히 원손에게 불경을 넘어 해꼬지를 하고자 한 흔적들이고, 내가 조사해 본 바, 권가 네가 쓴 글에는 거짓이 없었다. 어찌 처리하면 되겠느냐?”
미치겠다!
그걸 왜 나인 나부랭이인 나 따위에게 물으시는 거냐고.
왕이신 당신께서 알아서 도끼든 칼이든 휘둘러서 다 치우시면 되지!
“소인이 감히, 어찌, 윗전의 일에 의견을 섞겠습니까? 하문을 거두어 주소서.”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정녕, 윗전의 일에 네 의사를 섞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냐?”
이런! 이제 보니 전하께선 내게 앞으로 까불지 말라 경고하고 계셨다.
아아, 정말로 너무 무섭다.
“전하, 분수에 넘치는 일은 스스로를 망치고 주변까지 망치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
물끄러미 윤서를 내려다보던 세종은 무거운 음성으로 마지막을 눌렀다.
“오늘 내게 했던 말, 분수를 지키겠다는 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고 기억하겠다고 약조할 수 있겠느냐?”
“예. 그리하겠습니다.”
윤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방금 전까지 허둥대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윤서의 모습에 세종은 묘한 표정으로 윤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셨다.
“내, 너를 지켜보마. 거기 엄 상전 있느냐?”
“예, 전하!”
“평소 원손을 업수이 여긴 것으로도 모자라 함부로 원손의 거처를 뒤져 무고한 고변을 한 홍 승휘의 품계를 박탈하고, 승은 상궁으로 내려 허름한 전각에 유폐시켜라!”
“예, 전하!”
“또한 중전께 내명부의 기강을 어지럽힌 자들을 모두 찾아내어 엄히 기강을 세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라 전하거라.”
“예, 전하!”
오, 드디어!
숨죽이고 엎드려 있던 윤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치고 싶었다.
쪽지를 찢으며 계획했던 일들이 세종의 말씀을 빌어 이루어지고 있었다.
윤씨, 수양 대군!
늬들, 다 죽었다 복창해라!
그리고 윤서는 세종을 훔쳐보면서 또 생각했다.
‘분수에 넘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약조는 지키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이제부터 제가 하는 일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홍위를 지키기 위해 음모를 꾸며 적을 파멸시키는 것이 어찌 분수에 넘치는 일일 것인가.
상전? 위대한 임금?
내 사전에 그런 건 없다.
우리 홍위를 지키며, 또 나아가 이향을 지키며 살아남아 이 조선에서 보란 듯 잘 살고야 말 것이다.
의기양양해하던 윤서는 문득 한 가지가 걸렸다.
“전하, 한 가지 어려운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하거라.”
“금아 아기씨를 홍 상궁께서 계속 돌볼 수 있도록 성은을 베풀어 주십시오.”
“···왜?”
“몸도 정신도 약한 아기씨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왜 생모와 이별해야 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 길게 살지 못하는 가여운 삶에, 이별의 고통까지 가하는 것은 너무 잔혹한 일입니다.
윤서가 덧붙이지 않은 침묵의 뒷말을 알아챈 세종은 놀란 눈으로 권가를 더듬다 불현듯 말씀하셨다.
“묻는 것에 솔직하게 답하거라.”
“···예, 전하.”
“네가 중전께 부린 재주가 대체 무슨 주술인지 고하거라.”
“주술이, 아닙니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한고비 의도한 대로 잘 넘어가나 했더니, 왜 또!
여기서 주술로 걸리면 진짜 죽음이 디폴트고 그나마 운이 좋으면 성수청에 끌려가 국무당 노릇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럼 우리 홍위는! 이제 마음에 정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향은!
“그건 일견 주술처럼 보이나 정신적 충격의 여파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극적인 효과를 보이는 희귀 치료 요법일 뿐입니다.”
“하! 주술이 아니고서야 어찌 수십 년간 부처님께 빌어도 안 되던 것이,”
“제가 전하께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응?”
“제가 전하께 설명드릴 터이니 한번 직접 해 보소서. 시간은 이 각 남짓 걸리고, 전하께선 떠오르시는 생각을 입 밖으로 말씀 안 하셔도 되옵니다.”
“오호!”
이거야말로 세종이 바라시던 바였다.
권가의 지식 밑천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세종은 검증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이미 홍위를 홀리고 세자를 홀리고 수양 대군의 처를 지극히 어여뻐하던 중전마저 홀린 권가가 작정하고 다른 이들도 홀리게 되면, 그러면 장차 조선의 장래에 막대한 정신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권가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두루두루 총애받는 세자의 반려로 기꺼운 일일 것이나, 권가의 행동거지와 지식은 때로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군주는 본능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지식과 그 힘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설명해 보거라.”
윤서는 상체를 일으켜 깊게 심호흡을 하며 세종 앞에서는 도무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다고 탄식했다.
세종만큼이나 잘난 이향이 왜 평소 옷깃 하나 흩트리지 않고 살아왔는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세자 아들도 그렇게 긴장하며 살아온 위대한 세종 앞에서, 고작 이향의 사랑 하나로 든든한 울타리를 얻었다고, 중전마마의 작은 호의 하나를 얻어냈으니 우리 홍위의 앞날은 탄탄대로라고 안도했던 요 며칠이 우스워서 눈물이 다 나려 했다.
어쩐지.
반지가 손가락에서 한사코 안 빠지더라니.
이향에게 현대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쭉 그의 여인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다음 날, 윤서는 동궁전 북쪽에 있는 우물에 반지를 던져 넣으러 갔었다.
가져가기 쉽게 손가락 약지에 끼었는데, 우물 앞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아직은 그렇게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듯 강력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손가락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반지가 처소로 돌아와 뺐을 땐 훌렁 나왔다.
그래서 윤서는 다시 반지를 속바지 허리춤 속에 넣고 꿰매어 반닫이 장 속에 잘 넣어두었는데.
그것이 현덕 왕후 귀신이 해준 나름 친절한 경고였구나.
야사에서 세조에게 침을 뱉어 문둥병자로 만들었고, 그의 아들 도원군도 죽게 만들었다는 그 대단한 현덕 왕후 귀신도 여기 세종 대왕만큼은 두려워서 꿈에라도 나타나 호소 한마디를 못 했구나.
네 아들 수양이 내 아들 홍위를 장차 어떻게 죽이는지 피눈물 흘리며 한마디만 울부짖었어도 내가 여기 끌려와 이 개고생을 할 일이 없을 텐데!
겨우 정리했던 마음이 다시 공포로 아우성을 쳐 윤서는 눈을 감고 힘껏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짭짤하게 퍼져나가는 피의 맛을 다시 지렛대 삼아 윤서는 천천히 깊게 일곱 번의 심호흡을 했다.
눈을 떴을 때 윤서는 심리 상담가의 직업적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전하, 이 요법은 제가 아주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혼자 걷다가 우연히 눈동자를 막 굴려보았는데, 그때 신기하게도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이 확연히 줄어들었던 경험에서 고안해 낸 것입니다.”
윤서는 원래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기법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 EMDR)’이란 긴 명칭을 가진 요법을 고안해 낸 미국 심리학자의 경험을 자신의 것인양 빌려 말했다.
처음 EMDR이 등장했을 때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약물이나 상담 요법으로 해결되지 않던 트라우마나 해리 등의 문제가 극적으로 좋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주술이나 기이한 술법처럼 취급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눈을 감으시고, 눈동자를 좌에서 우로 왔다갔다 하시면서 전하께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시되,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각만 하셔도 좋습니다.”
윤서는 세종께서 말씀하지 않으시길 오히려 바랐다.
상담 치료가로서 올바른 직업적 태도가 아니지만, 15세기 천재적인 절대 군주 앞에서 직업윤리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꽁꽁 눌러둔 고통의 순간을 아는 자를 절대 군주가 살려두고 싶으시겠는가.
“······.”
예상한 대로 절대 군주 세종께서는 안구 운동을 하며 떠올린 고통의 기억을 입 밖에 내어 말씀하지 않으시고, 미간을 온통 찌푸리신 채 자신만의 고통 속에 침잠하셨다.
“전하, 평소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때 전하께선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그 방법을 행하면서 기억이 유발하는 감정과 느낌을 주목하세요.”
“······.”
대답을 하진 않으셨지만 전하께선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하셨다.
이런 식으로 이 각 동안 열 번 가량 윤서는 안구 운동과 잠시의 휴지기를 가지는 요법을 설명했다.
천재답게 말로 된 설명만으로도 어느 정도 감을 잡으신 것 같아, 윤서는 요법을 정리하며 말씀드렸다.
“원래 단 한 번에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고, 여러 번 좀 더 길게 시행해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꾹꾹 눌러둔 채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오실 만큼 강인하신 분이시기에 한 번만으로도 눈에 띄는 효과를 내었지만, 몇 번 더 시행하면서 기억을 긍정적으로 더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윤서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신 전하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
문득 세종도 인간이셨구나, 한 줄기 연민이 들었다.
불세출의 천재 만고의 성군이시라고 왜 묻어둔 고통이 없으시겠는가.
권력의 크기만큼 더 큰 고통을 인내하며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성군의 치(治)를 기어코 이뤄내신 것이겠지.
그렇지만 지금 세종의 어심을 헤아리기엔 윤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기만 한 자였다.
이윽고 눈을 뜨신 전하께서 문득 말씀하셨다.
“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잘 모릅니다. 우연히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발견한 것이고, 여러 궁인들에게 시험해 보며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했을 뿐입니다.”
현대 지식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기가 어려워 일단 부정했다.
“네가 정의 공주랑 함께 쓴 육아보감 초본 말이다. 이제 완성본을 내야 하니, 초본이 다 완성되면 여기 천추전으로 오거라.”
“···예, 전하.”
“와서 네가 쓴 육아보감 초고에 내가 제기하는 의문 사항을 추가하여 최종고를 내거라.”
“···예, 전하.”
세종께선 지금 당장 캐묻는 대신 조근조근 하나하나씩 윤서의 지식의 근원을 몸소 밝혀낼 생각이셨다!
‘전하는 윤씨를, 수양 대군을 끝내 놓지 않으시겠구나!’
윤서는 두려움 속에서 세종의 의중을 읽어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술수에도 불구하고 세종께서 끝내 수양 대군도 윤씨도 경계하지 않으신다면!
그럼 세종께선 세종의 일을 하시고 권윤서는 권윤서의 일을 하면 된다!
팽팽 머리를 굴리던 윤서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전하!”
그렇게 두려워하다가도 거짓말처럼 담대해지는 권윤서의 씩씩한 음성이 천추전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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