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권가를 대하는 세종의 자세 (1)
권가가 잘게 잘게 찢었던 종이의 복원은 실은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
천 상궁이 개발새발 쓴 권가의 종이 세 장의 내용을 복원하였을 때, 그 내용을 확인한 세종께선 당장 권가를 불러들이고 동궁과 명례궁에서 일어나고 있을 혼란을 수습하려 하셨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홀로 새 문자 창제부터 음악 이론까지 만들어 낼 정도의 불세출의 천재 세종께 무엇인가가 걸리기 시작했다.
걸리는 것,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끝을 파헤쳐 전모를 파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종께선 나흘째 되는 날 그 쪽지를 들고 중궁전으로 갔었다.
“하아, 전하! 이리되었던 것이로군요. 이런 줄도 모르고 신첩은······.”
탄식하는 중전의 눈빛은 뜻밖에도,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맑고 은근하였다.
“중전······!”
세종은 놀라 유심히 중전을 살폈다.
즉위 초 그 말 못 할 비극을 겪고 나서 중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대군 시절 자신을 대하던 것과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끝없이 펼쳐지는 자신의 호색 행각을 관대하게 보아 넘기고, 신빈을 비롯한 첩과 그 소생에게도 공평하게 너그러웠다.
자신이 어여뻐하는 후궁을 따로 불러 더욱 성심껏 전하를 모시라며 격려하고 패물을 하사하고 보약까지 지어주는, 천하에 다시 찾기 어려운 현숙한 왕비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을 섞고 살아온 지아비로서 세종은 중전의 태도에서 대군 시절 자신에게 보여주던 생생한 친밀감이 사라진 것을 어찌 느끼지 못할 것인가.
그 심적인 거리가 오늘 중전의 눈빛에서 사라져있었다.
“중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세종의 물음에 소헌 왕후는 그 옛날 처음 혼인하였던 시절의 부인, 명문가 귀한 소녀일 때처럼 얼굴을 살풋 붉히더니, 세종의 손을 친근하게 잡았다.
“부인.”
이 또한 그날 이후 없던 일이어서 세종은 저도 모르게 ‘부인’이라 부르고 말았다.
중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명례궁 며느리가 들었던 날, 실은 신첩이 또 그 발작을 하였었습니다. 그때 우리 권가가 신첩을 꽉 안아준 후 손등을 톡톡톡 두드리더군요. 그러자 전에는 그날, 저의 아버님이 참혹하게······.”
“부인!”
세종은 놀라 중전이 잡은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중전이 먼저 그날의 일을 꺼낸 것은, 특히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지 않고 꺼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전께선 발작적인 분노를 표하는 대신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감은 눈꺼풀 위로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눈동자를 굴리며 심호흡을 한 중전이 다시 눈을 떴다.
눈동자는 여전히 고통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의 격렬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고통과 더불어 젊은 시절에만, 그 비극이 있기 전에만 보여주었던 친밀함이 눈빛에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권가가 손등을 두드리고 눈동자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게 하자, 처음으로 내 몸이 그날의 비극이 지나간 것을 인지하는 듯 했습니다, 전하. 전에는 그날의 일이 떠오르기만 하면 온몸이 굳고, 그날 느꼈던 비통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숨조차 쉬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그날이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이고, 내가 계속 그날에 잡혀 살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안타까워하시리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소헌 왕후가 세종의 손 위로 다른 손 하나를 더 겹쳐 따스하게 감쌌다.
“신첩만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전하께서도 그 시절 힘들었구나를 비로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나 색을 밝히는 전하께서 제가 전하를 받아들이기까지 다른 여인을 안지 않으셨지요. 그때야말로 한창 혈기왕성하실 때였는데.”
“···중전.”
다정한 질책이 섞인 중전의 말에 세종은 무어라 말로 하지 못할 감동을 느꼈다.
일평생 중전의 아버지와 숙부가 아바마마 태종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너무도 미안해서, 그 미안함 때문에 자신도 중간에서 고통스러웠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는데.
“전하도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렇게 지아비의 고통까지 헤아리신 중전께서 권가가 바쳤다는 ‘비누’란 것으로 목욕까지 하도록 해주었다.
직접 비누를 칠해 닦아준 것은 아니지만, 목욕 시중을 드는 나인에게 어떻게 칠하고 헹궈드려야 하는지 부드럽게 명하는 중전을 보며 세종은 이것이 ‘주술’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오히려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그간 수없이 많은 절에 종류도 다양한 부처님 앞에서 절하며 기도해도 나아지지 않던 중전의 냉담함이 권가의 손길 몇 번과 우스꽝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는 동작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다니.
더 나아질 실마리가 확실히 보이다니!
“전하, 신첩은 요새 홍위가 못 견디게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여쁜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런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상상해보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하면서 환하게 웃는 중전이 평창 군주가 궐에 오면 중궁전에서 직접 돌보면서 어미 없이 사가에서 자란 가여운 마음을 할미로서 보듬어 주겠다고 할 때엔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세종은 권가가 사악한 술법을 쓰는 것은 분명 아니나 사악한 술법보다 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랜 심복인 제조상궁을 불러 그간 권가가 보인 행동을 수집하고, 또 세자가 전과 달라진 행보에 무엇이 있는지 상세히 알아 오라 명했다.
“권가 나인은 원손 아기씨를 지극히 위하는 것도 맞고, 아주 빠르게 세자 저하의 절대적 총애를 차지하게 된 것도 맞습니다, 전하. 하오나 행동거지가 유달리 대범하고 거침이 없고, 기이합니다.”
천추전에 든 제조 상궁이 상세히 고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기이하지. 벌벌 떨다 갑자기 자기를 안고 토닥거리더니 눈빛이 당당해진 것도 참으로 기이했어.”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심지어 홍 승휘가 낳은 금아 아기씨까지 지나가다 만나면 무릎을 꿇어 눈을 맞추고 자꾸 말을 걸어 유심히 살피며 무얼 가르쳐 주려고 한다고 합니다. 홍 승휘가 제가 무슨 세자빈이라도 된 것처럼 군다고 이죽거리는데도 말입니다. 한 번은 또 원손 아기씨가 금아 아기씨를 권가에게서 떨어지라며 밀치시다가 권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으셨다고······.”
“감히 원손을 혼을 냈단 말이지? 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기가 막혀 중얼거리던 세종은 문득 “하긴 내 앞에서도 눈 똑바로 뜨고 할 말 다하는 권가니, 어린 홍위는 뭐.” 하고 혀를 차셨다.
그렇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이질적인 권가의 모습을 확인해주는 말뿐이었다.
심지어 정의 공주까지 “권가는 겸손한데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단 말이지요. 작정하고 아는 거 말하면 어떨까 궁금해요, 아바마마.” 하고 평했었다.
세종은 세자 이향을 불러 “네가 새로 만들어보라고 했다는 그 신기한 총통도 권가가 귀띔해 준 것이냐?” 하고 묻고 싶은 걸 한사코 참았다.
귀띔해 준 것이라고 대답하면 대체 권가는 어떻게 그런 걸 알게 된 것인지 추궁해야 하고 또 세자는 어디까지 권가에 대해 알고 있는가도 물어야 하는데, 만약 우리 향이가 권가를 무작정 좋게만 보고 있다고 하면!
“권가는 향이의 여인이에요, 전하. 향이가 권가를 만나 얼마나 얼굴이 밝아졌는지, 또 우리 홍위는 얼마나 명랑해졌는지 보시잖아요. 행여 권가가 전하 마음에 드시지 않더라도 입 꾹 다물고 계세요.”
중전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세종께서는 어서 권가를 불러 복원한 종이를 들이미는 것과, 중전에게 행한 주술처럼 신기한 지식의 근원을 추궁하고 싶은 마음 등으로 여러 가지를 따져보시고, 엿새째 되는 날 결국 더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게 되어 새로 임명한 대전 내관을 시켜 권가를 천추전으로 불러오게 하였다.
*****
윤서가 천추전으로 갈 준비를 할 때 홍위를 중궁전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중전마마의 지밀 최 상궁이 은밀한 목소리로 중전마마의 명을 전했다.
“전하께서 무얼 추궁하시면 무조건 송구하다고 고개를 조아리시라 하셨네. 전하께서 자네에게 무언가 의구심을 품고 계시는 듯하다고, 중전마마께서 걱정하고 계시네.”
홍위는 이제 정서가 많이 안정되어서 윤서 없이도 혼자 중전마마께 잘 놀러갔다.
이날도 윤서에게 폭 안기며 “거가 나잉야, 할마마아하고 낙찌하고 오께.” 속삭이고는 씩씩하게 최 상궁 손을 잡고 아장아장 중궁전으로 갔다.
홍위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던 윤서의 시선은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생각했던 대로 된다면 왕실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고, 자신에게 역풍이 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음이니.
쪽지의 내용을 세종께서 직접 보신다면 혹 노여워하실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아들의 여인을 죽이기야 하시겠나 하고 엄 상전과 매금이와 함께 천추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
“권가 네가 쓴 것이 맞느냐?”
천추전 안에 들어가 절을 올리고 엎드렸을 때 윤서 앞에 천 상궁이 복원한 종이 세 장과, 그 내용을 다시 깔끔한 붓글씨로 정서한 종이 세 장이 놓였다.
천 상궁은 윤서 앞에 종이를 여섯 장 놓아두고 주상 전하 뒤 서책과 자료가 어지럽게 쌓인 뒤의 공간으로 없는 듯 새어들었다.
“예, 전하.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속상한 마음을 누구에게 토로할 길이 없어 홀로 끼적거린 것이 이 사달을 만들게 되었으니,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래. 토로할 수 있지. 홍위의 보모 나인으로 홍위가 당하는 설움을 어디 하소연을 못해 혼자 끼적거리며 속상해할 수 있지. 그게 뭐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그런 걸 뒤져서 저주를 건 흉물이라 고한 자들이 잘못이지. 아니, 그렇느냐?”
“···예, 전하. 하오나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제가 공연히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러하였다.
조선에 영영 뿌리를 내리기로 한 후 윤서는 반드시 살아남고자 하였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바탕을 바탕으로 한 걸음 앞을 내다보고자 했다.
해서 원래는 자신의 내심을 썼다가 찢어 숨기던 곳이 위험함을 깨닫자, 오히려 거기에 함정을 파 놓기로 한 것이다. 원래 자신이 썼떤 내용은 모두 없애고, 홍위가 윤씨와 홍 승휘에게 당한 설움을 상세하게 적어 찢은 후 주머니에 넣고, 눈에 띄게 살짝 상판을 비틀어 두었다.
그 주머니가 이렇게 세종께 바로 올라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누구의 손에 들어가 복원이 되든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이향을 보면서 설렌 심정도 살짝살짝 함께 적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에 적어두었던 것이 모두 사실이렷다?”
“그, 그러하옵니다.”
“감히, 원손을 이리 대한 것이 모두 사실이란 말이지?”
“송구하옵니다.”
윤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 아래서 윤서는 살풋 웃었다.
그래, 이걸 위해서 쓴 술수지. 전하께서 원손을 그리 대한 것을 알게 되시면, 그것도 고변이나 다른 것도 아닌, 답답하여 적었다가 찢었던 그 내용을 보셨다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반복되는 일을 찢었다가 다시 적었던 그 절절함을 보시고 어찌 노하지 않으실 거인가.
너희 이제 다 죽었어!
그런데.
“권가야, 세상 총명한 권가야! 네가 나라면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으면서 어떻게 생각할 것 같으냐?”
“···예?”
“너는 총명한 아이다. 그런데 그런 네가 과연 이런 내용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거기에 숨겼다가 발각되었다면, 그걸 발견한 자들이 자신의 치부인 줄도 모르고 그걸로 고변하는 과정이 과연 정상적인 것이겠느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총명한 너라면 다르지 않겠느냐? 만약 그게 역으로 그걸 노린 것이라면?”
“!”
윤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머리끝이 쭈볏 서고, 식은땀이 쭉 솟았다.
“권가, 네가 나라면 너는 어찌 생각할 것 같으냐?”
“······.”
윤서는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상대가 세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세상 사람이 다 속아 넘어가도, 세종께서는 속지 않으실 수도 있을 거란 걸.
세계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어느 날 갑자기 인위적인 글자를 홀로 만드시어 세세손손 완벽하게 잘 쓰도록 하신 천재가 세심하게 안배한 고발장 같은 쪽지가 사심 없이 흘려 쓴 개인 일기장 같은 것이라고 믿으실 리가!
아, 젠장! 젠장!
입을 열 수도 없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윤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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