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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41화 (41/255)

제 41화. 주머니 속 찢긴 종이의 여파

윤서는 엄 상전 손에 끌려가는 와중에도 챙겨야 할 것은 확실히 챙겼다.

“나리. 동궁전에 윤씨의 세작이 너무 많아요. 최가 나인도 윤씨의 끄나풀인데 발각될 것 같으니 홍 승휘한테 다 떠넘기고 자살을 당한 것이겠지요. 이 기회에 수양 대군과 윤씨의 사람들을 다 찾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자넨 그 종이 쪼가리 문제나 해결하게! 자네가 잘못되면 어머니처럼 자넬 따르는 우리 아기씨는! 겨우 여인 하나 얻어 소리 내어 웃으시는 우리 저하는! 제발 좀 신중하시게, 제발!”

엄 상전은 무섭게 윤서를 꾸짖은 후 김종서 대감과 정인지 대감이 들어 계시다는 환관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안을 향해 고했다.

“세자 저하. 아주 긴한 일로 저하를 뵈어야 합니다.”

“······.”

문이 열리고 붉은 곤룡포를 단정히 갖춰 입은 이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린 문 사이로 연분홍 단령을 입은 두 신하가 보였다.

척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단령을 지어입은 자가 정인지고, 투박한 옷감의 직령을 입은 왜소한 몸집의 신하가 김종서리라.

이향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안을 살피는 윤서를 먼저 내려다보고, 엄 상전을 보았다.

그러자 엄 상전이 이향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동궁전에서 방금 벌어진 일을 낮고 빠른 목소리로 고하였다.

“!”

한일자로 입매를 굳힌 이향이 윤서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윤서의 양 뺨을 감싸 입맞춤을 할 듯 가까이 끌어당긴 후, 귀에 입술을 대고 낮게 말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무엇이 쓰여 있든 윤서 너는, 안전할 것이니.”

“!”

윤서는 심장이 쿵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렇게 거리낌 없는 애정의 표현이 처음엔 모욕으로 다가왔지만, 한참 마음을 열어가는 지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절대적인 지지로 느껴졌다.

그 마음이 몹시 고마우면서도 세종을 상대하는 일이니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윤서는 이향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열심히 답변을 준비하겠습니다, 저하.”

“!”

“저하의 여인으로 여기 조선에 뼈를 묻기로 결심한 후, 저는 치밀해지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래야 나의 윤서지!”

“······.”

‘나의 윤서’라니!

때로 이향의 표현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닭살스러워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

“크흠!”

옆에 서 그 꼴을 보던 엄 상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평소 극도로 예를 갖추던 태도를 버리고 정신 좀 차리시라고 크흠큼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이향은 윤서의 뺨을 감쌌던 손을 풀고 엄 상전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죽었다는 최가가 평소 누구와 어떻게 접촉했는지부터 시작해, 이 기회에 동궁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들을 걸러내게. 그리고······.”

이향의 얼굴에 문득 괴로운 기색이 스쳤다.

“홍 승휘는 그대로 전각에 머물게 하되 외부와 일절 연락할 수 없게 하고, 믿을만한 이를 몇 보내 금아를 잘 보살피게 하게.”

금아.

윤서는 파리한 얼굴에 말이 어눌하고 두뇌 발달이 늦은 홍 승휘의 딸을 생각했다.

이향이 때때로 시간을 짜내 홍 승휘의 전각에 가 금아를 무릎에 앉히고 이것저것 다정하게 가르쳐 준다고 했던 박 상궁의 말도 생각났다.

“전하 저녁 수라 시중을 들고 돌아오시는 길에 잠깐 들르셔서 그 늦된 아기씨께 숟가락질이며 뭐를 가르쳐주려 애쓰신다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저하는 진짜 다정하신 분이다. 사람 됨됨이는 본시 약자와 미천한 자를 대하는 데서 드러나지 않느냐?”

이향이 마음을 썼지만 그 아이는 고작 네 살을 살고 죽었다는 실록 기록도 떠올랐다.

이런 순간에야 이향에게 다른 여인이 있고, 홍위와 평창 군주 외에도 다른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의 여인으로 드는 복잡한 심사를 한 구석에 치워놓고 보면, 과거의 인연에도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마음 됨됨이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새 인연도 시간이 흐르면 구 인연이 되고, 그래서 과거 구 인연이 받았던 대접을 똑같이 받는 신세가 될지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

윤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궁전 수습을 위해 물러가려 했다.

그러자 이향이 윤서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전하께선 분명히 네가 내게 써 보낸 종이도 보고 싶어하실 것이다. 동궁전 수습은 엄 내관과 박 상궁에게 맡기고 그걸 어찌할지 대비하자꾸나.”

그러자 엄 상전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동궁전으로 돌아갔다.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윤서가 뜰에 내려서 기다리려 하는데, 이향이 부드럽게 윤서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다. 내 두 대감께 윤서 널 소개도 할 겸, 같이 들어가자.”

“···하지만, 저하.”

조선의 현실에서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윤서가 물으려는데, 이미 무슨 우려를 하는지 알고 있는 이향이 고개를 흔들었다.

“윤서 네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저들도 알아야 한다.”

이향은 혹여 문제가 커질 경우 전하의 총애를 받는 두 대신이 윤서 편에 설 수 있도록 미리 일을 만들어 둘 작정이었다.

공물을 현물 대신 쌀과 화폐로 거둬들이는 실행안을 논의하던 세자가 갑자기 집무실을 나갔다가 서늘한 인상의 미인과 함께 돌아오자 두 대신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대신께 제가 아끼는 여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기 권가 나인은 빼어난 식견을 가져 제게 많은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공물을 쌀로 거두어 드릴 경우 파생되는 여러 문제를 우리가 함께 논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제가 그럼 쌀 대신 화폐로도 공물을 거두되, 화폐를 불신하는 백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제시한 안을 기억하시지요?”

“쌀 대신 화폐로 납부하면 5푼을 깎아주어 화폐 사용을 독려하자는 안 말씀이십니까, 저하? 그 기발한 안을 권가 나인이 제시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인지가 자꾸 윤서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맞습니다, 대감. 그 5푼 할인안을 제시한 이가 바로 권가입니다. 그래야 쌀 대신 화폐를 사용해 공납을 내려 할 것이고, 더불어 화폐 유통도 빨리 안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이지요.”

“오호!”

“허어, 저하께서 좋은 책사를 얻으셨군요.”

두 대신은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여색에 도통 관심이 없어 주상 전하 내외의 근심이 깊었던 것을 잘 아는지라 대충 세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돌아갔다.

“저하, 오늘 중궁전에서 윤씨 부인이 저하께서 절 멀리하시어 중전마마의 근심이 깊겠다고 저하를 헐뜯어서 제가 무어라 답을 했느냐면요.”

“으흠?”

윤서는 그간 제가 써 보낸 보고서 형태의 종이 뭉치를 살피다가 문득 말했다.

그러자 윤서 옆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마찬가지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시 읽어 보고 있던 이향이 윤서를 보았다.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쭉 올린 것이, 너로 인해 생겨난 이 일을 어찌할 거냐는 놀림이 분명했다.

윤서는 이향이 저리 바라보면 짝사랑하던 남학생 앞에 선 것처럼 자꾸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지금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저하께서 몸과 마음 모두 정갈히 하시느라 저를 멀리한다고 둘러대었습니다.”

그러자 이향이 소리 내어 웃은 후 윤서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시선을 얽었다.

“내 천문에 밝느니라. 달무리가 지지 않는 것 등으로 보아 이 가뭄은 적어도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 그때까지 나는······.”

이향은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여름이 지나간다면, 앞으로 두 달 이상 말입니까?”

“그래, 두 달 이상.”

“···가뭄은 군주의 행동거지와 별 상관이 없지만, 어쨌거나 제가 그리 말을 해 두었으니, 저하는 그리 하셔야 해요.”

“그래, 백성을 위해서도 독수공방할 우리 윤서를 위해서도 내 정말로 가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다해야겠구나. 이번에 내 너를 곁에 두고도 금욕적으로 몸과 마음을 삼가 기우제를 지내면 마침내 비가 올 터이니, 앞으로도 가뭄만 들면 또 같은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냐, 응?”

이향은 기다림을 다한 다음에도 이러할 터인데 어찌 수습할 거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저하, 누가 독수공방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윤서는 조선시대 내내 거의 매년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의 고초가 심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수지 확충과 수차 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셔야겠습니다, 저하. 우리나라는 산악이 험해 평지에 커다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관개하기보단 높은 지대 곳곳에 웅덩이를 파고 물을 가둬두었다가 가뭄 때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에요.”

윤서가 붓을 들어 또 종이에 무엇을 그리려 하자, 이향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여기 이 종이의 내용부터 해결하자꾸나.”

떠오르는 대로 써보냈던 종이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윤서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저하, 제가 미래에서 온 영혼이라는 건 저하만 알고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상 전하께선 처음엔 신기한 지식을 지닌 저의 존재에 기뻐하실지 모르나 나중에는 분명 제가 가진 위험성을 경계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이질적인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래 지식을 가진 윤서가 달리 마음을 먹고자 할 때 가질 위험성을 천재이신 세종께선 분명히 꿰뚫어 보실 것이고, 군주로서 당연히 경계하실 것이다.

“나도 그리 생각했다. 여기 쓴 내용들 중 인물에 대한 것은 중국의 과거 위인 이야기로 바꿀 수 있으면 바꿔놓고, 그러지 못할 것은 없애야 한다. 그렇다고 갑자기 또 써 보내던 걸 안 보내면 이상하니, 앞으로는 연서를 보내거라.”

“···예?”

“네가 중전마마께 연서를 써 보냈다고 고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름 여기저기서 듣게 된 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내고 또 짬짬이 내게 절절하게 사랑을 호소하는 연서를 보내야 윤서 네 말이 맞아들어가지.”

“······.”

유행가 가사를 써서 보내면 되려나.

후대에 저작권 문제 안 생기게 하려면 이향만 보고 태우라고 하고, 입시를 위해 외웠던 시를 적어 보내면 되겠구나.

윤서가 무얼 써보내야 할지 고민하는데, 이향이 말했다.

“써서 보내던 원래 내용은 밤에 여기 와서 말로 하거라.”

“저하께서 정무에 바쁘셔서 저 볼 시간이 없다고 써보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바빠서였겠느냐?”

“···예?”

“그게 바빠서였겠소, 부인?”

“······!”

아아.

유혹하듯 낮게 깔리는 이향의 목소리에 윤서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후 며칠간 동궁전은 내내 내쳐지는 궁녀와 내관, 새로 뽑혀오는 궁녀와 내관으로 어수선했다.

홍 승휘에 대한 처우는 전하께서 복원하신다는 쪽지의 내용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어명이 내려와 일단 전각 안에 유폐만 당했다.

또한 주머니 속 종이에 적힌 내용이 정확히 밝혀질 때까지 윤서도 동궁 내를 벗어나지 말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그래서 윤서는 낮에는 홍위를 돌보며 종이에 사랑에 관한 유행가 가사나 시를 이향에게 적어 보내고, 밤에는 비현각에 가 기존 보고서의 내용을 고치고 말로 아는 지식을 풀어놓았다.

홍 승휘에게 들었다고 하나 함부로 동궁의 일을 입에 담은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도 명례궁에서 근신하며 전하와 중전마마의 처분을 기다리라는 어명이 전달되었다.

모두 어수선한 가운데, 드디어 엿새 후 세종께서 윤서를 천추전으로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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