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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39화 (39/255)

제 39화. 소헌 왕후의 발작

“어찌 일이 그리된 게야?”

중전마마의 음색엔 근심과 책망의 기미가 배어 있었다.

군주는 노여워하는 존재이니 그의 뜻을 힘껏 헤아려 세심하게 고해 보모 나인을 얻어내라 조언해주었는데, 보모 나인 자리만 얻어내고 총애를 잃었느냐는 실망과 우려였다.

여기 조선에 뼈를 묻기로 한 후, 윤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궐 안의 여인을 살피던 소극적인 태도를 버렸다.

그러자 이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어떻게 동궁의 내궁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지가 보였다.

‘이렇게 중전마마를 교묘하게 흔들어 이향의 후궁들에게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과시해왔구나. 어차피 이향은 전하와 중전마마의 강권이 있고서야 마지못해 여인을 안았으니, 누굴 안으라고 강권할지가 여기 중궁전에 든 윤씨 입에서 결정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윤서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함께 육아서를 쓰느라 매일 한 시진씩 만나며 정이 들게 된 정의 공주가 “왕실 여인들의 정치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거네. 우아하게 후려쳐야 해. 자넨 말이 너무 거칠어 자칫 천박하단 반감을 일으킬 수 있네.” 충고했기 때문이다.

“세자 저하의 저녁 수라상에는 매일 빠지지 않고 콩과 연근, 시금치를 다양하게 조리한 소선 요리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중전마마. 원손 아기씨께서 저하와 함께 저녁 수라를 드시는지라 아기씨 수라 챙길 때 박 상궁 마마님과 수라 상궁 마마님과 함께 의논하여 고기를 대체할 수 있는 채소를 세심하게 선별해 올리고 있으니, 저하의 존체는 심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앞으로 더욱 성심을 다하여 저하의 존체를 살피겠습니다.”

그러자 중전께서는 물으신 뜻이 그 뜻이 아님에도 일단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나 윤씨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 늘 세자 저하께서 정무에만 힘쓰시고 후손을 두시는 것에 무심하신 것을 근심해 오신 걸 소첩 너무도 잘 아는 터라, 저하께서 여기 권가 나인에게 승은을 내리셨다는 소식에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매일 절에 가 권가 나인이 왕손을 잉태하게 해주십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아, 저하께서 도로 무심해지시다니요······.”

윤씨는 너무도 근심이라는 듯 매화가 아름답게 수 놓인 옷고름을 들어 눈물을 찍는 시늉을 하며 한탄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우리 어마마마의 심려가 얼마나 크실지 소첩 마음이 너무도 아프옵니다.”

군주의 잠자리조차 왕실 정치의 일부라고 말해준 정의 공주의 말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윤서가 기다린 순간이기도 했다.

윤서는 윤씨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매일 기도까지 해주시는 부부인의 노고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요. 감사함의 표시는 나중에 따로 성심껏 표현하겠습니다. 우선 이렇게나마 감사의 절을 받아주시어요.”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이마에 모으고 큰 절을 윤씨에게 올렸다.

그러자 윤씨가 피식 비웃으며 우아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어쩌나? 귀한 향을 태우고 귀한 비단을 시주하며 영험한 부처님께 기도한 보람이 없으니.”

“보람이 없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부인 마님. 언젠가는 부처님께서 부부인 마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응답을 내리실 것입니다.”

“······?”

윤서는 더는 윤씨를 상대하지 않고 중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고하였다.

“중전마마, 온양의 행궁에서 돌아오신 후 주상 전하께서는 대신들로 하여금 세자 저하께 신(臣)이라 일컫고 세자 저하께는 국왕이 하시듯 남쪽을 보며 정사를 전적으로 주관하라 명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하께서 전적으로 조정을 맡으신 후 단오 연회마저 열지 못할 정도로 가뭄이 지속되어 지금 소선을 하시며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기우제를 준비 중이신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래, 그거야 잘 알지. 그것이 우리 향이와 너의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말이더냐?”

“예, 중전마마.”

윤서의 자신 있는 대답에 윤씨와 그 뒤에 없는 듯 앉아 있는 조 전언의 얼굴에 미미한 동요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하께서 밤에 소인을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를 애타게 바라는 조선의 백성들을 위한 저하의 절제이실 뿐이옵니다. 마음과 몸 모두 정갈하게 기우제를 주관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금욕이니, 심려하지 마오소서, 중전마마.”

“!”

“!”

윤씨와 조 전언의 얼굴색이 확 변하였고, 중전께서는 비로소 안도의 빛을 회복하셨다.

윤서는 더 의심하지 않으시도록 내처 또 고하였다.

“하오나 소인은 저하를 연모하는 마음을 그치지 못해 저하께 제 연심을 담은 글을 하루에도 몇 번씩 써서 보내드리고 있어요. 저하께서도 저의 서신만은 기쁘게 받으시고 어여삐 읽고 계시오니, 중전마마께서는 걱정하지 마오소서.”

“그러하구나. 어쩐지, 향이가 어제도 아침 문후를 들어 권가 네가 볼수록 더 어여쁘다는 말을 하였더니라.”

“!”

윤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중궁전에서 이렇게 해명한 것을 조만간 이향에게 해명할 생각을 하니 쑥스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이렇게 한 걸음씩 이향에게 다가서는구나, 실감이 나기도 하였다.

윤서는 이향을 향한 떨림을 가라앉히고 다시 윤씨를 향해 반격의 칼날을 빼 들었다.

”부부인 마님께서도 이렇게 사정을 알게 되셨으니, 실망하지 마시고 중전마마와 왕실을 위해 계속 정성을 다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그리할 것이네. 어마마마, 소첩 너무 기쁘고 안심되어 오늘 입궐하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간 여인의 온기 없이 싸늘하던 동궁에도 한 줄기 봄바람이 불어오나 보옵니다.”

당황할 법도 하건만 윤씨는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정말로 너무 기쁘다는 듯 엎드려 고하였다.

강적이네, 윤씨.

그러나 이번 것은 좀 아플 것이다.

“중전마마, 소인이 지금 바로 아기씨 모시고 동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윤허해 주세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으응? 아니, 왜, 벌써? 좀 있다가 정의 공주가 올 터인데.”

“공주님은 제가 따로 뵙겠다고 전언 드리겠습니다. 너무도 급박한 일이어서 한시를 지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중전마마께서 이리 아쉬워하시는데 감히 물러가겠다고 하는 겐가?”

윤씨가 엄히 물었다.

윤서는 잡아먹을 듯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윤씨의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세종께서 ‘내 아들들을 죽게 만들면 널 죽이겠다’ 고 경고하실 때 ‘내 며느리들’을 포함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세상의 모든 이가 부부인 마님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셔서 그러합니다.”

“뭐라?”

윤서는 대답을 더 요구하는 윤씨를 무시하고 중전께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중전마마, 소인 속히 돌아가 엄 상전과 박 상궁께 동궁전의 궁인 기강을 엄히 세울 필요가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

“!”

중전마마께선 ‘아!’하는 뒤늦은 깨달음의 표정을 지으셨고, 이번엔 윤씨도 입술을 파르르 떨 정도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한번 궐에 들어온 궁녀를 윗전이 부재하시기 전에는 내보내지 않는 것은 궐 안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사정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기 위해 정하신 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보니 동궁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심지어 국본의 잠자리에 관련한 것까지 모두 다 줄줄 밖으로 새 나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네. 내가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당황해 급히 말하는 윤씨를 윤서는 싹뚝 잘랐다.

“불경한 궁인들이 우리 부부인 마님처럼 동궁의 후사를 염려하는 신실한 마음을 가진 분에게만 감히 동궁전 사정을 흘렸겠습니까? 세자 저하와 원손 아기씨의 안위와 위신에 관련된 일이니 저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자, 자네!”

“중전마마, 윤허해 주소서.”

“······!”

오랫동안 어여삐 여긴지라 윤씨가 하는 모든 말의 이면을 굳이 따져보지 않으시던 소헌 왕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며느리를 훑었다.

“······.”

권가의 말을 듣고서야 중전께선 궁 밖에 사는 둘째 며느리가 지나치게 궐 안 사정에 밝고 그 밝게 아는 것을 왕비인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밝히며 동궁전의 일에 감히 왈가왈부할 정도로 상궤를 벗어나 있단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자 요 며칠 홍위를 보면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으며, 예전 그날의 고통이, 왕실 권력 다툼에 휘말려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공포가 ······.

흐윽.

중전께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한 압도적인 느낌에 두 손으로 귀를 막으셨다.

“!”

윤서는 중전께서 이전 일의 망령에 사로잡히려 하신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챘다.

윤서는 화급히 무릎걸음으로 중전께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무, 무엇을 하는 게냐?”

방금 전 그간 철옹성처럼 쌓아온 자신의 입지가 송두리째 흔들렸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던 윤씨는 권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색을 하며 외쳤다.

저렇게 예의가 없는 것을!

저리도 궐의 예법에 어두운 것을!

그러나 윤서는 윤씨는 아예 안중에 두지 않고 중전마마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톡톡톡 손등을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중전마마, 손등에 제 손길이 느껴지십니까?”

“으, 으, 싫어. 싫다. 다 싫다!”

“중전마마, 손등에 떨어지는 제 손가락에 집중해보세요. 톡톡톡. 중전마마.”

“···나는. 나는!”

“예, 알아요. 알아요, 중전마마. 저는 중전마마의 그 말씀 못 하시는 기막힌 심정을, 이해합니다.”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중전마마, 그러니 그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혀 계시지 마시고, 지금, 여기로 돌아오세요.

톡톡톡.

갑작스럽게 촉발된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일순간에 바로 그 순간으로, 사은사로 구름떼처럼 많은 이들의 전송을 받으며 명나라로 떠나셨던 친정아버지가 돌아오시던 길에 의주에서 잡혀 와 고통스러운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기막힌 순간의 압도적인 고통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는 왕비의 의식에 톡톡톡, 손등의 손길이 느껴졌다.

톡톡톡.

그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중전마마, 지금 여기, 당신의 아들들이 무사히 장성하고 우리 홍위가 기쁨이 되는 이곳으로, 중전마마, 돌아오세요.

공포와 고통에 압도되어 마비된 이성을 깨우는 자극이었다.

중전께선 차차 정신을 차리셨다.

윤서는 손등을 두드리던 손길을 멈추고, 중전마마를 힘껏 품에 안은 채 윤씨에게 명했다.

“이만 돌아가세요, 부부인 마님. 지금은 중전마마께서 고요하게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

윤씨는 윤서를 뚫어져라 보더니 ‘오호라!’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저거, 주술을 쓰는구나.’

손등을 두드리며 주술을 쓰는 무녀든 주문을 외는 술사든, 무엇이든 저거는 왕실에 있을 물건이 아니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따른 갑작스러운 발작을 깨우는 현대의 상담 기법을 알 리 없는 윤씨는 윤서가 손등을 두드리며 중전을 깨운 행위를 주술을 쓰는 행위라 단단히 오해하였다.

“부부인 마님, 그것도 저런 것의 일종 아니겠습니까?”

조 전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윤씨에게 넌지시 귓속말을 했다.

“그거, 뭐? 아!”

그거.

저 권가 나인이 뭔가를 썼다가 잘게 찢어서 원손이 자는 방의 서탁 안에 숨겨둔 비단 주머니!

오호라! 드디어 세자의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큰 요물을 제거하게 되었다!

윤씨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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