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화.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
“할마마마, 소손 문안드리옵니다.”
“어마마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명나라 사신 일행에 따라갔던 노복이 좋은 비단을 들여왔는데 어마마마께 잘 어울릴 것 같아 몇 종류 가져왔습니다.”
짙푸른 쾌자와 금박이 박힌 검은색 복건을 쓴 의젓한 도원군과 매화 꽃무늬 수가 화려한 자색 비단 당의로 화려하게 성장한 부부인 윤씨가 중전마마를 향해 절을 올렸다.
윤서는 종이 뭉치를 챙겨 구석에 물러앉았고, 홍위는 벌써 중전께 달려가 무릎 위에 앉아 다리를 동동거렸다.
양 귀인의 전각에서 도원군을 보고 한 달 남짓만이었다.
그땐 도원군 모자만 봐도 몸을 굳히던 우리 홍위가 오늘은 눈을 동그랗게 굴리며 중전마마께 기대 여유만만이었다.
“원손 아기씨, 강녕하셨어요?”
윤씨가 홍위를 향해서도 예를 갖췄다.
“둑모님도 강넝하심니까?”
혀짧은 소리로 말하자 도원군이 피식피식거리며 “둑모님도 강넝하심니까?” 따라하고는,
“곧 책례가 있을 것이라 들었는데, 아기씨는 그때도 그렇게 혀 짧은 발음으로 말씀할 것입니까?”
점잖게 훈수했다.
그 말에 홍위는 움찔하더니, 윤서를 힐끗 보았다.
윤서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홍위는 다시 중전마마께 한껏 기대서는 짧은 다리를 동동거리며 무심히 대꾸했다.
“거가 나잉이 그랬쪄. 나능 아직 아기잉데 너모너모 똑똑해져 바음까지 완벽하먼 얌미운 아기대.”
푸하하하.
평소 소리를 내어 웃기는커녕 입꼬리조차 들어 올릴락 말락한 웃음만 지으셨던 중전께서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폭소를 쏟아내셨다.
“그래, 그래. 권가의 말이 옳다. 우리 홍위는 전하를 닮아 비상하게 똑똑한데 발음까지 완벽하면 아기 같지가 않지. 현동아, 걱정해주는 마음은 어여쁘나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너도 이맘 때 이러했으니.”
“···예, 할마마마.”
도원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윤씨는 순간 날카로운 눈으로 윤서를 일별했다.
때마침 윤씨와 눈이 마주쳤던 윤서는 그 눈빛에 담긴 어마어마한 증오와 살기를 목격하고 심장이 다 철렁했다.
저렇게 지독하게 집념이 강했으니 수양 대군을 독려해 정변을 일으키고, 훗날 아들 예종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성종을 왕으로 세우며 수렴청정을 결정했구나.
저런 눈빛을 가져야 그런 무정하고 독한 길을 걸을 수 있구나.
달리 말하면 윤서도 조만간 저런 독기를 품어야 한다는 뜻이다.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괴물의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본다' 말한 니체의 명언을 생각하며 윤서는 등줄기에 이는 한기를 의식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윤씨는 순식간에 부드럽고 온화한 낯빛이 되어 중전마마께 고했다.
“현동이가 어마마마를 무척 그리워했습니다. 오늘도 항주 비단을 보자마자 이거와 이거, 이거 할마마마께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어서 보여드리자고 재촉해서 제가 견본 몇 개 보여드리려고 들어왔어요, 어마마마.”
“오호라, 아이고 예쁜 마음이로구나. 우리 현동이, 할미한테 오거라. 오랜만에 우리 첫 손주 한 번 안아보자.”
그러자 도원군이 일어나서 중전마마께 향했다.
홍위는 몸을 비틀어 중전마마의 무릎에서 내려와 옆에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았다.
중전께서는 도원군의 상체를 몇 번 토닥거린 후 눈을 맞추고 물으셨다.
“요새는 무얼 배우고 있느냐?”
“소학을 배우고 있사옵니다, 할마마마. 또 아버님께서 글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내는 모름지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시며 승마와 함께 활쏘기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호라, 그 말이 맞다. 어릴 적부터 몸을 튼튼히 해야 평생 건강한 법이니.”
“예, 할마마마. 열심히 수련하여 아버님처럼 증조할아버님을 닮은 사내로 크겠습니다.”
도원군이 의젓하게 답을 하고 옆으로 빗겨 앉았다.
그러자 홍위는 다시 자연스럽게 중전마마의 무릎을 딱 차지하였다.
요새 며칠 매일 한 시진씩 중전마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더니 할머니를 무척 친하게 여기게 된 듯해 보고 있는 윤서 마음이 아주 뿌듯했다.
“어마마마, 세 가지 종류의 여름용 비단인데 보시겠습니까?”
“눈 높은 네가 고른 것이니 어련하겠냐만, 한번 볼까?“
윤씨가 뒤를 향해 “조 전언” 하고 불렀다.
그러자 윤씨와 함께 들어와 문가에 엎드려 있던 조 전언이 사각으로 반듯하게 붉은 색실 술까지 늘여 정성껏 포장한 청홍 비단 보자기를 중전마마 앞으로 가져가 풀어 놓았다.
보자기 안에는 비단을 전혀 모르는 윤서가 보기에도 아주 색이 고운 진보라색, 어두운 붉은색, 아청색 비단이 들어 있었다.
조 전언과 함께 다가앉은 윤씨가 하나씩 펼쳐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은 쌍희자접문사로 어마마마 당의를 지어 입으시면 아주 시원할 것입니다. 마침 아주 손이 야문 침모 하나를 구했으니 마음에 드시면 제가 당의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오호, 좋구나. 권가야, 너도 이리 와서 보거라. 이런 좋은 비단은 궐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렵단다.”
중전마마께서 구석에 없는 듯 앉아 있는 윤서가 마음에 쓰이셨는지 손짓하셨다.
“예, 중전마마.”
너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는 윤씨 곁에 다가가고 싶진 않지만 중전께서 부르시니 윤서는 공손히 다가가 윤씨 뒤에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앉았다.
윤씨는 여전히 윤서를 개무시했다.
“어마마마, 여기 아청색 사라능단은 아주 얇으면서도 올이 튼튼하고 무늬가 아주 아름다운데 어떠하신지요? 긴 저고리로 지어 입으시면 매운 더운 날 무더위를 넘기기가 수월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구나. 하지만 사라능단은 네가 가져가서 궁 안에서만 입거라. 전하께서 지나친 사치는 하지 말라 이르시니, 중전이 되어 궐에서 어찌 입을 수 있겠느냐?”
“아, 소첩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네 생각이 짧은 것이 아니라 이 어미를 위하는 네 마음이 그만큼 깊은 것이지. 그렇지 않느냐, 권가야?”
중전께서는 또 윤서에게 물으셨다.
“예, 소인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그러자 윤씨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편에 앉은 윤서를 서늘한 눈으로 훑었다.
네깟 게 무얼 알아 끼어드냐는 불쾌함이 역력하였다.
“곧 정의 공주도 올 터인데, 다과를 하면서 기다릴까? 현동아, 홍위야, 무얼 먹고 싶으냐?”
“소손은 할마마마를 뵙는 것만으로 충분하옵니다.”
“정가 주떼요. 영근 정가랑 약가도 먹꼬 시퍼요.”
도원군은 점잖게 사양했고, 우리 홍위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손가락으로 먹고 싶은 걸 뽑았다.
그걸 본 윤씨가 고개를 슬쩍 돌리고 윤서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평소 아기씨를 어떻게 모시기에 저렇게 드시고 싶은 것이 많으신 것이야.”
궐의 간식에는 꿀과 조청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 있어서 우리 홍위 충치 생길까 두려워 간식을 조절했던 윤서로서는 억울하였지만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송구하옵니다” 고하였다.
직접 동궁에 와서 참견할 수도 없는데 공연한 대거리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함마마아, 호위는 색쌕 무꼬기 낙찌하며 머꼬 시퍼요.”
(할마마마, 홍위는 색색 물고기 낚시하며 먹고 싶어요.)
순간순간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훑는 윤씨가 싫었는지 홍위는 나가서 낚시 놀이를 하고 싶다고 졸랐다.
“소인이 아기씨 모시고 나가서 놀아드리겠습니다.”
윤서가 말하자 중전마마께서 고개를 흔드시고는 홍위에게 물으셨다.
“홍위야, 자선이랑 놀 수 있지? 권가 나인은 여기서 할미랑 숙모랑 조금 더 이야기해야 하는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중전마마.
저도 홍위처럼 여기서 윤씨 부인이랑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은데요.
윤서가 속으로 소리치며 홍위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홍위야. 거가 나잉 없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려!’
그렇지만 무정한 홍위는 “네!” 씩씩하게 외치며 몸을 일으키고 도원군에게 먼저 말했다.
“형아두 가떠 낙찌하까?”
세상에.
우리 홍위가 이렇게 달라졌어요!
도원군 앞에서는 쭈뼛거리며 시선도 잘 못 맞추던 홍위가 이렇게나 당당해졌어요!
가슴이 뭉클하게 뿌듯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는데, 도원군과 함께 나가던 홍위가 몸을 돌려 소리쳤다.
“거가 나잉야. 누가 머이 때이먼 자던이한테 인너두께.”
“!”
“!”
윤서는 얼굴이 붉어져 엎드렸고, 중전께선 다시 어깨를 들썩거리며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셨고, 윤씨는 화가 나서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해졌다.
윤서가 평소 홍위에게 “아기씨, 누가 때리면 당장 저한테 말씀하세요. 감히 원손 아기씨 몸에 손끝이라도 대는 것들은 제가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저 없을 땐 자선이한테 말씀하세요!” 하고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하이고, 우리 홍위가 아주 개구쟁이가 다 되었구나. 늘 수그려 있다가 저리 철없이 밝아진 건 좋은 일이니, 새아기 너는 조금도 마음 쓰지 말거라.”
뒤늦게 윤씨 얼굴을 본 중전께서 위로하셨다.
때마침 다과상을 든 나인들이 들어왔다.
중전마마와 윤씨, 그리고 윤서와 조 전언 앞에 소반이 하나씩 놓였다.
“먹자꾸나. 마침 사리원에서 복숭아 좋은 것이 올라왔구나. 날이 가물어서 과일은 단데 농사 때문에 참으로 걱정이야. 세자가 요새 육선을 삼가고 소선만 하며 기우제를 지낼 준비를 한다는데. 권가야, 네가 우리 향이를 좀 잘 챙기거라.”
“···예, 중전마마.”
닷새 전 비현각에서 기다려 달라 청한 뒤, 이향은 윤서에게 거리를 두었다.
비현각으로 불러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상세히 캐물은 날은 단 하루였고, 그때도 이향은 늘 앉는 업무용 책상 뒤에서 윤서가 말하는 내용을 세붓으로 적기 바빠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머지 날에는 정무가 바쁘니 글로 써서 보내라고 엄 상전을 통해 명을 전해왔다.
그래서 윤서는 개발새발한 글씨로 조선시대의 성군과 암군, 폭군 등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종이를 채워 보냈고, 또 일본과 중국의 역대 위인들,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청 태종 등에 대해서 아는 대로 또 적어 보냈다.
이렇게 조선에 와서 문종께 역사를 알려드리게 될 줄 알았다면 역사 공부 좀 많이 해둘 걸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덕수 이씨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은 많이 알아 다행이라 안도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향에게 유용하겠다 싶은 걸 시도 때도 없이 적다 보면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남자애에게 연애편지 쓰던 생각이 나기도 해 가슴이 몽글거렸다.
유일하게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저녁 수라 때였다.
이향은 평소 전하의 저녁 수라를 시중드느라 동궁에서 수라를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데, 요새는 가뭄이 심해 채식 위주의 소선(素膳)을 하기 위해 동궁에서 홍위와 함께 수라를 받았다.
고기를 못 먹어서인지 이향은 날로 얼굴선이 날렵해지며 한층 더 수려해져서, 윤서는 홍위 수라 시중을 들다가도 홀린 듯 이향을 훔쳐보게 되고.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단단하고도 뜨거웠던 그 날의 밤이 생각나 얼굴을 붉히게 되고, 그럴 때만 꼭 눈이 마주쳤다.
그러면 이향은 마침 자기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윤서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웃어서 윤서는 고개를 푹 숙여 타는 듯 뜨거워지는 얼굴을 숨겨야 했다.
이향이 웃으면 홍위는 “아밤마아, 머가 재미있떠요? 호이도 알고 시퍼요.” 해서 이향을 더욱 큰 소리로 웃게 만들었다.
그래서 동궁전의 나인들은 윤서가 단 한 번 잠자리 만에 실망스러워서 승은 상궁도 못 되었다고 “보기만 좋지 먹기에 좋은 떡이 아닌 게지.” 하고 고소하다는 듯 수군대면서도 또 그래도 유일하게 세자의 웃음을 받는 걸 맹렬히 질투하고 죽일 듯 시기하였다.
이향을 생각하자 가슴이 말랑하게 설레어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싸늘한 시선을 보던 윤씨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권가 나인은 단 한 번 승은을 받고 더는 저하를 모시지 못 한다는데 어떻게 세자 저하의 안위를 챙기겠습니까, 중전마마. 저희 수양 자가도 요사이 소선을 하시며 몸을 정갈히 하시는지라 제가 여러 가지 채소로 세심하게 요리하고 있습니다. 홍 승휘 편에 조리법을 보낼 터이니, 솜씨 좋은 홍 승휘더러 저하의 안위를 챙기라 하시면 어떨까요?”
“그러하냐, 권가야?”
소헌 왕후께서 뜻밖이라는 듯 윤서를 놀란 눈으로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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