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고백’이라는 말에 윤서의 몸이 반사적으로 상담가로서의 경청 모드를 취했다.
윤서는 의자를 끌어와 이향이 앉은 책상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 앉았다.
바로 정면에 앉지 않는 것은 내담자가 시선을 자유로이 두며 생각과 느낌을 정리할 여유를 주는 동시에, 상담가가 조금 더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내담자의 언어 이외의 신체 언어를 읽어내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앉으니, 윤서는 문득 방금 전 격정적으로 상처 받은 애정을 소리쳤던 이향에 의해 빨려 들어간 세자의 연인 모드에서 인간 권윤서, 심리 상담가 권윤서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이향에게 자신이 어떤 직업인이었는지 보여주자는 마음이 들었다.
“저하, 저는 역사서를 통해, 그리고 지난 한 달 남짓의 체류를 통해 15세기 조선과 저하의 삶을 직접 보고 느꼈지만, 저하께서는 육백 년 뒤 저의 삶을 상상할 단서가 조금도 없으시지요. 하니 제가 제가 하던 상담가란 업무를 보여드릴게요.”
“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나.”
윤서가 가진 대담한 생동감을 좋아하여 마음에 품게 되었으면서도 때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을 때가 많은 이향이 기꺼이 동의했다.
윤서는 눈을 감고 천천히 일곱 번 심호흡을 하며 상담가로서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담자를 맞이할 때 늘 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놓은 후 이향을 바라보았다.
이향은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깊어진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는 이향을 위해 윤서가 먼저 말머리를 터주었다.
“저하, 저하는 어릴 적부터 장차 왕이 되실 귀한 신분이셨기에 편히 속을 털어놓을 사람이 거의 없으셨을 것입니다. 언제, 어떤 문제가 제일 답답하셨습니까?”
이향은 윤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차마 하지 못 할 말을 어서 홀가분하게 해치우고 말겠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욕망이 없어 여인을 멀리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여인을 취해도 수양이나 다른 잘난 형제들이 얻은 부인에 못 미치기 때문에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 왔다는 걸, 윤서 너를 보고야 깨달았다.”
“···아, 저하의 빈들은 모두 불행한 운명을 맞이했지요.”
윤서는 역사 속에서 이향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사특한 술법을 행하다 폐빈이 된 첫 부인과, 또 동성애로 폐빈이 된 두 번째 부인을 생각했다.
“선대에 연거푸 왕비의 가문이 참화를 입었기에 동생들과는 혼인을 적극 추진해도 내게는 딸을 줄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빈들이 너무 비루하여 안을 욕망이 생겨나지 않았다.”
입을 떼기 시작하자 이향은 윤서와 시선을 맞추고 차분차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속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자로서 나는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세 번 스승을 모시고 성현의 말씀과 제왕학을 배웠다. 학문과 수양을 통해 성군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중압감, 그리고 언제든 세자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압박감도 심하였다.”
“아, 태종 대왕과 금상 전하 모두 기존의 세자를 밀어내시고 세자가 되셨지요. 저하께선 특히 출중한 형제들이 많으셔서 더욱 그러하셨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나는 세자가 된 지 19년이 되도록 두 번의 혼인 실패에 아들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자 수양이 암암리에 세제(世弟) 대접을 받았지.”
이향은 부유하기 짝이 없고 세련되게 욕망을 드러낼 줄 아는 수양 대군의 부인은 칠칠치 못한 세자빈과 확연히 대비되어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의 환심을 샀고, 그래서 왕자비는 궐 안에서 출산할 수 없다는 엄격한 관례에도 불구하고 중전마마께선 수양 대군의 부인이 왕실 내에서 도원군을 출산하도록 하셨다는 사실과,
전하께서 이름까지 현동(賢同)이라 직접 지어주시고 원손을 얻은 듯 어여뻐 하셨기 때문에, 홍위가 태어나기까지 수양 대군은 세제로, 도원군은 원손처럼 대우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고귀한 원손으로 태어난 우리 홍위가 수양 측의 궁인들에게 암암리에 무시를 당해도 당당히 나서 편들어 주는 이가 없었다. 바로 전대와 그 전대에서도 세자가 뒤바뀐 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내가 어떻게 되면 당연히 수양이 보위를 잇게 되고, 우리 홍위가 잘못되어도 도원군이 보위를 잇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왕실의 내밀한 속사정이었다.
천성이 고귀한 이향이 암암리에 자신의 자리와 아들의 자리를 함께 위협하는 동생의 가족을 보며, 또 그들이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며, 살뜰히 지켜주는 이 없이 주눅 들어 자라는 어린 아들을 보며 홀로 삭혔어야 할 그 고독의 무게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전하께선 정말 힘드셨겠군요. 누구나 다 저하를 어렵게 여겼을 것이고, 저하 스스로도 저하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지 않을까 늘 경계하셔야 했으니, 마음을 터놓을 데도 없으셨겠지요. 아무리 상상을 해도 저하께서 홀로 감당하셔야 했을 삶의 무게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공감과 위로를 표하는 윤서의 말에 이향은 입을 한일(一) 자로 꾹 다물었다.
이런 속내를 입 밖에 내어 말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면서 또 이렇게 공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느끼는 듯했다.
“흔히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 하지요. 게다가 금상 전하께서는 역사서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뽑히시는 분이시니, 그러한 분을 임금으로, 아버님으로 두고 세자로, 아들로 살아오시는 세월이 결코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 아바마마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갈까, 아바마마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할까 나는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윤서의 말에 탄식하듯 토로하며 이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살아온 날의 무게가 한꺼번에 몰아치듯 실감 되어 버거운 듯했다.
한참 거칠게 숨을 내쉬던 이향이 이윽고 손을 내리고 윤서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내키지 않는 의무를 수행하듯 느릿느릿 말하던 어조를 버리고 격정적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다 네가 나타난 것이다. 쥐뿔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문마저 한미하기 짝이 없는 나인 나부랭이인 네가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 앞에서 홍위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으니. 아비 된 내가 어찌 너를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저하······.”
“그래서 그리 한 것이다. 네가 어떻게 느낄지는 헤아릴 여유가 없이, 처음으로 한 여인을 품게 된 조급함에 내가 네게······.”
이향은 윤서를 바라본 채 오래 침묵했다.
사랑을 오해당해 노여웠던 군주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을 하기가 어려워 입술을 달싹이다 툭 던지듯 말하였다.
“너의 세상 기준에, 무례하였다.”
무례하였다.
늘 ‘무엄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심지어 그 어린 홍위도 걸핏하면 ‘무어마다’ 할 정도로 떠받듬을 받는 이의 입에서 떨어진 무례하였다는 사과가 ‘따스하게 경청하되 감정적 거리는 정확히 유지해야 한다’는 상담가로서의 자세를 일시에 허물어뜨렸다.
“하아.”
윤서는 다리를 풀고, 눈을 꾹 감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쳐 일단 떠오르는 생각 자체를 저지하려는 노력이었다.
“······.”
“······.”
조선 땅에 영혼이 떨어지고 난 후 겪었던 수많은 모멸과 공포와 모순의 순간이 휙휙휙 머리를 스쳤다.
자신의 아들을 해치게 하면 죽이겠다고 서슬 퍼렇게 위협하면서 동시에 원손을 목숨 걸고 지키라고 명령하면서 또 동시에 아들의 밤을 외롭게 두지 말라는 어명까지를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고 내릴 수 있는 이 조선에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단장하여 사내에게 들이미는 이 왕궁에서.
군주는 노여워하는 존재이니 힘껏 뜻을 살펴 먼저 복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왕비마저 조언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진심 어린 사과에 기뻐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는 극심한 감정의 과잉에 압도되어 윤서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기 위해 애썼다.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 속에 차차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무서웠고, 두려웠고, 치욕스러웠던 순간순간에 한 줌의 품위를 유지하며 꿋꿋하게 버티게 해준 작은 몸의 체온과, 목을 감아 매달리는 팔과,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힘을 주어 옷고름을 잡는 홍위 외에도.
걸쭉한 입담으로 등짝을 후려치면서도 부모와 자식처럼 연대하는 박 상궁 외에도.
윤서는 눈을 떠 이향을 바라보았다.
“그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저하께서 저를 마음에 애틋하게 담으신 것처럼 저 또한 편안히 저하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날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향 당신도 내가 이곳에 발을 딛고 살만하다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제가 마침내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어, 우리 홍위를 지키는 것과 더불어 당신을 도와 더 나은 조선을 만드는 것까지 기꺼이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아!”
15세기의 조선 세자는 터지는 흐느낌을 삼키며 조용조용 기다림을 요구하는 미래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렵게 꺼낸 사과에 기다림으로 응수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이향도 불쾌해야 할지, 노여워해야 할지, 가여워해야 할지, 더 많이 사랑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거라.”
제가 온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겠다 결심하고도, 궁궐의 엄혹함을 잘 알게 되었으면서도 꿋꿋하게 믿는 바의 신념 한 줌을 저리 당당하고도 애처롭게 요구하는 여인을 얼마쯤의 감동으로도 보며,
이향은 따스한 군주이므로 마침내 관대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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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마마아, 여기, 쩜 찍으면 되옵니다.”
사흘 뒤 중궁전에서 홍위가 답답하다는 듯 중전마마께서 쓰신 글자를 짚으며 훈수를 두고 있었다.
“궁궈에 궈는 ‘구’ ‘어’에 받침 니을이 합쳐뎌요. 그러니까 요기에 쩜, 쩜 하나, 할마마아.”
중전마마께서 윤서에게 한글을 배우는데 바로 옆에서 함께 배우다가 이틀 만에 한글을 깨쳐버린 홍위는, 손주의 귀여운 짓을 보느라 부러 틀리는 중전마마께 열심히 가르침을 시전 중이었다.
“아이구, 할미가 자꾸 까먹어서 어떻게 하나. 우리 홍위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웠누?”
“열딤히, 딤쭝해서.”
홍위가 턱을 치켜들고 잘난 체를 했다.
중전께선 귀여워 못 견디시겠다는 홍위를 껴안고 뺨에 뽀뽀를 하셨고, 윤서도 낄낄 웃으면서 홍위의 엉덩이를 톡 쳤다.
그때였다.
“중전마마, 도원군과 명례궁 마님이 들었습니다.”
밖에서 최 상궁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양 대군의 아들과 부인이 왔다!
윤서는 화다닥 바닥에 놓인 종이를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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