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화. 소헌 왕후께서 말씀하시길 / 수정 완료
“우리 홍위, 할미가 보고 싶었어요?”
“네, 할마마아. 홍이는 할마마아가 쪼아요. 짐쿵했쪄요.”
홍위는 엄마 잃고 빽빽 우는 아기 고양이가 너무 신기하고 귀여웠는지, 그 때 윤서에게 배운 ‘심쿵’이란 단어를 여기저기 마구 쓰며 제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애들 앞에서는 냉수도 못 마신다더니······.
귀여운 말을 더 많이 가르쳐 줘야겠네, 우리 홍위!
“할미도 우리 홍위 보니까 너무 반갑네요. 자주자주 할미한테 놀러오세요.”
그러자 홍위는 중전마마의 목에 팔을 두르고 폭 안겨서,
“예, 할마마아. 거가 나잉이랑 매매일 논너오고 딥떠요.”
열심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순간 손주의 거침없는 애정 표현과 귀여운 말투에 얼굴 전체에 기분 좋은 웃음을 띠었던 중전께서 표정을 굳히셨다.
소헌 왕후는 목을 감고 있는 홍위의 팔을 부드럽게 풀며 “홍위야, 이제 할미 무릎에 앉겠느냐?” 하시며 홍위를 앞을 보게 앉게 하셨다.
“보모 나인 권윤서 중전마마를 뵈옵니다.”
윤서는 공손히 절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고개를 들라.”
윤서는 몸을 일으켜 소헌 왕후를 마주 뵈었다.
“······.”
중전마마의 표정은 아까 들어올 때 뵈었던 따스한 환영의 표정에서 상당히 굳어져 계셨다.
그 이유를 윤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윤서는 홍위의 손을 잡고 중궁전으로 오다 홍위의 귀에 대고 “아기씨, 중전마마를 뵈면 ‘할마마마’ 하고 가서 안기고, 보고 싶었다고 말씀드리고, 매일매일 권가 나인이랑 놀러 오고 싶다고 말씀드리세요.” 하고 속삭였었다.
영민한 홍위는 그 말을 잘해서 중전마마의 마음을 움직여야 윤서가 제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중전마마께 열심히 외워 말씀드렸다.
아이를 많이 키워보신 중전마마께선 홍위의 말이 제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 윤서가 일러준 말이란 것을 바로 눈치채고 불쾌해지신 것이었다.
애초 원손까지 부른 것이 아니었는데 함께 온 것도 손주에 대한 반가움을 밀어두고 판단하면 의도가 읽히는 불경의 일종이었다.
중전마마께서는 윤서를 찬찬히 살핀 후 문득 물으셨다.
“홍위가 권가 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구나.”
“예, 중전마마. 소인도 원손 아기씨를 무척 사랑합니다.”
“으흠?”
나인 따위가 원손을 ‘사랑한다’라는 표현은 함부로 입에 담을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소헌 왕후는 전하께서 권가를 평가했던 말씀을 떠올렸다.
“권가는 무척 총명하고 여러 가지 아는 것도 많소. 심지도 굳어 보이고 무엇보다 우리 홍위를 제 목숨처럼 아끼더군요. 어찌 보면 향이를 좋아하는 것보다 오히려 원손을 더욱 좋아하는 것도 같이 보였어요. 그런 면에서 나 또한 그 아이가 왕실의 일원으로 우리 홍위를 굳건히 보필해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하나 중전도 잘 아시지 않소? 왕손을 목숨처럼 위하는 것에 다른 의도가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러니 중전께서 그 아이를 한번 보시고, 어느 정도의 품계를 주어야 할지 판단을 해 보시오.”
그러니까 전하의 말씀은 권가가 혹시 홍위를 방패 삼아서 제 출세를 도모하는 것은 아닌지 직접 보고 판단해보라는 말씀이셨다.
워낙 금욕적이어서 왕실의 근심이던 세자가 나인 하나를 귀여워하여 가까이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나, 매사 신중하던 세자가 모든 관례와 정치 역학을 무시하고 가문도 변변치 않은 나인을 단숨에 세자빈으로 책봉하고 싶다고 나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권가가 보란 듯 홍위와 함께 와 아까 매일 같이 놀러 오고 싶다는 이야기처럼 간사한 표현을 말하게 한 것이 새삼 경계가 되었다.
“홍위야. 네가 낚시 놀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냐?”
“예, 할마마아. 낚찌 노리 쬬아해요. 거가 나잉이 낚찌때 만드어 주었떠요. 무꼬기가 하닥하닥 도망가서 풋 도게 줌어요.”
“물고기가 화닥화닥 도망가서 풀 속에 숨는다고? 그런 예쁜 말은 어디서 배웠누?”
“거가 나잉이 가으쳐 주었떠요. 짐쿵도 가으쳐 주었떠요.”
“권가야, 짐쿵이 무엇이냐?”
“심장이 쿵 떨어진다는 말이옵니다.”
홍위 입에서 나오는 표현이 모두 귀여워 저절로 새나는 웃음을 애써 지우며, 중전께서는 다시 홍위에게 물으셨다.
“홍위야, 자선이도 같이 왔지?”
“예, 자떤이 박에 있떠요.”
“여기 교태전 뒤로 돌아가면 후원에 작은 연못이 있다. 거기에 할미가 우리 홍위 놀러 오면 낚시 놀이 하라고 엊그제 색색 예쁜 물고기 구해다가 넣어두었어. 가서 자선이랑 낚시 놀이 할래?”
“······.”
열심히 대답하던 홍위가 입을 꾹 다물고 윤서를 바라보았다.
낚시를 핑계로 자신을 권가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서 벌써 울먹거리려고 입꼬리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윤서는 홍위에게 윤서가 후궁이 되어 홍위를 떠날 거라 무신경하게 단언했을 나인에게 깊은 원망을 품으며 예의를 무시하고 홍위를 향해 팔을 벌렸다.
홍위가 힘껏 달려와 윤서의 품에 폭 안겼다.
윤서는 홍위를 단단히 안고 고개를 숙이며 중전께 말씀을 올렸다.
“중전마마, 여기 교태전으로 오는 길에 하늘이 맑고 햇빛이 아주 좋았습니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시면서 우리 원손 아기씨 낚시 놀이를 구경해 보시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기씨께서 낚시를 아주 귀엽게, 잘, 하십니다.”
홍위가 불안해해서 혼자 내보낼 수 없으니, 하실 말씀은 함께 나가셔서 홍위 시야 안에서 해달라는 권가 나인의 청이었다.
“······.”
중전께선 바로 대답을 안 하시고 한참 권가를 꽉 안고 있는 홍위와, 그런 홍위를 마찬가지로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다는 듯 안고 있는 권가를 물끄러미 보셨다.
저 마음이 진실이라면 상당히 어여쁠 일이나, 저리 홍위와의 유대를 과시하여 한낱 승휘 따위의 낮은 품계를 받을 수 없다고 시위하는 것이라면!
“그러자꾸나. 나가서 볕을 보며 거닐어 보는 것도 좋겠지. 밝은 햇살 속에 무엇이든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니.”
“예, 중전마마. 소인이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윤서가 홍위의 귀에 “아기씨, 우리 같이 나가서 낚시 놀이해요.” 빠르게 속삭이고, 중전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
기민한 홍위는 신이 나서 먼저 앞장을 섰다.
“저리 좋을꼬?”
누가 안아 내려주기도 전에 뒤로 몸을 돌려 대청마루를 타고 내려가는 홍위의 밝은 표정을 보며 중전마마께서는 본능적으로 피어나는 사랑에 표정이 부드러워지셨다.
“자던아, 낚찌하자!”
뜰에 시립해 있던 동궁전의 내관을 홍위가 소리쳐 불렀다.
자선이 신을 신기고 안아서 뜰에 내려놓자 홍위는 교태전을 돌아 후원으로 뛰어갔다.
홍위가 오면 가지고 놀게 하려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낚싯대를 중궁전 지밀 최 상궁이 들고 서둘러 뒤를 따랐다.
가벼운 대나무를 잘 깎아 진짜 낚싯대처럼 줄을 매단 제법 정교한 장난감 낚싯대였다.
윤서가 중전마마를 부축해 교태전 건물을 돌자 어른 무릎 깊이의 얕은 연못 앞에서 낚싯대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며 동시에 다리를 굽혔다 폈다 서너 번 한 후에 줄을 던지는 홍위의 모습이 보였다.
줄을 던진 홍위가 깔깔 웃으며 물고기를 향해 쾅쾅 발을 굴렀다.
“무꼬기야! 둠어도 다 찾는다!”
방금까지 불안해하며 울먹거리던 원손이 권가가 지켜본다는 사실 하나에 활달함을 되찾고 함빡 웃으며 순수한 유희 삼매경에 빠져 있다.
“······.”
그 귀여운 모습에 중전마마께선 “하아!” 탄식하시더니, 낚싯대를 건네주고 돌아온 최 상궁에게 명하셨다.
“네가 날 부축하거라.”
중궁전의 지밀 최 상궁이 중전마마를 부축하고, 윤서는 두 걸음 물러나 공손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중전께서 싸늘한 어조로 물으셨다.
“그래서, 네가 그리 홍위를 ‘사랑’해서 설마 세자빈이라도 되어 홍위를 친아들처럼 키우겠다는 것이냐? 그래서 홍위를 내게 데려와 홍위가 너 없이는 불안해서 혼자서는 저리 좋아하는 낚시 놀이도 하러 가길 꺼려 한다는 걸 내게 과시하고 싶었던 게냐?”
자애로우시면서도 규율이 엄정한 중전께서 엄히 추궁하시는 바는, 윤서가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중전마마.”
윤서는 땅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이대로 아기씨를 모시는 보모 나인으로 머물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중전마마. 소인이 감히 아기씨를 모셔온 이유이옵니다.”
“무어라?”
“아기씨께서 특정 후궁의 처소에 머물면 그로 인해 후궁의 유세가 시작되고,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 아기씨께서 입게 되시는 것을 소인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제가 어찌 품계 높은 후궁을 꿈꾸고 또 감히 자격도 없는 세자빈을 꿈꾸겠습니까? 저는 지금의 보모 나인으로 머물며 아기씨께서 지금처럼 밝게 커나가실 때까지 보필하고 싶습니다.”
“···네 진실로 보모 나인으로 머물겠다는 뜻이냐? 진실로?”
“예, 중전마마. 저는 우리 아기씨를 곁에서 모시는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
세자 이향을 비롯 열 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때로 후궁들에게 유모 노릇을 맡겨본 중전께선 왕손을 돌보는 마음이 무엇일지 잘 알고 계셨다.
모두 다 지극히 정성을 다하나, 그 안에 얼마나 진실한 모정(母情)같은 성심이 곁들어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대개는 왕손이 다치거나 탈이 나서 무서운 추궁을 당할까 몸을 사리고, 제 아이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모시어 받드는 종류의 어려운 공경이었다.
그런데 권가와 홍위 사이에는 그런 의례적인 피상적인 정이 아니라 진실로 끈끈한, 마치 자신이 직접 향이를 기를 때처럼 친자식과 친어미 사이 같은 진한 애정이 흘러넘쳤다.
“······.”
중전께선 아무 말 없이 한동안 홍위만 바라보셨다.
짧은 다리로 종종종 연못가 수초 속에 숨는 물고기를 쫓아가 쿵쿵 발을 굴러 놀라게 한 후 다시 낚싯대를 들어 물속에 줄을 던지는 홍위의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중전께서 문득 말씀하셨다.
“이 교태전 후원에 내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던 적이 참으로 오래 되었구나. 한동안 들리는 웃음소리는 모두 첩의 자식들 웃음소리였지.”
“!”
“그 아이들 웃음소리가 홍위의 웃음소리처럼 어여쁘게 들렸겠느냐?”
순간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롭던 중전마마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너도 이다음에 너의 아이를 낳게 되면 차마 필설로 형용이 안 되는 그 복잡한 심사를 알게 될 게다.”
탄식하며 중전께선 “그땐 또 우리 홍위를 보는 눈이 오늘과도 같을지······.” 중얼거리셨다.
“네 말은 잘 알겠다, 권가. 네가 계속 보모 나인으로 있도록 내 힘을 써보겠다.”
이 말을 하면서 중전께선 내명부 최고의 권력자로 살아온 날들의 모든 직감을 모아 날카로운 눈으로 권가를 살폈다.
중전마마를 부축하고 있는 최 상궁도 마찬가지로 눈을 부릅뜨고 권가를 살폈다.
그 얼굴에서 단 한 점이라도 실망의 기미가 보이면 그 빤히 계산적인 위선에 혼쭐을 내고, 세자가 지극히 총애하니 그냥은 둘 수 없고 대충 종5품 소훈 정도로 봉해 그보다 위인 종4품 승휘 소굴에 먹잇감으로 던져둘 계산이었다.
그러나 권가는 진실로 기쁜 표정으로 엎드려 절을 올리며 고하였다.
“중전마마의 은혜에 깊이깊이 감사드리옵니다. 소인 권가 우리 원손 아기씨의 보모 나인으로 성실하게 아기씨를 모시겠습니다.”
“······!”
중전께선 일평생을 거의 함께 해 온 최 상궁을 보았다.
최 상궁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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