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화. 홍위의 보모 나인
얼굴을 가득 비추는 햇살에 홀로 눈을 떴을 때, 윤서는 순간 간밤 일이 꿈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들춰본 이불 밑 간밤의 흔적이 울긋불긋 가득한 몸과, 머리맡에 단정히 놓인 한 장의 편지, [戀慕(연모)]란 두 글자가 단정하게 쓰인 편지가 간밤의 일이 틀림없이 일어난 현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이향은 다정하게 격렬한 사내였다.
거리낌이 없이 몰아붙이면서도 쓰다듬는 손끝은 조심스러웠다.
홀로 지낸 모든 밤을 보상받겠다는 듯 여러 번 이어지던 정사의 마지막 끝에서, 이향은 윤서를 안은 채 속삭였다.
“네가 와서, 나는 무척 행복하다, 윤서야.”
그 말을 끝으로 윤서는 혼곤한 잠에 빠졌다.
어렴풋한 의식으로 이향이 자신을 안고 여기 동온돌에 와서 지밀 나인에게 따스한 물을 가져오라 명한 후, 물수건으로 꼼꼼히 간밤의 흔적을 지워주던 것도 기억이 났다.
여러 시나리오를 돌려보느라 종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격렬한 정사로 모두 풀어져,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며 고분고분 닦아주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윤서를 보며 이향이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듯 낮은 목소리로 웃었던 웃음이 생각나자, 윤서는 벌컥 몸을 일으켰다.
“홍위!”
눈을 뜨면 늘 윤서가 곁에 있었는데 이날은 여기 동온돌에서 잠들어 있느라 있어 주지 못했다.
편지가 놓인 밑에 단정하게 개어져 있던 나인복을 서둘러 챙겨 입고 늘 하던 대로 대충 머리를 땋아 올린 후 문을 열자 맞은편 서온돌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낮번이 들어 홍위의 아침 수라 시중을 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온돌의 문을 열자, 마침 밥 수저를 입에 넣던 홍위가 그대로 수저를 팽개치고 달려왔다.
도도도 달려온 홍위는 윤서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다가, 겨우 얼굴을 들고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거가가 업쪄서 가즘이 짐쿵 아팠쪄.”
아직도 시옷(ㅅ) 발음을 지읒(ㅈ)으로 발음하며, 내가 없어서 가슴이 심쿵 아팠다는 말을 홍위가 했다.
엊그제 윤서가 아기 고양이 보며 '심쿵하게 귀엽다' 했던 말을 이렇게 사용해 제 마음아픔을 표현하는 홍위의 말에 윤서도 가슴이 심쿵 내려앉았다.
수라 시중을 들던 나인과 상궁마저도 모두 엎드려 있었다.
이제 윤서는 승은을 받아 상궁의 품계를 뛰어넘는 총애 후궁이 될 것이기에 미리 과한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서는 품에 안아 올린 아이의 잘게 떨리는 몸에서 우리 홍위는 아직 홀로 잠들지 못하는 아기이고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품계를 받아 후궁이 되면 홍위 곁을 지키지 못한다.’
따로 전각이 주어질 것이고 그 전각에 홍위가 머물 공간은 없다.
애초 이곳 서온돌로 홍위가 옮겨와야 하는 이유가 특정 후궁 처소에 홍위가 머물면 원손의 권위가 손상되고 파벌이 생긴다는 이유였기에 이제 와서 윤서는 예외라고 말할 명분이 없다.
윤서는 힘껏 홍위를 안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떼어내 홍위와 눈을 맞췄다.
“아기씨, 간밤에 일이 있었어요. 죄송해요.”
그러자 홍위는 “으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다시 목을 감고 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가즘이 짐쿵 아팠쪄.”
“!”
들었구나.
윤서가 이제 더 이상 보모 나인이 아니게 되어 제 곁을 떠나게 된다는 걸, 나인이나 상궁에게 들어 알고 있구나.
깨어나 울며 윤서를 찾는 홍위를 달래다 누군가 슬쩍 말해주었겠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닥친 현실이 우리 홍위에게 너무 가혹했다.
“아기씨, 저 좀 보세요.”
윤서가 다시 홍위를 내려놓고 어깨를 단단히 잡고 말하자, 울먹거리며 홍위가 눈을 겨우 맞췄다.
“아기씨, 씩씩하게 수라 들고 계세요. 제가 곧 돌아올게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 곁에 있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려면 어떻게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박 상궁 마마님께 물어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확언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밖에 말해 줄 수 없는 가슴이 심쿵을 넘어 무너지듯 아파서, 윤서는 저도 모르게 다시 홍위를 꽉 껴안았다 떼어내고 눈을 단단히 맞추고 다시 속삭였다.
“아기씨, 수라 드시고 계실 거죠? 제가 돌아올 때까지 울지 말고 씩씩하게 계실 거죠?”
“···응, 거가 나잉야. 빨리 와야.”
“네, 빨리 돌아올게요. 꼭꼭 씹어서 고루고루 다 드시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는데도 홍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윤서의 목을 껴안고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낳지는 않았지만 키운 정이 너무 들어버린 아기 때문에 마음이 숨도 안 쉬어지게 아파져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런 너를 두고 나는 어떻게 한강을 헤엄쳐 도망칠 생각을 해봤을까.
서온돌 방안엔 두 사람의 훌쩍이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든 나인 다섯과 상궁 하나는 친 모자지간보다 더욱 절절하게 서로를 집착하는 두 사람의 강렬한 애착에 낯선 감동을 느꼈다.
승은을 통해서건 윗사람에 잘 보여서건 모두 품계의 위로만 향하려는 욕망이 지배하는 궐에서 권력 이인자의 절대적 총애를 받게 된 나인이 이제 벗어나게 된 원손 아기씨를 붙들고 저리 숨죽여 눈물만 떨구는 모습은 가식이라 하기에는 너무 절절하고 애틋했다.
눈물과 감동은 갑자기 열린 문에 의해 깨어졌다.
“권가야, 여기 있었구나. 중전마마께서 찾으······? 아니 아기씨, 왜 이렇게 울고 계세요?”
박 상궁이었다.
간밤 엄 상전의 윤서 거처에서 복잡한 심정으로 잠 못 이루다 늦게서야 깜빡 잠이 들었던 박 상궁이 중궁전에서 권가를 부른다는 전언을 받고 이리저리 윤서를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마마님!”
“너는 또, 왜 이렇게 울고!”
박 상궁은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썅놈이 아껴 아껴 대해줘도 모자랄 판에 울리고 지랄이야.” 윤서에게만 들리게 욕을 하고는, 다시 노련하게 얼굴을 펴고 홍위 앞에 앉았다.
“아기씨, 권가 나인이 이따 중전마마 뵈러 갈 터인데, 아기씨도 같이 할마마마 뵈러 갈까요?”
박 상궁은 원손 아기씨가 권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중전에게 보여 종4품 승휘 따위가 아니라 적어도 종3품 양원이라도 받게 하려는 재빠른 계산이었다.
이제 막 승은을 입어 종5품 소훈 품계를 받거나 종4품 승휘 품계를 받게 되면, 기존의 후궁들이 권가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들 것이 너무도 뻔했다.
궐은 무조건 품계가 모든 걸 결정짓는 세계로, 주상 전하나 세자 저하의 총애가 아무리 크다 한들 낮 동안 내명부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돌아가신 세자빈 권씨가 우리 원손 아기씨를 회임하고 계셨을 때도 당시의 세자빈 폐빈 봉씨가 매질을 가한 적도 있었다.
왕손이 귀할 대로 귀해 전하와 중전마마께서 매일처럼 당시 양원이던 권씨의 안위를 확인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응, 가다. 같이 가다.”
권가 나인과 함께 할마마마를 뵈러 간다는 말에 비로소 얼굴이 밝아진 홍위가 벌써 가기라도 할 것처럼 윤서의 치맛자락을 끌었다.
“지금 말고요, 아기씨. 반 시진은 있어야 하니 어서 수라부터 드세요.”
박 상궁이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번에 권가 나인이 죽을 줄 알고 통곡할 때 양팔을 꽉 잡아 누르며 무서운 표정으로 훈계한 적이 있는 박 상궁을 홍위는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분고분 치맛자락을 놓고 도로 밥을 먹으러 갔다.
“아기씨, 저는 마마님과 잠시 이야기 하고 돌아올게요.”
붉어진 눈으로 윤서가 말하자, “빨리 와야.”하고 순순히 보내주었다.
자선당 뜰에 내려서자마자 박 상궁은 무서운 힘으로 윤서의 팔을 끌어 엄 상전의 행각으로 향하며 물었다.
“대체 널 얼마나 함부로 대했길래! 내, 참. 널린 게 드러누울 것들이거늘 하필 잘살고 있는 애를 왜 건드려서 울리고 지랄이라니.”
어째 우리 박 상궁 마마님 말투가 날로 거칠어지시네.
그래도 윤서는 홍위를 안았을 때와 다른 의미로 안심이 되었다.
이 넓은 궐에서 ‘보모’도 ‘연인’도 ‘광영의 동아줄’도 아닌 인간 권윤서로 진심으로 아껴주는 이는 박 상궁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마마님, 저 후궁이 되지 않을래요. 방법을 찾아주세요.”
윤서가 말하자 마구 잡아끌던 박 상궁이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그러더니 윤서의 등짝을 후려치며 이를 악물고 쉭쉭거렸다.
“그런 건 거사를 치르기 전에 말했어야지. 네가 간밤에 비현각이 밤새 들썩거리도록 요란 뻑적지근하게 승은을 받은 건 온 대궐 천지가 아는데.”
“······.”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지금 간밤의 뜨거운 정사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승은을 받았어도 아기씨의 보모 나인으로 있을 수 있잖아요. 저 그냥 보모 나인으로 있을래요. 후궁이 되었다고 해도 제가 아이를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럼 품계만 덜렁 있는데 아이도 못 낳으면 더 처지가 곤란해지는 거잖아요.”
“하아, 하지만 승은까지 받았는데 승은 상궁도 아니고 그대로 보모 나인이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저 저하의 심심풀이 잠자리 시녀로나 멸시당하겠지! 그 꼴은 난 못 본다.”
박 상궁이 되지도 않는 말은 하지도 말라는 듯 몸을 팽 돌렸다.
윤서는 다시 팔을 잡아 세우고 설득했다.
“마마님. 생각해 보세요. 전 조만간 중전마마를 자주 뵙고 글을 가르쳐 드릴 거에요. 또 정의 공주 자가와 책을 하나 만들라는 어명을 받았지요. 또 얼마 후엔 대군과 공주 모임에도 불려갈 거에요. 그런데도 잠자리 시녀라고 대놓고 무시할 수 있을까요?”
“오호?”
“오히려 높은 품계를 받으면 후궁의 질시와 견제의 대상이 될 터이고, 후궁들 사가에서도 말들이 나와 조정에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오호?”
“그러니까 이대로가, 이대로가 좋아요. 아기씨가 아직 밤에 혼자 주무실 정도로 크지 않으셨고 또 조만간 평창 군주도 올 터인데 그때도 제가 좀 돌봐드려야 하고요.”
“오호호!”
“그리고 이대로 보모 나인으로 있다가 아이 못 낳아서 보모 상궁이 되면, 늘그막에 마마님이랑 알콩달콩 배부르게 여기저기 유람 다니며 살기로 했던 것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권가야!”
박 상궁이 팔을 덥석 잡았다.
“예, 마마님!”
“그, 송화 다식 안에 무슨 독이 들어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니? 매금이한테도 좀 먹이고 싶구나.”
“마마니임!”
“그 나인을 꼭 잡아서 족쳐야겠다. 멍청한 것들 깨치는 총명 환약으로 만들어 팔면 한양의 재물은 싹 다 긁어모을 텐데.”
박 상궁은 눈을 아련하게 뜨며 입을 쩝쩝 다셨다.
“하! 마마님 지금이 재물 타령할 때예요? 이미 펑펑 써도 다 못 쓰고 돌아가실 만큼 재물을 산처럼 쌓으신 분이 왜 이리.”
“하아, 권가야, 권가야. 우리 같은 사람은 재물을 쌓는 행위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쓰는 행위에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단다.”
그러더니 갑자기 윤서의 팔을 무서운 힘으로 다시 잡아끌었다.
“어서, 어서 엄 상전부터 찾자. 그렇게 응, 밤새 힘을 무지막지 쓰시고도 오히려 쌩쌩하게 아침 문후를 든 우리 저하가 널 세자빈으로 봉하고 싶다고 벌써 말씀 올렸댄다. 물론 그대로 될 것도 아니고 책봉 절차란 게 시일이 걸리긴 하지만, 어째 너랑 관계된 일엔 광인이 되시는 우리 저하시니 어서 엄 상전을 찾아 일을 막아야지.”
윤서가 후궁이 되지 않겠다고 하자 이향을 “썅놈”에서 단번에 다시 “우리 저하”라 부르며 박 상궁은 엄 상전을 찾아냈다.
집무실에 있던 엄 상전은 윤서를 보고 벌써 후궁이 된 것처럼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폭풍처럼 쏟아내는 박 상궁의 말을 듣는 엄 상전의 얼굴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세하게 나빠졌다.
보일 듯 말 듯 눈살을 찌푸린 엄 상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되면 빈까지 올라서시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엄 상전 나리. 오랜 기다림 끝 대붕(大鵬)의 비상을 모르십니까?”
사람을 설득하려면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박 상궁 마마님껜 늙어서 함께 딸처럼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엄 상전 나리껜 이 길이 실은 세자빈으로 가는 가장 빠를 수 있는 길임을.
“총애받는 나인이 원손 아기씨를 지극히 사모하여 후궁의 자리를 마다하고 보모 나인으로 머무르고자 한다.”
“!”
“혹여라도 회임하여 왕손을 낳더라도 한낱 나인의 아이이기에 왕실 후계 구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
“이런 미담이라면, 상전 나리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튼튼한 동아줄이 되지 않겠습니까?”
엄 상전은 사람을 보는 자신의 눈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의 오전 정무가 끝나는 대로 말씀 올리겠네. 자네는 중전마마를 뵙고 아기씨가 얼마나 자네를 집착하시는지, 그리하여 장차의 국본께서 성군의 자질로 성장하시려면 얼마나 자네가 필요한지 잘 말씀드리게나.”
그리하여 동궁전의 궁인 실세 세 사람은 각자의 소망을 안고 흩어졌다.
“거가 나잉야, 가다!”
윤서는 홍위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중궁전으로 향했다.
“할마마아아! 보고 딥었떠요.”
홍위는 팔을 벌리고 도도도 달려가 덥석 중전마마께 안겨 볼에 뽀뽀를 해드렸다.
우리 홍위가 벌써 절반은 일을 성사시키는구나.
저리 찬란하게 밝게 되기까지 누구의 공이 가장 큰지는 온 궐이 다 아는 사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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