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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32화 (32/255)

제 32화. 그대에게 나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리노니 (2)

“우선, 네 앞에 놓인 차부터 마시거라.”

이향이 명했다.

윤서는 아까 이향이 따라준 찻물을 마셨다.

윤서가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리자, 잠시 눈을 감고 윤서가 했던 말들을 짚어보던 이향이 다시 눈을 떠 윤서를 보았다.

“이 이야기를 나 외의 다른 이에게 한 적이 있느냐?”

살았구나.

이향은 일단 이 일로 날 해칠 의도가 없다!

“없습니다.”

“좋다. 앞으로도 절대로, 절대로 나 외의 이에게 입도 벙긋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둘째, 아까 한 이야기도 절대, 내게도 다시 꺼내지 말거라.”

“···예?”

“일단 내가 그리 일찍 죽을 리 없지 않느냐? 네가 내게 이리 올 때 벌써 박 상궁에게, 아! 이리 와 용포를 벗기거라.”

“···예?”

“종기가 나 죽었다면서? 이리 답답한 용포를 한시도 더 입고 있기 싫으니 어서 와 의대 시중을 들거라.”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가.

대체 내가 그토록 긴장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수많은 시나리오는 다 뭐란 말인가.

긴장이 풀리자 화가 났다.

“저하, 제가 아까 한 말 흘려들었습니까?”

“무얼?”

“제가 당신보다 세 살이 많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을요.”

“그게, 뭐.”

“제길, 저의 세상에서는 왕도 없고 세자도 없고, 나나 당신이나 다 같은, 법 앞에 평등한 사람이라고요.”

“!”

“그리고 제가, 거기서는, 응, 여기 성균관처럼 여러 개의 대학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전국의 내로라하는 사내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가장 좋은 국립 대학에서 교수님의 제일 촉망받는 제자로 함께 논문도 쓰고. 예? 트라우마 상담 치료 분야에서 나름 날리기 시작한 사람이었다고요.”

한번 화를 내기 시작하자 조선에 떨어져 나인 나부랭이로 받은 멸시와 천대와 모멸감이 마구 올라와 걷잡을 수 없이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다.

윤서와 이향과의 ‘사랑 관계’에서 만큼은 이향이 약자다.

이향의 말 몇 마디에서 윤서는 이향이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여 이 일을 문제 삼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일이 새어나가 세종의 귀에 들어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을 읽어냈다.

‘기울어진 관계를 바로잡을 기회다!’

윤서가 미래에서 온 영혼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 약점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강점이 되고 있다.

윤서를 지극히 사랑하는 이향은 윤서가 정말로 전균처럼 세종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이겠다는 위협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나 효력을 발휘한다.

한 줌의 존엄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결심을 이미 했던 윤서에게 죽이겠다는 위협은 그닥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내가 죽게 되면 수양 대군만은 반드시 죽여달라 매금이와 엄자치에게 이미 부탁해 놓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매금이의 진주알 수놓아진 새빨간 비단 주머니에 들었던 극약 한 알도 이미 치마 속에 숨겨 두었다.

“저는 제 세계에서 꼬마들에게조차 존댓말을 사용하던 사람입니다. 저하도 앞으로 저랑만 있을 때 제게 존대하세요. 언어는 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저하가 제게 윤서야 애들 부르듯 부르며 매사 타이르면, 제가 저하께 동등한 인간이 되겠습니까?”

“하아!”

이향이 입을 떡 벌리고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눈동자를 떨며 윤서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봐서 어쩔 겐데, 이 사랑꾼 양반아!

“저는 우리 홍위를 지극히 사랑하여 궐에 머물기로 선택했지만, 실은 여기 이곳에서 저기 잠실 나루까지, 가만 있어 보세요. 10 리가 4km 정도니까, 저는 백 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고 한강도 헤엄쳐 건널 수 있는 사람입니다.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궐을 빠져 나가 한강을 넘어 저 삼남 어디로 도망가고 말 거에요!”

이렇게 말했으니 도망가게 되면 북쪽으로 달려가야겠군.

“······.”

“······.”

비현각에 침묵이 내렸다.

이향은 연거푸 퍼붓는 낯선 정보와 낯선 모습에 뇌에 과부하가 걸렸고, 윤서는 속으로 심술궂게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이향이 하도 수려한 사내에 하도 사랑 공세를 퍼부어서 마음이 흔들렸지만.

선택할 수만 있다면 윤서는 지금도 홍위의 보모 나인으로 남아 새로이 알게 된 사실, 매금이가 실은 일종의 살수계의 일원이란 사실을 바탕으로 비밀 조직을 꾸려 제거할 사람은 제거하면서 박 상궁과 거부를 쌓아 떵떵거리며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그런 윤서에게 사랑해서라지만 끊임없이 애정 공세를 퍼붓고 궁인들 눈이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입맞춤을 하는 이향이나, 어명으로 잠자리를 하라 명하는 세종이나 지극히 모멸감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이향이 적어도 심인성 발기부전은 아니란 걸 지난번 쓰러졌던 밤 옷 위로 선명하게 확인한 적 있는 윤서는 조만간 잠 못 이루는 불편한 연애를 끝내고 이향을 안을 예정이었지만.

요는 늘 언제나 그렇듯, 자발적인 선택과 강압적인 명령 사이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의 문제이다.

침묵 대결에서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패자다.

그리고 패자는 결국 더 많이, 더 못 견디게 윤서를 사랑하는 이향이었다.

“듣거라.”

윤서는 초승달처럼 아름다운 눈썹을 치켜올렸다.

“···들으시오.”

“예, 저하. 삼가 경청하옵니다.”

기분이 너무도 좋아 윤서가 환하게, 진심으로 웃자 이향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저렇게 입꼬리를 쭉 올리고 눈꼬리를 휘어 내리며 온 얼굴로 웃는 웃음을 권윤서는 오로지 홍위와 박 상궁에게만 보여주었었다.

자신과는 입맞춤으로 숨이 거칠어지는 순간에조차 늘 한 자락 긴장과 경계를 풀지 않는데 홍위를 보는 순간 얼굴 전체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눈에 말할 수 없이 크나큰 애정이 깃들었다.

자신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여인이 어여쁘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러한 애정을 베풀지 않는 여인이 무정하게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향은 ‘조선국의 세자’였다.

“권윤서, 명하노니, 엎드려 듣거라!”

“저하!”

“지금은 내가 너의 연인으로서, 장차의 지아비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세자로서 명하는 것이니, 엎드려 명을 받거라!”

이향의 기세가 단번에 변했다.

천추전의 세종처럼 변한 이향이 윤서에게 엎드려 ‘명’을 받으라 명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관계의 역학에 윤서는 순간 말할 수 없이 분노와 화가 치솟아 매섭게 이향을 노려보았다.

“권윤서, 너의 영혼이 어떤 제도와 어떤 법령을 가진 곳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너의 육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곳은 여기 조선이다. 그러니 조선의 예에 맞추어 따르거라.”

“하아······.”

지배자는 지배자로 태어나는 것인가, 지배자로 길러지는 것인가.

마음만 먹으면 앞에 있는 사람의 오금이 절로 저리게 만드는 저 기세는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세종에게서 배운 것인가.

탄식하며 윤서는 천천히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앞으로 내게, 그리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누가 수양의 편을 들어 반정에 참여했었는지 입도 벙긋하지 말거라.”

“저하!”

우리 홍위는요!

윤서가 고개를 들고 항의하자, 이향의 살벌한 눈빛이 곧 칼날처럼 벨 듯 윤서에게 날아들었다.

“신하는 무릇 제가 닦은 학문과 경륜을 펼치게 해 줄 이를 군주로 따르는 법이다. 왕실이 흔들려 보위가 뒤바뀐 것은 왕실 내의 권력 다툼이지 신하의 충성과 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네가 누누이 말했듯 그 일로 집현전 인재가 반 가까이 죽었다면, 마찬가지로 반 넘게 살아 수양의 치세에 참여했다는 뜻이고. 너의 어조로 보아 그 치세가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하건데 제법 유능한 이들이 수양 쪽에 붙었다는 소리겠지. 네가 그들의 이름을 나나 전하께 꺼내는 순간, 나는 내가 함께 국정을 꾸려야 할 인재의 절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반정으로 절반이 죽어 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

윤서는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성군이시라는 세종과, 그에 못지않았다는 문종이 어떠한 군주였는지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윤서는 저도 모르게 아까 이향의 손길에 흐트러졌던 옷깃을 가다듬고 엎드린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니 권윤서, 명을 받거라.”

“···예, 저하.”

“앞으로 역사서에서 본 것 중 사람에 관계된 것은 죽는 날까지, 죽어서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저하.”

“······.”

무서워.

궁궐은 역시나 너무 무서워.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기는 개뿔.

더 많이 권력을 가진 자가 언제나 늘, 강자이다!

말하지 말고 도망갈 걸.

내 입으로 나불거렸으니 이제 이향은 내가 없어지면 사방으로 추격조를 풀어 뒤쫓겠지. 어쩌면 짐승 몰 듯 개를 풀어 추적할지도 모른다!

입술을 앙다물며 탄식하는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드시오, 부인.”

“······.”

“고개를 들어 보검이보다 수려하다는 나를 보시오, 부인.”

“······.”

이향, 이 개새끼.

제 잘난 줄을 너무도 잘 알아 마음을 후려놓는, 천하의······.

이제 와 욕을 하면 무엇하겠나.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의 서슬 퍼런 군주의 눈빛과 달리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애정을 눈동자에 가득 담은 미남자가 수려한 외모를 노골적으로 뽐내며 눈앞에 있었다.

그래도 윤서는 그 매혹적인 얼굴에 넋이 완전히 나가기 전 용케 정신줄을 붙들었다.

“이향, 저는 다른 여인과 내 사내를 나누어 가지는 일은 알지 못합니다.”

“으응?”

“오늘 내가 당신의 부인이 되면, 당신은 나만의 낭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내 온 마음이 진작에 부인께 가 있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오?”

“온 마음뿐 아니라 온 몸까지, 전부를 원합니다, 저하.”

“그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원해온 바이다, 윤서야.”

널따란 가슴이 온통 들썩이도록 웃으며 이향이 윤서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용포를 벗기는 의대 시중을 들라는 뜻이었다.

제 손으로 옷을 입거나 벗지 않는 왕족 특유의 거만함이 이토록 섹시할 일인가.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어깨 옆 용포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쿵쾅거리며 나대는 심장을 억지로 달래며 옥대를 풀어 탁상에 올리고 옷고름을 푸는데.

얼굴에 점차점차 가빠지는 따스한 입김이 부서져 내렸다.

금빛 수가 찬란한 붉은색의 용포가 비현각의 바닥에 사라락 흘러내렸다.

그 아래에는 또 긴 두루마기 형태의 하늘색 중치막이 있었다.

“저하, 진시황이 열사병으로 죽은 거 아세요?”

“으응?”

“이렇게 통풍이 잘 안 되는 비단옷을 겹겹이 껴입고 열전도율이 높은 청동 마차를 타고 순시에 나섰다가 더위 먹어서 죽었다고 어떤 책에서 보았어요.”

이향이 또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그리고 윤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얼굴을 붙여오며 물었다.

“저쪽 세상에서 너는 서책을 많이 읽었느냐?”

“그럼요, 저하. 제가 들어간 대학이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운지 장원 급제 수준이라고요.”

“그러냐? 그럼 나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여인을 부인으로 두는구나.”

“그러합니다. 동서고금의 지식을 두루 쌓은, 으흡.”

윤서는 더 이상 잘난 체를 이어가지 못했다.

욕망을 가득 품은 이향의 입술이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비현각의 밤은 뜨겁고도 길었다.

이향은 심인성 발기부전도, 조루도 아니었다.

윤서는 자신이 옹녀가 되지 못함을 한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윤서는 홍위의 손을 잡고 중궁전으로 중전마마를 뵈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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