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그대에게 나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리노니 (1)
“두 대감께선 돌아가셨는데, 저하께선 하실 일이 더 있으신 모양이네.”
이향 일이 끝나면 알려달라 부탁해 놓았더니 술시 반각(밤 9시)이 좀 지난 시간에 엄 상전이 와서 알려주었다.
윤서는 또 종이를 찢어 비단 주머니에 넣어 서안 안쪽 비밀 공간에 숨긴 후, 홍위 옆에 누웠다.
그리고 검은 비단처럼 풀어진 머리카락과, 숱 많은 긴 속눈썹과, 아버지를 닮아 벌써부터 오뚝한 콧날과, 살짝 벌린 채 따스한 숨을 뱉고 있는 붉은 입술을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매사 신중한 이향인지라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귀신 들려 헛소리하는 권가라고 내사옥에 끌고 가라 명할 수도 있다.
윤서가 내사옥이든 어디든 갇히면 매금이가 와서 탈출시켜주기로 아까 이야기를 해놓았다.
윤서의 부탁에 매금이는 “응!” 하며 오히려 실력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신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지금 이 순간이 우리 홍위를 보는 마지막일 수 있었다.
‘말하지 말까. 이미 세자빈께서 꿈에 나타나 미래를 보여주며 반지를 주었다고 말했고 이향이 그럭저럭 수용했으니 이대로 살아도······.’
그러나 그것으로는 몇 달은 속여도 몇 년은 속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속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윤서는 마음 한구석 늘 떳떳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응당 나눠야할 깊은 마음의 교감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짓 위에 피어난 관계는 그 끝이 좋을 수 없다.
“홍위야, 네 곁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할게.”
윤서는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댄 채 아주 오랫동안 홍위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홍위에게선 한약재의 향이 섞인 희미한 동백꽃 향이 났다.
앞으로 어디서건 동백꽃 향만 맡으면 “우디 마라, 우디 마.” 다정하게 위로해주던 우리 홍위가 생각나겠지.
윤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엄 상전에게 최가 나인을 불러와 원손 아기씨를 돌볼 수 있게 부탁을 드렸다.
“저는 저하께 아주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특별하게 차려입어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어여쁜 권가가 이리 말하니, 엄 상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천추전에서 전하께서 세자 저하를 밤에 홀로 두지 말라 어명으로 명하셨으니 그 명을 수행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음 놓고 저하께 가시게. 아기씨는 좀처럼 밤에 깨시지 않지 않으시는가.”
윤서는 엄 상전이 건넨 등롱을 들고 몇 걸음 떼었다가 다시 빠르게 걸어 돌아와 엄 상전의 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전 나리. 혹여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양 대군을 죽이세요. 나리가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려면 수양 대군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권, 권가 나인. 그, 그게······?”
표정을 지우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 세자 저하의 밤시중을 들러 가면서 종친을 죽이란 말을 하자 엄 상전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엄 상전은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 하겠네. 치밀하게 기획하여 반드시 그리 하겠네.”
권가의 표정이 굉장히 엄숙하여서, 그리 대답하고 보내야 할 것만 같았다.
윤서는 등롱 하나를 들고 홀로 사락사락 비현각으로 향했다.
낮 동안 무더웠던 공기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등을 시렵게 하였다.
때마침 초여름 밤의 바람이 쏴아아 윤서의 치맛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권가의 몸에 깃든 영혼이 저 먼 미래에서 날아온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되면 이향은 무엇이라고 할까.
무엇이라고 답을 하든 그것은 이향의 몫이고, 윤서는 성실하게 사실을 고할 의무가 있다.
“권가 나인이 왔습니다, 세자 저하.”
밤에 저하의 시중을 드는 젊은 내관이 안으로 고했다.
급하게 의자 미는 소리와 함께 “들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깃든 명백한 반가움에 윤서는 또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귀신 같은 것이 권가에 들러붙어 요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요물이라고 내치면, 그때는 어찌하나.
그렇게 궐에서 쫓겨나면 어디서든 삶이야 살아지겠지만 우리 홍위는 어떻게 하고, 처복이 정말로 없음이 만천하에 또 한 번 드러난 이향은 어찌 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너처럼 괴상한 인간은 여인으로 가까이 할 마음이 없어졌으니 그저 홍위의 보모로만 살거라 하면, 그러면 이 입술에 뜨겁게 와닿은 이향의 입술을 선명히 기억하면서 또 그렇게 남처럼 덤덤하게 나인으로 살아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이향을 선택함으로써 딸려오는 온 조선의 일을 내 것으로 맞이해 성실하게 수행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내관이 문을 밀어 여는 그 짧은 시간 이미 곱씹어 본 만 가지 생각이 또 만 가지 갈래로 뻗어나갔다.
문을 열자 이향은 벌써 문 앞에 와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격무로 초췌해져 오히려 더 수려한 선을 드러낸 얼굴엔 온통 윤서를 향한 반가움과 열망이 너무도 선명하게 맺혀 있어, 윤서는 또 눈가가 뜨거워졌다.
“윤서야!”
내관이 문을 닫지도 않았는데 벌써 품에 당겨 안으며 이향이 뜨겁게 입술을 대어왔다.
윤서는 원래 이향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여러 날 주고, 그 선택이 무엇인지 확인한 다음에야 입맞춤이든 무엇이든 할 계획이었다.
배신당한 사랑은 뜨거웠던 것만큼 잔혹한 증오로 변질되기 쉬었다.
그러나 이향은 윤서의 마음을 모른 채 벌써 농밀하게 입맞춤을 시작하였다.
오늘 저녁 전하의 수라 시중을 들었으니 이향도 천추전에서 내리신 어명을 들어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바로 자선당에 와 윤서를 찾지 않은 것은 윤서에게 그 어명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윤서가 이리 먼저 비현각을 찾아왔으니, 참기 힘들었던 연애 따위 집어치우고 이제 부부의 연을 맺을 결심을 하였다고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당장 끝을 보려는 듯 이향의 손길이 거침없이 옷 안을 파고들었다.
윤서의 몸에도 애달픈 욕망은 거침없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무엇이 정해지기 전, 윤서의 욕망이 더 거세져 이성을 놓아버리기 전, 이향은 진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윤서는 힘이 센 권가의 손으로 이향의 가슴을 밀어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하.”
“···윤서야.”
거칠어진 호흡으로 밀려난 이향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그냥 제 손으로 헝클어놓은 윤서의 머리를 쓸어 귀 뒤에 꽂아주었다.
윤서는 한 걸음 물러서 이향의 다정한 손길을 피한 후,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저하, 들으셔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저기 의자에 가 앉으세요.”
윤서의 어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이향은 일으키려 굽히던 몸을 도로 펴고 대신 말로 명했다.
“일어나거라, 권윤서. 무릎 아프다. 의자에 앉아서 말하거라.”
“저하, 제가 그간 저하께 차마 고하지 못한 것이 있어 여기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들으셔야 해요. 듣고 나서 판단하셔야 합니다.”
“!”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이향이 갑자기 윤서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턱을 아프게 그러쥐었다.
“보검이란 자 때문이냐? 꿈결에서도 애타게 찾는 그 보검이란 자 때문에, 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인 게야?”
헐.
이게 무슨 말이야.
비밀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긴장했던 마음이 화라락 풀어졌다.
이제야 윤서는 이향이 보검이란 사내를 찾아내라고 온 궐을 뒤지게 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간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에 대해서 해명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게 여기서 이렇게 튀어나올 중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하, 보검이는 일평생 실제 만나보지도 못한, 그림 속에 그려진 초상화 같은 존재입니다!”
“!”
“그리고 그때 제가 분명 보검이보다 저하가 훨씬 더 잘 생겼다고 말했는데, 뭔 보검이 타령을.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라고요.”
“······.”
윤서의 호통에 이향은 “···내가 네 앞에만 서면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말하면서도 보검이보다 잘 생겼다는 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다정한 얼굴로 윤서를 예닐곱 명이 둘러앉아 회의하는 탁상으로 데려갔다.
“여기 앉아 말하거라. 어여쁜 무릎 아프게 꿇어 있지 말고.”
“저하는 저 맞은편에 앉으세요. 저는 여기 앉겠습니다.”
바로 옆에 앉으려는 이향을 맞은편으로 보냈다.
그러자 이향은 가서 앉는 대신 도자기 찻잔에서 차를 따라 윤서 앞에 놓아주고, 자신도 한 잔 따라 맞은편에 가 앉았다.
요새는 늘 하늘하늘 얇은 도포 입은 모습만 주로 보았는데, 오늘 이향은 늦게까지 김종서와 정인지와 정무를 보느라 아직 곤룡포에 익선관을 갖춰 입고 있었다.
“저하,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면 하실 일이 남아 있어도 일단 씻으시고 몸을 잘 말린 후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다시 일을 하세요. 제가 박 상궁 마마님 방자한테 비누란 걸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 비누로 씻으시고, 몸을 잘 말린 다음에 늘 얇은 옷을 입으셔서 종기가 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또 잔소리부터 나왔다.
“그리고 아직 돼지비계 끓여서 기름낼 시간이 없어서 못 만들었는데, 박 상궁 마마님이랑 그 방자들이 자운고란 걸 만드는 법도 알고 있습니다. 자운고가 심하지 않은 가려움증이나 종기 초기에 도움이 많이 되니 바르시고, 내의원에 넘겨서 더 강한 약효를 지닌 외용약으로 만들어 내라 명하세요. 그래야 저하께서 심한 종기로 때 이르게 돌아가시는 일이 없어요.”
“윤서야.”
이제야 윤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이향이 몸을 일으켜 다가오려 하였다.
그러나 윤서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말했다.
“거기서 들으세요, 이향. 훗날 문종이란 묘호를 받으시게 될, 조선국 세자 이향. 거기서 저의 말을 들으세요. 저는 권가의 몸에 깃든 미래의 영혼입니다.”
“윤서야!”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경계성 지능 장애로 의심되는, 글도 모르면서 착해빠지기만 했던 권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자빈의 영혼이 보여주셨다면서 새 글자를 쓰고, 원손 아기씨를 여기 자선당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직 건장한 저하께 끊임없이 종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
이향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오랫동안 격무와 잠 못 이루는 밤으로 피로가 쌓인 수려한 얼굴에 놀람과 경악과 충격의 다채로운 표정이 교대로 지나갔다.
이렇게 몰아붙이듯 급작스럽게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는데.
윤서는 고개를 조아려 간곡하고도 조근조근한 어조로 자신이 미래에서 온 영혼이고,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당신과 혼인하고 싶다고 고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입술을 맞댄 순간부터 그대로 덮고 그저 세자빈이 등장한 기이한 꿈에 의해 몇 가지만 안다는 거짓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게 들었다.
그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윤서는 자신을 몰아붙여야 했고, 결국 이향도 이렇게 몰아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거짓보다 늘 고통스럽다.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돌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윤서는 다시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이향,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9년 뒤, 우리 홍위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등 전체에 퍼진 종기로 며칠 만에 급사하였다고 역사책에 적혀 있었어요. 그것이 내가 끊임없이 당신에게 자주 씻고 옷을 얇게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누와 자운고를 만들려 했던 이유입니다.”
“······.”
“저는 오백 년이 조금 더 지난 미래의 조선에서 온, 세자빈 권씨의 19대 후손 권윤서란 사람입니다. 당신보다 세 살이 많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하는 여인이었어요.”
“······.”
“부모님 기일을 맞아 고향 집에 내려왔다가 다락에서 당신이 권씨에게 준 반지를 발견하고 꼈다가 때마침 독이 든 다식을 먹고 죽게 된 권가 나인의 몸에 소환되었지요. 당신의 부인이 수양 대군에게 해를 당했던 가여운 홍위를 살리라며,”
“윤서야.”
쫓기듯 털어놓는 기이한 고백을 듣고만 있던 이향이 윤서의 말을 잘랐다.
“그만 말하거라. 그만 말하고, 묻는 말에만 답하거라. 조선국 세자의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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