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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30화 (30/255)

제 30화. 윤서의 시간은 홍위로 피어나

“권가야, 너는 왜 전균이 처벌받았다고 생각하느냐? 고하거라.”

세종께서 다시 물으셨다.

오늘 왕실의 금기를 건드리는 발언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하여 그저 고개를 조아렸던 윤서는, 세종께서 원하시는 답이 따로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답을 내놓을 때까지 결코 윤서를 놓아주지 않으시리란 것도 깨달았다.

“소인의 미욱한 머리로는 도저히 만고의 성군이자 조선 최고의 천재이신 전하의 어심을 헤아릴 길 없으니, 부디 깨우쳐 주소서.”

윤서는 일단 전하의 도움을 청해보았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시니.

역시나 전하께선,

“하! 아까는 영민하게 나불나불 잘도 말해놓고 무슨 생각이 짧다는 게냐. 고하거라!”

“···지근거리에서 전하를 보필하는 대전 내관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세자 저하께서 거하시는 동궁전의 위엄을 감히 훼손하였습니다.”

“또!”

“···세자 저하의 궁인이자 원손 아기씨의 보모인 저를 음해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또!”

이쯤 되자 달리기를 통해 주기적으로 마음의 어둠을 털어내지 않으면 성미가 조급해지고 말이 신랄해지는 윤서의 성질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인은 한낱 나인 나부랭이인지라 도저히 조선 제일 천재이자 학자이자 성군이신 전하의 어심을 헤아릴 수 없으니, 그냥 말씀해 주소서!”

오늘 여기서 죽을 일은 없다.

당장 내일 육아 이론서를 쓰기 시작하라 명하셨고, 조만간 수양 그놈도 참석하는 한글 창제 모임에도 오라고 하셨고, 무엇보다 중전마마께 글자를 가르쳐 드리며 심리를 보살피라 명하셨으니, 오늘 죽이실 리가 없다!

“아무리 거듭 물으셔도 어리석은 머리로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사오니, 미천한 나인이 귀하신 전하의 시간을 뺏지 않게 해 주소서!”

한 가닥 믿는 심적 안도감도 별 여과 없이 감히 성질을 부려보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 권가, 네게 경고하였던 것이다!”

“!”

윤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세종을 보았다.

세종께서 엄혹한 표정으로 일갈하셨다.

“네가 그 유려하게 나불거리는 세 치 혀로 세자를 현혹했기 때문이다. 매사 행동을 삼가고 친동기는 물론 배다른 형제들까지 두루두루 어여삐 품던 세자를 네가 그 대단한 말솜씨로 현혹시켜 내 아들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야.”

“전하!”

“명심하거라, 권가야. 세자가 네게 현혹되어 내 아들 중 누구 하나라도 죽이려 드는 날, 네가 먼저 전균처럼 내 손에 죽을 것이다!”

“!”

이렇게 죽음으로 위협하시다니.

첫 알현에서 이미 한 번 죽음을 각오해 보았었다. 이제 와 더 무서울 것도 없다.

두려워서 꾹꾹 눌러두었던 본심이 인내심이 고갈된 윤서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전하께서 전하의 아드님들을 온 마음으로 아끼시듯, 보모 나인인 저 또한 우리 원손 아기씨께 저의 온 마음과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누가 감히 우리 아기씨를 해하려 든다면 저 또한 목숨을 걸고 막아설 것입니다!”

“하! 좋다! 기대하던 대답이었다!”

“···예?”

“보모 나인 권윤서, 엎드려 어명을 받으라.”

“···예?”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 혼돈 속에서 일단 윤서는 엎드려 받으라는 어명을 기다렸다.

“오늘 천추전에서 이리 결기 있게 외쳤던 너의 그 본심, 목숨을 걸고 홍위를 지키겠다는 그 다짐을 반드시,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명이다!”

순간 윤서는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신 것이 다 본래의 진심을 캐보려는 의도셨어!

“왜 답이 없느냐.”

“예, 전하! 목숨 걸고 우리 홍위를 지키겠습니다.”

“그래, 훗날 네가 너의 아이를 낳더라도 홍위를 목숨으로 지켜 보위에 올리겠다는 오늘의 맹세를 저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전하.”

넋이 빠져 윤서는 자신이 원손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세종께선 “오호?” 희어진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어차피 제 자식이 될 것이기에 그냥 넘어가셨단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 또 하나, 연애를 한답시고 우리 세자를 밀어내지 말거라.”

“예? 그, 그건 저하께서 제가 배필로 적당한지 알아보시려······.”

“하! 향이가 너한테 진작에 혼이 빠져 있는 것은 온 궐이 다 아는데, 무슨!”

“······.”

“네가 홍위 사랑하는 것의 반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내 아들 향이를 사랑한다면, 온 조선 팔도의 갖가지 일로 꿈에서조차 정무를 보고 있는 그 고단한 아이를 고작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잠 못 이루게 두진 않을 것이다.”

“!”

윤서는 진심으로 놀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세종을 올려다보았다.

세종께서 한편으론 엄하게, 한편으론 짓궂게 눈을 빛내며 윤서를 굽어보고 계셨다!

“대답하거라, 권윤서.”

“···어명, 받들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가거라. 홍위가 네가 한시라도 곁에 없으면 불안해한다니, 어서 가서 ‘너의 그 홍위’를 돌보거라.”

“···예, 전하.”

윤서는 첫날만큼이나 황망해진 머릿속으로 어떻게 천추전을 나왔는지도 모른 채 걸어 나와 댓돌에 놓인 신발을 신고 사정전의 뜰을 휘청휘청 걸었다.

이게 이렇게 될 일인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겐가? 간간이 전하의 노성이 터져 나와 또 세자 저하를 뫼시러 가야 하나 마음을 졸였는데.”

엄 상전이 옆에서 묻는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잠 못 이루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그걸 어명으로 명하시다니.

과연 헬조선이로다.

탄식하며 동궁전으로 돌아왔더니, 홍위가 이제 제법 날래진 걸음으로 우다다다 뛰어왔다.

“거가 나잉야아!”

품에 뛰어드는 아이를 윤서가 반사적으로 안아 올렸다.

“아기씨! 저 기다리셨어요?”

“응, 낙찌도 안 하고 기다렸쪄.”

그 좋아하는 낚시 놀이도 마다하고 문만 바라보고 있었을 우리 홍위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시큰해지면서 마음이 벅차게 아팠다.

그래도 방금 들은 어명 때문에 머리 한쪽이 온통 엉클어진 실마냥 어지러워서, 윤서는 홍위를 힘껏 안고 귀에 속삭였다.

“아기씨, 저녁 수라 드시고, 우리 또 연날리기 할까요? 오늘 바람이 별로 없지만, 제가 아기씨 안고 열심히 뛰면 좀 날아오를 거에요.”

“연난리기 쪼아. 한참 하다.”

“예, 아기씨. 연날리기 한 후에 제가 아주 향기 좋은 물비누로 씻겨드릴게요. 제가 아주 좋은 걸 만들었답니다.”

윤서는 드디어 함초 태운 재를 고운 면보에 넣고 천천히 걸러 알칼리 수를 만들고, 피부에 좋은 한약재를 온침한 동백 기름과 섞어 오래 끓인 후 간수를 넣어 몽글몽글 순두부처럼 떠오른 비누를 만든 참이었다.

그러나 그 비누 덩어리를 뭉쳐서 건조해도 도무지 현대의 비누처럼 딱딱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비누 만들기를 돕는 박 상궁 마마님의 방자 중비와 사월이와 함께 물렁거리는 비누로 어제와 그제 목욕을 하고 세수를 하였는데, 피부가 아주 부들부들해지고 깨끗하게 씻기고 좋았다.

중비와 사월이는 너무도 좋아하며 제발 한 덩이만 집에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고, 박 상궁 마마님도 “오호, 이거 물건이다, 물건. 그런데 동백 기름으로 만든 건 아주 비싸게 팔아야지 잘못하면 재룟값도 못 건지겠다.” 걱정하셨다.

대충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윤서는 홍위를 안고 근 반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윤서에게 안긴 홍위는 연줄을 쥐고 “난다, 거아야. 난다! 새처엄 난다!” 하며 깔깔거리다가 나중에는 윤서를 꼭 안으며 속삭였다.

“거가야, 힘 드여. 내여 둬.”

하고 윤서 힘들다고 내려서 제 발로 뛰겠다고 하였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연이 날아오르지 않는데도, 홍위는 짧은 다리로 질질 연을 끌고 뛰어다니며 연실 깔깔 웃었다.

“꼬이가 붙었따, 꼬이가! 거가야, 나 꼬이 길다아!”

해 맑은 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만큼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의지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낯선 조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시간이 홍위에게 흘러 들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로 피어나고 있음을 확인하는 윤서의 눈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피어나는 아이와 함께라면 강을 헤엄쳐 도망치지 않고도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힘을 내어, 용기를 내어 여기 이 궐 속의 삶을 꿈꿔볼 만하지 않은가.

넘어지면 언제든 안아 올릴 수 있게 홍위 바로 한 발자국 옆에서 함께 뛰며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윤서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마침내 반 시진이 지나 홍위가 지쳐 뛰기를 멈췄을 때, 윤서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제야 윤서의 눈물을 알아챈 홍위가 치맛자락을 당겨 윤서를 앉혀 눈높이를 맞추고, 그 작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거 가야, 왜 우으냐?”

“···바람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났어요.”

영민한 홍위는 그런 거짓부렁이에 속지 않았다.

“···할바마아한테 홍 났느냐?”

“아니에요, 아기씨. 전하께선 만고의 성군이신데 저를 혼내시다니요.”

말하는데 계속 눈물이 나서, 윤서는 결국 홍위를 끌어안고 흐느끼고 말았다.

그러자 홍위도 “으아아앙” 울음을 터트리더니,

“거가야, 내가 지켜두께. 우디 마라, 우디 마.”

하고 작은 손으로 열심히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이었다.

한바탕 울면서 뛰고 났더니, 머릿속이 맑아졌다.

윤서는 먼저 얼굴을 씻어 눈물의 흔적을 지운 후, 따끈한 물에 홍위를 앉히고 골고루 물을 끼얹어준 다음 비누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아기씨, 이것이 비누라는 것인데요. 원래는 더 딱딱해야 하는데 여기선 그렇게까진 되지 않아요. 그래도 향이, 어때요? 좋지요?”

온갖 한약재가 들어가 향기롭다기보단 구수한 한약 같았지만, 비릿한 녹두 가루나 무향의 쌀겨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향이었다.

“미끄미끄하다.”

신기한 듯 비누 덩어리를 쥐고 주물럭거리는 홍위 몸에 비누 거품을 발라주니, 홍위가 몸을 비틀며 까르르르 웃었다.

“간지여워, 간지여워. 거가야, 간지여워.”

발버둥 치며 웃는 홍위를 잡아가며 최가 나인과 함께 씻기고, 나중에는 눈에 비눗물 들어가 쓰리다고 울먹거리는 홍위를 달래가며 맑은 물로 얼굴을 헹구고,

수건으로 보송보송 뽀얗게 말려주니.

한껏 뛰놀고 목욕하는 내내 깔깔거리느라 지쳤는지 요 위에 눕히자마자 홍위는 옷고름도 찾지 않고 잠에 빠졌다.

이향은 아까 엄 상전을 통해 오늘 화폐 관련하여 김종서와 정인지와 늦도록 비현각에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말을 전해왔었다.

윤서는 잠깐 엄 상전의 거처로 가 중전마마께서 하사해주신 비단으로 지은 옷 중 가장 아름다운 옷을 꺼내 입었다.

권가의 흰 피부에 잘 어울리는 연분홍빛 비단 저고리가 맵시 있게 굴곡을 드러내고, 연한 하늘빛 풍성한 폭이 늘씬한 다리 길이를 더 돋보이게 하는 치마였다.

머리까지 꼼꼼하게 빗어 가장 좋은 댕기를 드리운 후.

윤서는 다시 서온돌로 돌아와 서탁 위에 흰 종이를 펼치고 세붓을 집어 들었다.

[거짓 위에 올바른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윤서가 쓴 첫 문장이었다.

[혼인을 청하기 전 먼저 행해야 하는 의무는, 감추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다.]

윤서가 쓴 두 번째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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