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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9화 (29/255)

제 29화. 천추전에서 세종과 두 번째 만남 (2)

“임영 대군께서 그 예가 되십니다.”

윤서의 말에 정의 공주는 “아!” 탄식했고, 세종께선 얼굴을 굳히셨다.

순식간에 변하는 두 사람의 안색에서 윤서는 이것이 왕실 내의 일종의 금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심리상담가로서 윤서가 쌓아온 직업적 태도는 내담자가 떠올리기를 무척 고통스러워한다고 해서 문제의 근원이 되는 기억을 은폐한 채로 살아가게 두지 않는 것이었다.

은폐한다고 해서 문제가 은폐된 채로 남아 있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 저편 심연에 묻어버린 그 문제는 문제가 생겨난 것과 조금만 비슷한 상황, 냄새, 소리 등 작은 단서에도 툭툭 튀어나와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그 근원을 의식에서 은폐했기에 자신이 왜 두렵고 분노하고 극도로 우울한지 이유를 모른 채 여러 파괴적인 감정에 휘말린다.

윤서는 종각을 지나 동대문을 너머 군자역 쪽으로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제든 도망칠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으니, 오늘 현실은 더욱 담대하게, 충실하게.

윤서가 담담하게 전하를 응시하자, 세종께서 천천히,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여셨다.

“권가 네 말은 그러니까 임영이 다른 왕자들과 달리 그렇게 개차반인 것이 중전께서 그 아이를 회임하신 동안 겪은 그 말 못 할 비극 때문이라는 것이냐?”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겠으나, 여러 대군 자가 가운데 그분만 행동이 유독 거치신 것으로 소인이 감히 추론해보았습니다. 소인이 주제 넘는 말씀을 올렸다면 송구하옵니다.”

“······.”

“······.”

소헌 왕후께서 임영 대군을 임신하고 계실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친정 아버지 심온이 역모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 와 압슬형까지 당하는 모진 고문 끝에 사사 당하고, 친정 어머니를 비롯 온 가족이 노비로 전락했다.

그래서인지 세자나 수양 대군, 안평 대군과 달리, 임영 대군은 궁녀나 기생을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등 물의를 일으켜 대군 직위를 두 번이나 박탈당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소헌 왕후를 괴롭게 하였을지는 이향이 이따금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문득문득 목이 메도록 가슴 아파하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갔다.

기회가 된다면, 윤서는 소헌 왕후께 상담 세션을 진행해보고 싶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자애로운 왕비라는 가면 뒤에 중전께서 한사코 숨기고 계실 그 엄청난 트라우마적 상처를 보듬어, 그를 지켜보며 마음 저며하는 이향의 상처까지 함께 치유하고 싶었다.

소헌 왕후께서 능숙하게 고통을 감추시기 전, 날것의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닐 그 당시를 곁에서 목격한 이들이 이향과 수양 대군이었을 것이고, 공교롭게도 그 둘은 호색인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그리고 밑의 다른 동복 동생들과도 달리 여색을 혐오하거나 즐기지 않았다.

윤서는 이것이 어머니에게 그토록 모진 고통을 주고도 끊임없이 색을 밝혀온 아버지 인간 세종에 대한 무의식적인 원망과 반발이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 시작했으니, 윤서는 오늘 세종께 얻어내고자 했던 것을 하나 더 펼쳐 놓았다.

“전하, 복중의 태교뿐 아니라 태어나서의 양육 환경 또한 중요합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는 반드시 부모와 함께 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적 보니 비록 곤궁하고 거친 환경일지라도 부모나 부모 중 하나라도 함께 거하는 아이들의 정서가 훨씬 더 밝고 건강하였습니다. 부모 모두와 떨어진 아이들은 비록 윤택한 환경에서 자라더라도 위축되고 불안정한 정서로 자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으래?”

세종의 어조에 의혹이 섞여들었다는 것을 윤서는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러나 임상에서 직접 겪은 상담 사례와 관련 분야의 서적을 통해 영유아기에 부모나 주양육자에게 안정적인 일관된 돌봄을 받았느냐의 여부가 인간의 일평생을 통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아는 윤서로서는, 세종의 심기가 불편해졌다고 해서 이미 꺼낸 이야기를 얼버무릴 정도로 직업 의식이 약하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통제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은 생애 초기에 양육자와 얼마나 조화롭게 상호 작용했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부모가 안락함과 힘을 충분히 제공해 준 아이들은 평생 그 효과를 누린다. 즉 운명이 건넬 수 있는 최악의 순간도 견디는 일종의 완충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윤서가 바이블처럼 끼고 거듭거듭 읽으면서 상담 세션에 적용하고자 애썼단 베셀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란 책에 나온 구절을 다시 한번 속으로 암송하며, 윤서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성장에 중요한지는 전하께서 그 예가 되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잠저에서 성장하실 때 마침 태종께오서 실의의 시기에 있으셨던지라 어린 전하를 무릎에 앉히고 여러 책을 읽어주시며 아끼셨다 들었습니다. 그와 달리 양녕 대군께선 외가에 보내져 자라셨지요.”

“!”

“!”

“그래서 전하, 소인 감히 말씀 올리옵니다. 사가에 나가 계신 우리 평창 군주 아기씨를 궐에, 세자 저하 곁에 머물게 하심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

정의 공주는 ‘얘가 나가도 너무 나가는 또라이인데.’ 하는 표정으로 세종의 눈치를 살폈고, 세종께서는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윤서를 굽어보셨다.

윤서는 꿋꿋하게 시선을 받아냈다.

세종께서 설사 윤서를 시건방진 나인이어서 이향의 짝으로 맞지 않다고 판단한다고 하신들, 이 일로 홍위의 보모 나인 직을 박탈하진 않을 것이다.

세자의 짝으로 부적절해도 원손의 보모로서는 아주 나무랄 데가 없으니.

그리고 당장 훗날의 경혜 공주인 평창 군주를 궐로 다시 데려오시겠지.

그건 엄마인 세자빈 권씨를 잃자마자 재액을 피한다는 구실로 궐 밖으로 내보내지면서 이향과 홍위에게 소원함을 느낄 평창 군주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고, 친누이가 와서 훨씬 더 밝고 안정적으로 크게 될 우리 홍위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윽고 세종께서 윤서를 부르셨다.

“권가는 이리, 책상 앞으로 오거라.”

“···예, 전하.”

순간 뺨이라도 치시려는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다시 한번 한강을 느린 속도로 헤엄쳐 건너는 자신을 상상하며, 유사시 자신을 탈출시켜줄 밖에 있는 매금이를 생각하며, 무슨 일이 어떻게 있든 지켜주겠다는 이향의 말을 떠올리며 윤서는 배꼽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걸음걸이로 책상 앞에 다가섰다.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보는 정의 공주의 눈빛이 불안에 흔들렸다.

세종께서 책상 위 벼루를 가리켜 보이셨다.

“붓을 들어 내가 부르는 대로 ‘그 문자’로 쓰거라."

"예, 저하."

"'태교와 함께 양육 환경이 중요하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커야 한다.’ 써보거라.”

“···소인이 붓을 잡을 기회가 많지 않아 악필이옵니다.”

“상관없다.”

안도감에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윤서는 붓을 들어 말씀하신 대로 썼다.

[태교와 양육 환경이 중요하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한다.]

“오호, 아바마마.”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정의 공주가 탄성을 질렀다.

세종과 함께 정의 공주가 머리를 맞대고 윤서가 쓴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종이 아니라 횡으로 썼습니다. 게다가 글자 사이를 의미 단위로 떼고 점을 찍으니 훨씬 더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아바마마.”

“으흠, 정의 공주야. 너 당분간 궐에 매일 들어오거라.”

“예? 무슨 일로······?.”

“아까 권가가 하는 이야기를 좀 같이 책으로 펴내야겠다. <육아보감>이라고 이 문자로 엮어서 널리 알려야겠다.”

“!”

윤서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얼떨떨해져 세종의 얼굴을 또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나 세종께선 윤서의 불경한 시선을 개의치 않고 이번에는 윤서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권가야, 너는 앞으로 세자와 우리 대군들과 정의 공주가 나와 함께 모여 글자를 만들고 이론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해야겠다. 사흘 내로 일정 잡을 터이니 반드시 참석하거라.”

“···예, 전하.”

‘그럼 드디어 수양 대군을 보는 건가. 보면 죽이고 싶은 눈빛을 쏘아댈 텐데, 증오와 혐오의 눈빛을 어떻게 숨겨야 하나.’ 생각하는데 또 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의 공주야, 너는 이만 중궁전에 가서 중전마마를 뵙거라.”

“아바마마!”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정의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순간,

윤서의 몸도 자동으로 긴장되었다.

머릿속에 “전하께선 여색을 무척 좋아하신다!” 속삭인 양 귀인의 말과, “전하는 원칙에 극도로 충실하시고 엄격하신 분이다.”라고 일갈한 박 상궁의 말이 동시에 쟁쟁 울렸다.

박 상궁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지만 가지고 있는 나인복 중 가장 허름하고 가장 벙벙한 옷을 입고, 머리에 드린 댕기도 빛이 다 바래고 보풀이 인 것으로 골라 두르고 천추전에 온 참이었다.

일을 저지르고자 하는 자에게 옷 따위는 한낱 저열한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손이 절로 그렇게 움직였다.

윤서는 순식간에 뒷걸음으로 물러나 문가에 엎드렸다. 유사시에 문을 박차고 뛰쳐나갈 수 있는 자리였다.

“아바마마, 어째서······?”

“향이가 널 들여보낸 것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내 권가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중궁전으로 가거라.”

부드러운 어조이나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왕의 명이었다.

“그럼 아바마마, 이만 물러가옵니다. 권가야, 그럼 내일 보자꾸나. 따로 연통하마.”

비단 스치는 소리가 사락사락 무정하게 왕의 서재를 나갔다.

“······.”

“······.”

두려운 왕의 침묵 속에서 윤서는 ‘아, 왕실 생활이 너무 다채롭게 힘겹구나.’ 탄식했다.

고종 옆에서 한참 권력을 휘두를 때의 명성황후조차 “내 다시 태어나면 사대문 안에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더니.

윤서도 ‘도망가거나 현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경복궁 일대엔 발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거듭 다짐했다.

“중전마마께 이 새로운 글자를 가르쳐 드리거라.”

“···예?”

전혀 예상 밖의 말씀에 윤서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종을 바라보았다.

“중전께선 가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냉랭해져 말씀도 안 하시고 들으려 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 그러실 만도 하지. 누구에게 속을 터놓는다고 그 기막힌 심정을 알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글로라도 써서 해소해 보라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데 어려운 한자로 뭘 더 쓰라는 것이냐며 화를 내셨다.”

‘세종께서도 소헌 왕후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나름 애는 쓰셨구나.’

“네가 가서 글자를 가르쳐 드리며 말씀을 좀 들어드리려무나. 네가 사람의 심리와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으니. 다만 다른 이는 모르게 하거라. 자칫 중전마마의 위신에 해가 갈 수 있으니.”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이건 윤서도 바라던 바라 기쁘게 답을 올렸다.

이쯤이면 이제 말씀을 다 하셨겠지. 이제 우리 홍위가 목 빼고 기다릴 동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리는데,

“그리고, 권가야.”

세종은 또 윤서를 부르셨다.

“예, 전하.”

“너는 왜 전균이 처벌되었다고 생각하느냐?”

“!”

잊어버리고 싶어 애쓰는 이름이 전하의 입에서 나왔다.

몸에 새롭게 경고 호르몬이 팍 분비되며, 의식이 화라락 깨어났다.

윤서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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