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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8화 (28/255)

제 28화. 천추전에서 세종과 두 번째 만남 (1)

윤서가 두 번째로 천추전에서 세종을 알현하게 되는 소식을 아는 자들은 모두 제 나름의 강렬한 감정을 품고 낮 내내 윤서를 대하였다.

첫 알현에서 궐내 최고 실세였던 전균이 맞아 죽는 파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곤룡포를 차려입고 아침 문후 후 신하들을 접견하는 공식 일정을 시작하기 전, 이향은 서온돌에 들러 윤서를 힘껏 품에 안았다.

“말의 앞뒤 모순을 참지 못하시는 전하시니 하문하시는 말씀에 그저 진실하게 답을 올리거라. 그리고 윤서야······.”

말끝을 흐리며 이향은 몸을 떼어내 윤서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오래 윤서를 응시했다.

눈동자에 윤서를 각인해 담아가고 싶은 것처럼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에서 윤서는 최고 권력자 앞에 아직은 온전히 저의 것이 아닌 여인을 보내는 이인자의 숨겨진 불안을 예리하게 읽어냈다.

윤서가 결코 이향과 동등해질 수 없는 기울어진 관계이듯, 이향도 전하와의 관계에서 결코 동등해질 수 없는 신하이자, 여러 아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울어진 관계를 선명하게 의식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사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채 내보이는 불안이 문득 가여워 윤서는 이향의 목에 팔을 두르고 힘껏 안기며 속삭였다.

“극도로 조심하겠어요, 저하. 전하는 만고의 성군이시니, 모질고 매정하게 저를 대하진 않으실 것입니다.”

그 말에 비로소 이향은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있든 내가 널 지킬 것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아침이 조금 지나서는 양 귀인이 왔다.

마침 홍위가 성삼문에게 글을 배우러 간 시간이었다.

양 귀인은 서온돌 방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둘러보더니,

“이렇게 서온돌까지 차지했으면 어서 승휘든 무엇이든 공식 후궁이 되어야지 아직 보모 나인이 다 무어야. 대청마루만 건너면 저하의 침전인데, 아기씨 잠들고 난 그 긴 밤에 무얼 하는 거니?”

하고 타박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며,

“아니다. 사내는 그저 애를 태워야 더 귀한 줄을 알지. 권가 네가 생각보다 더 불여우였구나.”

하고는 문득 정색을 하고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무척 망설였다.

늘 거침없이 신랄하게 혀를 놀리는 양 귀인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다 마음을 정했는지 윤서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고 귀에 입술을 대고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전하께선 여색을 무척 좋아하신다. 과도한 업무의 긴장을 여색으로 풀어내시지. 수수하게 옷을 입고 가서 절대 전하 가까이 다가가지 말거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놀라 바라보는 윤서에게 언제 그런 무서운 말을 했냐는 듯 다시 우아한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웃으면서,

“네가 어서 이 서온돌의 정식 주인이 되는 날이 보고 싶구나.”

하고 돌아가 버렸다.

윤서가 놀라 박 상궁을 찾아가 의논했더니, 박 상궁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하가 여색을 밝히긴 밝히신다. 오죽하면 기미 보던 상궁도 덮치셨겠느냐. 그러나 권가, 너를? 제가 맨날 여기저기 여인을 밀어 넣을 수를 써대니 그따위 드러운 생각이나 하는 것이지. 전하는 원칙에 극도로 충실하시고 엄격하신 분이다. 네가 발가벗고 전하 앞에서 깨춤을 춰도 눈 하나 깜빡 안 하실 것이다.”

단언하더니, “아니지. 잘 빚은 도자기 보듯 보기야 보시겠지. 권가 네가 좀 늘씬하냐.” 껄껄 웃는 것이었다.

동궁전의 내관과 나인들은 윤서 보기를 무슨 발 세 개 달린 삼족오 보듯 했다.

간밤 대청마루에서 이향이 하던 입맞춤을 훔쳐본 나인들은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의 눈빛으로 윤서를 곁눈질했고,

암암리 전균의 세력에 속하던 내관과 궁인들은 원수 보듯 노골적으로 적대감과 혐오를 표출했다.

함께 번을 서던 최가와 윤가만이 친근하게 다가와 “전하를 독대하다니, 축하해. 곧 저하의 정식 후궁도 될 것이고. 그렇게 귀하게 되어도 함께 번을 서던 우리를 모른 척하면 안 된다.” 하고 부러움 섞인 축하 인사를 해 주었다.

이날 윤서를 감싼 미묘한 수런거림을 느꼈는지 홍위는 다른 때보다 더욱 찰싹 붙어서 한시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곤 천추전으로 전하를 뵈러 가야 한다고 말하자,

“가티 가자. 할마마아께저 나도 오라고 했다.”

하고 일전에 동궁전에서 함께 오라고 하셨던 말씀을 용케 기억해내고 따라나서려 했다.

오늘은 혼자 가서 뵙고, 다음에 같이 가서 뵙자고 윤서가 말하자, 홍위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윤서의 치맛자락을 잡고,

“빨리 와야, 빨리 와.”

울먹거려서, 아침마다 아이 떼어놓고 출근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엄마들 심정이 무엇인지 윤서에게 절절하게 느끼게 했다.

천추전까지는 엄 상전이 직접 데려다주었다.

옆에 견습 내시인 소환 옷차림을 한 매금이를 달고서였다.

“저하께서 함께 보내라고 하셨네.”

윤서가 매금이를 보고 놀라자 엄 상전이 말했다.

그리고 자박자박 천추전으로 걸어가는 길에 윤서가 긴장해 있는 것을 보고 젊었을 적 전하를 모시면서 터득한 바를 일러주었다.

“전하께서는 성심을 다하는 이들에게 늘 관대하시네. 묻는 말씀에 신실하게 답을 올리면 되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너무 긴장해 애를 쓰면 오히려 무슨 꿍꿍이가 있나 의심하시는 분이시네.”

하고 친근하게 대하던 간밤과 달리 다시 공손하게 장차의 세자빈 대하듯 윤서를 대하는 것이었다.

“전하, 권가 나인이 왔습니다.”

다소 젊은 내관이 천추전 안을 향해 고했다.

천추전 앞에 서자 바로 엿새 전 여기에 개처럼 끌려왔던 황망한 공포의 순간이 되살아나, 윤서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엄 상전이 곁에 다가와 조용하게 속삭였다.

“나와 소환이 여기서 기다릴 터이니, 마음 놓고 들어가거라.”

하고 다른 궁인들의 시선을 의식해 어린 나인 대하듯 안심시켜주었다.

신을 벗는 윤서의 눈에 댓돌 위에 전하의 태사혜와 함께 아주 귀하게 보이는 비단 당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안에 신분이 귀한 여인이 들어 있는 듯했다.

안에 들어가 절을 올리고 엎드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하의 물음이 다다다 떨어졌다.

“일전에 네가 스스로 안고 토닥거린 연유가 무엇이냐? 왜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그 이후 너는 왜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당당해져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것이냐?”

그러자 옆에서 젊은 여인의 활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아바마마. 숨 좀 돌리게 하고 하문하세요. 그리고 눈을 똑바로 보다니요? 권가야, 특별한 윤허가 없는 한 전하의 용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다는 걸 세자 오라버니께서 안 일러 주셨더냐? 어마, 나라도 진즉 일러 줄 걸.”

윤서가 놀라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전하의 옆에 여인이 앉아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눈으로 윤서를 보고 있었다.

연두색 금박 무늬 당의를 입었을 뿐 머리에 별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았는데도 전신에 고귀한 유쾌함이 가득하였다.

태생부터 귀하게 생겨나 귀하게 사랑받으며 자랐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리고 죽은 후까지도 한결같이 고귀할 수밖에 없는 오리지널 왕가 여인 특유의 당당한 유쾌함이었다.

간택이나 승은을 입어 왕족이 된 여인들이 가지는 한가닥 절박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의 공주구나.’

이향이 그 문자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전하께서 물으시면 정의 공주가 가르쳐주었다고 대답하라고 하더니, 아예 정의 공주를 천추전에 들여보내 놓은 모양이었다.

이향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느껴져서 윤서는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날 사전에 통보받지 못하고 창졸간에 끌려온 터라 너무 두려워서 계속 머릿속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겁에 질린 아이들을 달랠 때 하듯 제가 저를 힘껏 안아주고 토닥거려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하였음에도 지엄하신 전하의 안전인지라 여전히 공포 한 자락이 가시지 않아 저도 모르게 전하의 용안을 똑바로 응시하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윤서가 엎드려 해명하자, “오호?” 하더니 세종께서 정의 공주에게 물었다.

“대답이 어째 너무 매끄러운 것이 사전에 써서 외워 온 것 같지 않느냐?”

“그럴 리가요. 아주 영특한 아이입니다. 오죽하면 여인은 무식해서 말도 섞을 필요 없다고 쳐다도 안 보던 오라버니께서 매일 밤마다 불러서 무얼 그렇게 물으신다잖아요.”

정의 공주는 아주 격의 없게 대답하며 의미심장하게 깔깔거렸다.

정의 공주도 벌써 간밤 대청마루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 알고 있는 듯했다.

얼굴이 화끈해지며, 윤서는 절대로 다시는 이향이 남들 시선이 있는 곳에서 애정을 드러내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군주는 무치(無恥)란 생각이 은연중 몸에 배어 있는지 다른 곳에서는 극도로 절제된 이향이 뜻밖에도 궁인들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지난번에 네가 우리 신체가 발달하듯 우리 두뇌도 순차적으로 발달한다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그럼 그것하고 거짓말하고는 무슨 관련이 있느냐? 그렇게 계속 엎드려 있기 불편할 터이니, 몸을 일으켜 앉아 고하거라.”

그 소란이 있었는데도 전하는 지난번에 윤서가 횡설수설 고했던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윤서는 몸을 일으켜 앉아 차분히 아이들의 거짓말에 관한 현대 이론을 읊기 시작했다.

이미 전에 이론을 말씀드렸기에 이제 와서 어설프게 꾸며 말씀드리는 것을 세종께서 모르실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사실을 말하면서 장소는 거짓을 말하는 등의 정교한 거짓말은 복잡한 사고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없는 사실을 꾸며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적어도 두 돌 이후, 자신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표현할 줄 아는 바탕에서만 가능하옵고······.”

세종께옵선 이따금 ‘으흠’ ‘오호’ 하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자신이 천재에, 완벽에 가까운 국왕임에도 놀라울 정도로 집중해 경청하시는 모습에 윤서는 내심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여섯 살 이후에야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거짓말을 엄히 훈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윤서의 말이 끝나자 “오호” 하는 감탄음이 울려퍼지고 잠시 천주전에는 침묵이 내렸다.

전하께서도 정의 공주도 대체 이러한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지 궁금해 따져보는 침묵일 것이다.

윤서의 짐작은 맞았다.

“새 글자 몇 개 가르쳐 주었더니 금세 능숙하게 읽고 쓰는 거 보고 보통은 아니구나 생각했는데, 정말로 대단하구나?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정의 공주가 먼저 나서서 반쯤은 눙치고 반쯤은 정말로 궁금한 듯 물었다.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돌아가신 빈 자가 댁에 의탁했을 때 그 댁 자제뿐 아니라 노비 아이들까지 두루두루 많이 돌봤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바이온데, 과연 정확한 것인지는 미천한 지식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랬구나. 어쩐지. 우리 원손 아기씨만 키워서는 절대 모를 내용이었는데 그 전에 많이 키워봐서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그렇게 우리 원손 아기씨를 잘 돌봐드리는 것이구나.”

출처가 뭔지 모를 이야기를 하거든 먼저 나서서 장단을 맞춰 적당히 넘어가게 하라는 이향의 밀명을 받았는지 정의 공주는 열심히 윤서 말에 맞장구를 쳐주셨다.

“요전날 네가 정서 발달에서 주 양육자인 어머니가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으면 뱃속의 태아나 태어난 아기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지?”

다행히 세종께선 지난번 윤서가 지나가듯 설명한 정서 발달 항목을 물으셨다.

“예, 전하. 그래서 왕손을 가지면 왕실에서는 임신 기간 동안 성현의 말씀을 읽어드리고 좋은 음악을 연주해 주는 태교를 행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으레 해왔던 전통이라서······. 근거가, 있더냐?”

근거는 많다.

현대 뇌과학에서 모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졸을 비롯한 스트레스성 호르몬이 분비되어 탯줄로 연결된 태아에도 영향을 미치고 단순히 신체 호르몬 변화뿐 아니라 단기 기억을 형성하는 해마를 쪼그라들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엄마의 스트레스가 태아의 뇌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대 지식을 세종께 말씀드릴 수는 없는 노릇.

윤서는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아!’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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