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화. 홍위와 이향과 21세기 윤서
“너의 그 가짜 빚문서를 만든 도척지를 의금부에 잡아들였다.”
이향이 윤서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며 말을 꺼냈다.
자선당 동온돌과 서온돌 사이 대청마루 위에서였다.
이런 이야기를 비현각이 아닌 대청마루에서 나누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홍위는 보통 술시 반각(저녁 8시)이면 잠이 들었다.
그러면 ‘엄마는 섬 그늘에~’ 같은 자장가를 불러주던 윤서도 홍위 곁에서 일단 같이 잠이 들었다.
이렇게 근무가 바뀌게 된 것은 윤서가 공포 끝에 죽은 듯 쓰러진 이유가 밤에 앉아서 번을 서고, 낮에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과도한 업무 부담 때문이라고 이향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향은 윤서가 홍위의 밤번을 전담하되, 번의 형태를 홍위 옆에서 같이 누워서 자는 것으로 바꾸라 명을 내렸다.
또한 윤서가 쓰러진 모습을 본 후 홍위가 극도로 불안해하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홍위는 윤서가 죽어서 없어질까 봐 진심으로 두려웠던지 그날 이후 윤서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밤에는 반드시 윤서가 곁에 함께 누워 자장가를 부르며 재워주어야만 잠이 들었고, 낮에도 윤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게 칭얼거렸다.
한 달 뒤로 잡힌 천자문 책례 (일종의 책걸이 행사, 임금과 종친, 여러 대신들 앞에서 원손이 책에서 배운 바를 묻고 답한다)를 준비해야 해서 스승 성삼문과 오전에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윤서가 항상 곁에 있길 바랐다.
어머니 세자빈 권씨를 잃은 무의식적인 공포가 어머니 같은 존재인 윤서 또한 잃을까 두려움으로 되살아난 듯했다.
그래서 윤서는 홍위의 불안이 잦아들 때까지 밤낮으로 홍위 곁에 있기로 결정하고, 이향의 허락을 얻어 자운고와 비누 만드는 것은 홍위가 공부하는 시간에 동궁전 바깥 빈 전각에서 짬짬이 하기로 일을 조율했다.
상황이 이래서 이향과 하기로 한 ‘연애’는 당분간 짬을 내기 어렵게 되었다.
극도의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구원자처럼 등장한 이향의 지극한 애정 공세에 얼레벌레 휩쓸려 연애를 제안했던 윤서에게 이 상황은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이향을 무척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잘못하면 후궁이나 세자빈이 되어 궐 안의 답답한 삶에 꼼짝없이 묶일 수 있는 미래에 대해선 21세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온 윤서에게 따져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전균 제거를 시작으로 최종적으로 수양 대군의 세력까지 제거하고 나면 여기 조선으로 윤서의 영혼을 끌고 왔던 세자빈의 반지가 영혼을 다시 현대로 데려다줄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도 윤서는 아직 버리기 힘들었다.
낯선 조선에서 가지게 된 홍위에 대한 강렬한 애정은 실은 윤서에게도 일종의 숨구멍처럼 조선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보루이자 지향점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해야만 온전하게 살아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종래 사랑하던 이들과 갑작스럽게 단절된 윤서에게 홍위는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마침 적합한 지극히 사랑스럽고 연약한 아이였고, 홍위 또한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윤서를 깊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무사히 잘 키워 명실상부한 군주가 되게 하면 훗날 현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다는 점에서 윤서에게 홍위는 목표 지향점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향은 달랐다.
빼어나게 수려한 이향을 흠모하는 건 현대로 치면 연예인 덕질 같은 것인데, 연예인을 흠모한다고 해서 실제 그 연예인과 사귀고 결혼하길 꿈꾸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정말로 홍위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만한 것을 치운 후 반지를 껴서 영혼이 현대로 귀환하고 나면, 처복이 지지리도 없는 이향의 심적 타격은 또 어찌 될 것인가도 미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향이 지금처럼 한결같이 애정을 준다면, 그런 이향을 두고 현대로 돌아간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있을까도 걱정이었다.
자고로 못 해준 것만 가슴 미어지게 생각나는 것이 사랑이니까.
이향이 내의원을 통해 지어준 탕제를 먹고 온전하게 정신이 작동하자마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윤서는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한 연애 제안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지만 먼저 꺼낸 ‘연애 제안’을 무를 방법은 없었다.
홍위가 잠든 후 이향이 비현각으로 불렀을 때 윤서가 엎드려서 그날 공포에 정신이 나가 주제를 모르고 감히 저하께 연애 제안을 하는 망극함을 저질렀으나 이제 보잘것없는 신분의 주제를 온전히 자각한지라 감히 저하와 연애라는 참담한 무례를 저지를 수 없다고 간곡히 고했더니,
“그럼 너는 그날 마음도 없으면서 감히 세자를 희롱한 기망죄를 저지른 것이 되느니라. 네가 먼저 내게 눈을 감으라 하고 입술을 맞대오지 않았느냐?”
하고 이향이 단칼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극도의 공포와 혼란 후에 충동적으로 내려진 일종의 금치산자(禁治産者)적 결정이었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조선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홍위의 불안이었다.
윤서의 부재에 불안해하는 홍위가 자다 깨서 찾을 경우를 대비해 밤에 한시도 서온돌을 비울 수 없다는 윤서의 말에 이향은,
“날도 더워지고 해서 나도 분위기를 좀 바꿔보고 싶었다. 앞으로는 밤에 시원한 자선당 대청마루에서 일을 할까 한다. 그러면 너도 나와 연애란 것을 하다가 언제든 몇 걸음만으로 우리 홍위에게 달려갈 수 있지 않느냐?”
말하며 의뭉스럽게 웃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이향은 낮 업무를 마치고 동궁으로 돌아오면 비현각에서 처리하던 일거리를 모두 대청마루로 가져 와 일을 했다.
그리고 홍위가 깊게 잠들고 나면 윤서를 불러 이제 ‘연애’를 할 시간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그리고 때로 애석하게도) 앞이 훤히 트인 대청마루라 연애의 애정 행각이 손을 잡는 것 정도라는 점이었다.
이날도 이경이 지나자 윤서를 부른 이향은 가짜 빚문서를 만들어 윤서를 협박한 마포나루 도척지 일당을 추포해 의금부에 잡아들였다는 말을 해 주었다.
“지문을 채취하는 데 성공한 것인가요?”
윤서가 놀라 묻자, 이향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문 채취는 지금 한창 실험 중이다. 이번 건은 그 문서에 적힌 날짜에, 그리고 그 전후로도 윤서 네가 궐 밖으로 나간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아!”
궁인이 밖에 나가려면 반드시 용건과 행선지를 적고 출패를 받아야만 하고 정해진 시간에 돌아와 출패를 반납해야 한다.
어느 정도 궐 생활이 익숙해지고 권한이 쌓이게 되면 닷새 전 윤서가 나갔던 것처럼 윗사람의 편의로 출궁 용건을 다른 용건으로 둘러댈 수는 있지만, 정해진 시간까지 돌아와야 하는 것은 예외 없이 지켜야 했다.
“가짜 빚문서의 내용에 동의한 너의 양부도 함께 잡아들였다. 궐에 들어와 홍 승휘 거처에 들었던 너의 이부자매도 조만간 의금부에 소환될 것이다.”
이 말을 이향은 윤서의 손을 슬그머니 잡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꺼냈다.
왕실과 엮였다가 줄줄이 멸문지화를 당한 원경왕후 여흥 민씨 가문과, 지금 중전마마의 청송 심씨 가문의 비극을 염두에 두고 혹여 윤서가 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까 걱정한 까닭이다.
윤서가 진짜로 ‘권가’였다면 의붓 가족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겠지만 윤서는 몸만 권가였고, 가여운 권가를 그토록 착취하고 목숨까지 해하려 한 최가은네 가족을 그냥 둘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배후를 알아봐 달라는 윤서의 부탁에 여러 조사를 한 노산대가 엊그제 매금이를 통해 도척지란 자의 뒤에 수양 대군 부인의 친정 쪽 윤씨 가문의 자본이 얽혀 있다는 사실도 전해온 차였다.
도척지와 한꺼번에 엮어 윤씨 가문의 자금줄을 옥죄기에 아주 좋은 패를 그냥 놓칠 수 없다!
윤서는 며칠 동안 이향의 뜨거운 애정 공세를 한사코 외면하던 자세를 버리고 이향의 손을 살포시 맞잡고, 슬쩍 다가앉아 있는 애교를 싹싹 긁어모아 고했다.
“저하, 도척지란 자는 마포나루의 거대 선주로 삼남에서 올라오는 세곡미와 공납품을 운송하는 세곡선을 마포와 용산에 여러 척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자가 저지른 죄가 고작 빚 문서 위조 하나만도 아닐 것이고, 또한 그자 홀로 저지른 죄도 아닐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기회에게 그자와 그자 배후에 있는 세력까지 몽땅 다 잡아 처벌해야 합니다, 저하.”
“응?”
원래 도척지를 시작으로 그간 세곡미를 실은 세곡선을 고의로 바다에 침몰시킨 후 나중에 건져내 세곡미를 빼돌리는 자들과, 공물을 대납하는 과정에서 현감과 짜고 폭리를 취하는 무리를 함께 색출할 계획을 진행 중인 이향은 놀라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일에 가담한 뒷배 세력이 왕실의 친인척으로 수양 대군의 부인의 윤씨 가문, 한확의 한씨 가문 등 최고의 세도가 가문이 얽혀 있어 극도의 기밀로 은밀하게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윤서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저도 소식통이 있습니다, 저하. 저하가 계신 동궁전의 나인이자 우리 홍위 아기씨의 보모 나인인 저를 그렇게 속여 해하려 한 자를 제가 그냥 두고 볼 수 있나요?”
윤서는 성심을 다해 이향의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유혹적으로 이향의 시선을 얽었다.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시선을 오래 마주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고란 심리학적 실험을 응용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아 여인을 주의 깊게 대해본 적은 없지만 세자로서 조정의 중신부터 명나라 사신, 장안의 거부, 궐 말단의 무수리와 방자까지 모두 제 이익 실현을 위해 치열하게 뛰는 이들을 두루두루 만나본 이향에겐 뻔히 읽히는 수작질이었다.
‘이것이 베갯머리 송사라는 것이로군.’
이향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고는 윤서가 하는 귀여운 짓을 더 보기 위해 짐짓 고개를 흔들었다.
“네 소식통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도척지란 놈은 그저 여러 선단을 거느린 선주이자 왈패로, 제가 가진 완력을 이용해 너의 의붓 가족처럼 양심 없는 이들과 짜고 사람을 매매해 팔아먹는 파렴치한에 불과한 듯하더구나.”
역사에서 세종 못지않은 고아한 성군이었다는 이미지를 아직도 단단히 가지고 있는 윤서로서는 이향이 능청스럽게 연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홍위의 가장 큰 정적인 수양 대군 일파에 이향이 아직도 무심하다고 생각해 복장이 터져서, 급기야 제 입으로 ‘연애’를 들먹이고 말았다.
“저하, 제가 연애를 하며 천천히 저하를 알아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하께서 여러 현안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하시며 백성의 고달픈 삶을 좀먹는 버러지들을 싹 다 잡아들이는 성군이 되시겠구나 느껴져야 제가 저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빈이든 무엇이든 되어볼까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간은 먼저 ‘연애’를 꺼내면 “그날은 제가 죽을까 봐 정신이 나가서 주제를 모르고 헛소리를 하였습니다.” 하고 딱 잡아떼던 권윤서의 입에서 드디어 ‘연애’를 꺼내는 데 성공한 이향은, 윤서가 앉아 있는 방석을 잡아 쭉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날 윤서가 하였듯 윤서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똑같이 속삭여주었다.
“연애는 무릇 이렇게 서로 좋아하고, 그래서 마음을 표현하지만 반드시 빈이 되거나 승은 상궁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윤서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저 세자이고, 윤서 너는 그저 우리 홍위의 보모 나인인 채로 만나 때때로 마음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날 권윤서가 자신에게 행했던 것처럼 얼굴을 아주 가깝게 당기며 또 속삭였다.
“또한 어른의 연애란 이렇게,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까지 하는 것이니. 눈을 감거라, 권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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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신시, 윤서는 아파서 미뤄졌던 세종과의 알현을 위해 천추전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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