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운명이 뒤바뀌는 밤 (2)
“······.”
“······.”
다정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렸다.
사랑을 처음 안 이향은 무어라 제 마음을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제 아들을 품에 안은 여인을 바라만 보았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사랑이 기쁘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 윤서는 묵묵히 저를 눈에 담는 이향을 바라만 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밖에서 조심조심 아뢰는 기미 상궁의 목소리에 깨졌다.
“저하, 명하신 타락죽 만들어 왔습니다.”
“들여오게.”
이향은 여전히 윤서에게 시선을 오롯하게 맞춘 채 명을 내렸다.
문이 열릴 때 윤서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누워 있는 방향이 문 쪽이었기에, 누운 채 세자의 시선을 받는 나인이란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저하, 날이 더워 미리 짜 놓은 우유가 없어 새로 마련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괜찮으이. 내 곁에 두고 나가게.”
“소인이 기미를,”
“괜찮아. 내가 기미를 볼 것이야.”
“!”
세자가 저 천년 묵은 불여시 같은 나인에게 단단히 홀리셨다더니, 시선조차 오롯하게 나인만 바라본 채 큰일 날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만 세자 저하의 명은 지엄한지라, 상궁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나인과 그 품에 쏙 안긴 원손 아기씨를 힐끗 보곤 동온돌을 나왔다.
“윤서야, 무얼 좀 먹어야지. 탕약 외엔 아무 것도 못 먹지 않았느냐.”
마침내 할 말이 생겨 기쁜 이향은 소반을 들고 윤서의 머리맡으로 왔다.
눈을 감은 채 ‘우리 금욕적인 냉미남 세자 저하께서 원래 이런 분이셨나.’ 탄식하던 윤서는 하는 수 없이 눈을 떴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 내가 먹여 주랴?”
벌써 한 입 입에 넣어 우물우물 기미를 보며, 이향이 말했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폭주 기관차처럼 직진해오는 이향의 마음이 좋기도 하지만 또한 부담스러워서 ‘아닙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하고 거절하려던 윤서는 고소한 타락죽 냄새에 갑자기 맹렬한 허기를 느꼈다.
정말 소 한 마리라도 다 잡아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지독한 허기였다.
윤서는 조심스럽게 품 안의 홍위를 떼어내 바로 눕히고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준 다음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려고 했는데, 핑 현기증이 돌며 바닥을 짚은 팔에서 힘이 쭉 빠졌다.
도로 요 위로 쏟아지는 윤서의 상체를 이향이 받아안았다.
“저하······.”
“쉬, 힘드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벌리거라. 이거 굉장히 고소하다.”
이향은 뒤에서 윤서를 안아 널따란 가슴에 기대앉게 한 후 타락죽이 든 주발을 왼손에, 은수저를 오른손에 들고 한 수저 떠 윤서의 입에 대어주었다.
열 살이 넘은 후 부모님도 이렇게 안고 무얼 먹여 주신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굉장히 어색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첫술을 받아먹은 후, 윤서는 먹이를 조르는 아기새처럼 연신 입을 벌렸다.
피로에 지친 몸이 타락죽을 갈망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먹여 주던 이향이 소리 없이 웃는 것이 흔들리는 가슴의 진동으로 고스란히 등으로 느껴질 만큼, 윤서는 열심히 받아먹었다.
후식으로 영지버섯을 넣은 따스한 산삼차까지 야무지게 받아마신 후.
윤서는 마침에 온몸에 도는 활력과 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저하, 이제 괜찮습니다. 저 혼자 앉을 수,”
“아니다. 타락죽 한 그릇에 괜찮아질 리가 있느냐.”
“······.”
당사자가 괜찮다는데도 저하는 괜찮지 않음을 고집하시며 오히려 윤서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으셨다.
에라 모르겠다.
윤서는 절반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또 절반은 무척 안전하게 보호받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기대 눈을 감았다.
검어진 시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들리고, 또 밤번을 서는 호위의 병장기 절걱거리는 소리, 먼 산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지금이 몇 시입니까?”
“아까 삼경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저하는 무얼 좀 드셨습니까?”
“아까 홍위랑 같이 먹었다. 홍위가, 윤서 네 곁을 한사코 떠나지 않으려 해서 함께 재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향이 말을 할 때마다 윤서는 소리통의 울림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하.”
“으응?”
“저하는 저의 어디가 좋으세요?”
“다, 모두 다 좋다.”
“······.”
모두 다 좋아해 주셔서 감사하기는 하지만 윤서는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복잡했다.
“저하, 저를 어디까지 올리려 하십니까?”
그러자 이향은 윤서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 조용하게 고백했다.
“너는 나의 빈이자 유일한 반려로 조선을 함께 다스릴 것이다.”
이향의 목소리에는 윤서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리란 단호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윤서는 정말이지, 사내 하나 사랑했더니 온 조선이 함께 딸려오는 그런 거대한 관계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리 다정하고 이리 수려한 이향을 이대로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저하. 우리, 연애만 해요.”
“······?”
‘연애’란 말을 알지 못하지만, 윤서가 말하는 어조를 통해 자신이 바라는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이향이 몸을 굳혔다.
“세자빈 되는 거 말고, 저는 저하랑 연애가 하고 싶어요.”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마주 보고 눈을 맞추며 해야 하는 까닭에 윤서는 배를 단단히 감싸고 있던 이향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이향도 순순히 윤서를 놓아 주었다.
윤서는 이향과 마주 보고 앉았다.
지문 채취를 이야기하러 비현각에 갔던 것이 어젯밤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룻밤 새 이향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
이향은 말없이 윤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일국의 세자이고 우리 홍위를 비롯해 몇 명의 자식까지 가진 사내가 사랑에 거절당한 상처받은 소년의 얼굴로 윤서를 보고 있었다.
“저하.”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윤서는 팔을 뻗어 두 손으로 이향의 뺨을 감쌌다.
“!”
연애란 것만 하자면서 이렇게 다정하게 뺨을 감싸는 여인은, 아니 여인이 이리 다정하게 뺨을 감싸게 허락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스물아홉의 이향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여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는 빈이거나 후궁이거나 승은 상궁이거나만 알아온 이향에게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연애’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수없이 읽은 그 어떤 서책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연애는요, 저하. 이렇게 서로 좋아하고, 그래서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지만 제가 반드시 저하의 빈이 되거나 승은 상궁이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하는 그저 저하시고, 저는 여전히 우리 홍위의 보모 나인인 채로 때때로 만나 마음을 확인하고,”
윤서는 서서히 이향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어른의 연애는 이렇게, 사랑까지 표현하는 것이지요. 눈을 감으세요, 저하.”
무엇에라도 홀린 듯 이향은 한낱 나인의 명에 따라 눈을 감았다.
컴컴하게 어두워진 시야에 다른 오감은 더욱 날카롭게 살아나, 따스한 숨결이 코에 와 닿는 것과 뒤이어 말캉하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와 닿는 것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윤서는 이향의 입술에 입술을 대고 가볍게 키스를 하다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애가 몇인데, 우리 세자 저하께서는 도무지 키스라는 걸 안 해보셨는지 입은 벌리지 않고 그저 입술만 내밀고 계셨다.
윤서의 웃음소리에 이향이 눈을 떴다.
코와 코가 맞닿은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무엄하구나, 권윤서.”
이향은 윤서가 했던 것처럼 두 손으로 윤서의 뺨을 감싸고 입술을 대었다.
입을 벌려 행하는 어른의 키스였다.
농밀함이 짙어져 욕망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질 때, 윤서는 힘겹게 이향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아, 연애는요, 저하.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는, 하아, 거에요. 만남을 거듭하며, 저 사람이 정말로, 나의 사람인가, 하아. 우리, 천천히, 천천히 알아가요.”
천천히.
그대는 혼인마저 통치 행위의 일환인 조선국의 세자이고.
천천히.
나는 아직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이방인이니.
“저하, 천천히. 천천히 우리 연애해요.”
“···나는 이미 너를 내 사람이라 확신하지만, 네가 연애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그리하마.”
욕망이 불거져 고통스러웠지만, 이향은 권윤서의 말을 수용했다.
권윤서가 말하는 ‘나의 사람인지’ 알아가는 연애는 다른 여인들과 해보지 않은 행위였고, 그래서 세자나 세자빈이란 무거운 의무를 벗고 보통의 사내와 보통의 여인으로 만나는 특별한 시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래서 연애 1일째의 밤을 농밀한 키스만으로 보내고, 홍위를 사이에 두고 잠을 잤다.
두 사람 모두 그닥 깊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지만 그만큼 달콤한 고통의 밤이기도 했다.
*****
다음날 새벽, 이향은 홍위와 윤서가 깰까 서온돌로 건너가 의관을 갖추고 중궁전에 문안을 들었다.
어제 천추전에서 있었던 소동은 세종에게서 전해 듣고, 나중에 권가가 쓰러져 어의까지 다녀간 후 동온돌에서 훙위와 함께 잠들었다는 말은 박 상궁에게서 이미 들은 소헌 왕후는 유심히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아들은 피곤해 보이면서도 표정이 밝았다.
“권가란 아이는 괜찮아진 것이냐? 하긴 쉽게 회복되지 않겠지, 그리 놀랐으니.”
하고 소헌 왕후는 세종을 흘겨보았다.
“대체 그 아이가 그렇게 겁을 먹었으면 어서 돌려보낼 일이지 그런 애를 붙잡고 무얼 묻고 싶으셨습니까?”
그러자 세종은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아인 그렇게 심약한 아이가 아니오. 중전도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얼마나 당당하고 대찬지, 어허. 꼭 우리 어마마마 뵙는 거 같습디다. 그렇지 않느냐, 향아?”
“아, 아닙니다, 아바마마. 윤서가 얼마나 부드러운 여인인데요.”
‘윤서래.’
세종과 소헌 왕후가 눈빛을 교환했다.
아들이 드디어 아끼는 여인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소헌 왕후는 활짝 웃으며 생각한 바를 풀어놓았다.
“그 아이 가문이 썩 좋지 않아서 바로 품계를 올리긴 어려울 것 같구나. 처음에는 승휘부터 시작하고, 아들이든 딸이든 낳으면 양원으로 올렸다가 차츰 빈까지 올려도 무방하겠지.”
소헌 왕후가 이리 말하는 것은 동궁전 박 상궁의 안목을 믿기 때문이었다.
대체 권가 나인이란 아이가 어떤 아이길래 홍위는 그렇게 제 어미 따르듯 따르고, 너무 갑갑할 정도로 품행이 방정하던 아들이 미친놈처럼 안고 내달렸는지 간밤에 소헌 왕후가 묻자,
박 상궁은 에휴, 한숨을 내쉬더니 특유의 그 걸쭉한 말로 답을 올렸다.
“그 아이의 가장 큰 장점은 사무사(思毋邪)라, 생각에 사특함과 악의가 없는 것입니다. 공연히 시기하고 골내는 것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원손 아기씨를 위해서라면 제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서는 아이입니다. 또한 어지간한 사내보다 더 총명하고, 궐 안의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안 할 만큼 배포도 크지요.”
한마디로 세자빈 감이라는 소리였다.
권가의 몸이 편치 않으니 간밤에 남녀 간의 일이야 없었겠지만, 그전에도 몇 번 둘이서 밤늦게까지 비현각에 있었다니 벌써 정이 깊은 일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 소헌 왕후는 이참에 얼른 홀아비처럼 사는 아들에게 정식으로 짝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기뻐할 줄 알았던 아들의 표정이 묘했다.
“저와 권윤서는 당분간 연애를 할 것이옵니다.”
“!”
“?”
“······.”
벙 찐 침묵이 지난 후 소헌 왕후가 세종에게 여쭸다.
“전하, 연애가 무엇이옵니까?”
“그것은, 나도 모르는 것이오. 연애가 뭐냐, 향아?”
“연애는······.”
‘당장 안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는 것이옵니다.’
하고 고하고 싶었지만, 조선국 예의 반듯하기로는 제일인 이향은 차마 그리 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혹여 윤서를 건방지다고 볼까 봐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시간을 두고 서로가 배필로 맞이할만한 사람인지 지켜보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권윤서가 제 배필로 맞는 여인인지 좀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오호라!”
“그럴 만도 하지.”
쟤가 벌써 두 번이나 실패를 해서, 이번에는 좀 신중하고 싶어 하는구나.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역시 우리 세자는 참으로 속이 깊고 신중하고 반듯하도다.
속 모르는 세종과 소헌 왕후께서는 눈빛으로 서로 납득을 하시고.
그래도 사람과 재물 보는 안목이 빼어난 박 상궁이 세자빈 감이라 확언하고, 충성스럽고 신중한 엄 상전마저 벌써 세자빈 대하듯 예를 갖추어 공경한다 하니.
“향아, 너무 재지는 말거라. 그만하면 인물도 빼어나고, 성품도 빼어나고, 전하께서 무얼 물으실 만큼 총명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홍위한테 진심으로 잘하잖니?”
하고 다정하게 이향의 염장을 지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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