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운명이 뒤바뀌는 밤 (1)
“저하, 이제 그만 내려주세요.”
사정전 뜰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윤서가 말했다.
그러자 이향은 보폭을 더 크게 성큼성큼 걷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정말로 양팔로 목을 단단히 감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수 없이 이향의 목을 당겨 안으며 윤서는 오늘 하루가 너무 길고, 너무 극적이고, 그리고 너무······.
너무 지독하게 피로하여 뇌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래서 윤서는 그저 이향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뺨에 따스한 체온과 함께 불뚝불뚝 뛰는 경동맥의 맥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뺨을 자극하는 이향의 맥동은 걸을 때마다 더욱 단단히 몸을 받히는 겨드랑이 밑의 손길과 함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주겠다고 말없이 웅변하는 듯했다.
그러자 외계 행성처럼 낯선 15세기 조선에 불시착한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두 시간씩 일하는 2교대 근무로 쌓인 피로와, 살아남기 위해 잠시도 풀어놓지 못했던 긴장의 마지막 한 자락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윤서야!”
윤서의 의식은 놀라 소리치는 이향의 부름을 끝으로 완전히 새카만 잠의 세계로 깊게 추락했다.
“윤서야! 어의를! 어의를!”
이향은 놀라 소리치며 일순간에 헝겊처럼 늘어져 버린 권윤서의 몸을 안고 동궁전으로 뛰었다.
마침 낮번과 밤번을 교대하기 위해 자선당 앞 너른 뜰에 모여 있던 궁인과 호위들은 미친 사람처럼 “어의를 불러오라, 어의를!” 외치며 뛰어드는 세자 저하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세자 저하는 찌그러진 갓을 가슴에 달고 찢긴 옷을 입고 늘어져 있는 사내인지 여인인지 모를 자를 안고 “윤서의 거처가 어디냐, 아니다. 아니야. 동온돌로, 내 처소로.” 외치더니 신도 벗지 않고 대청마루를 올라 동온돌로 들어갔다.
마침 밤번을 서기 위해 온 최가 나인의 손을 잡고 대청마루에 서서 뜰을 바라보며 “거가는 왜 안 오능냐.” 칭얼거리고 있던 홍위도 한눈에 아바마마의 품에 안긴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홍위는 최가의 손을 놓고 후다닥 동온돌로 따라 들어가 보료 위에 눕혀진 권가 나인을 보더니 벌써 울먹거리며 “거가가 죽었떠요?” 하고 이향에게 물었다.
“아니다, 아니야. 여기 이렇게 숨을 쉬고 있지 않느냐.”
“으아앙, 그덤 왜 누느 안 떠요.”
홍위가 권가 앞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 난리법석을 수습한 이는 궐 밥 생활 40년이 넘어가며 볼꼴 못볼꼴, 봐서는 안될꼴까지 두루두루 겪어 노련해질 대로 노련해진 박 상궁이었다.
권가 나인이 사내 옷차림 그대로 천추전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동궁전 뜰을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던 박 상궁은 한눈에 사태를 파악하고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렸다.
“엄 상전, 어서 내의원에서 어의를 불러오게 하시오.”
“거기 매금이는 어서 가서 권가 갈아입힐 옷을 가져오너라.”
“거기 무수리 향이는 어서 가서 미지근한 물을 대야에 담아오너라.”
“최가야! 원손 아기씨 너무 놀라셨다. 어서 안아 서온돌로 뫼시거라!”
지시하고는 서둘러 동온돌에 들어가 세자 저하 곁에 앉았다.
“저하, 평소 쇠심줄처럼 우직하던 아이니 곧 기력을 차릴 것입니다. 죽는 줄 알고 너무 놀랐다가 저하 품에서 안심이 되어 이리 정신을 놓은 게지요.”
“···그러한가?”
“그러합니다. 권가가 얼마나 튼실한데요.”
세자 저하가 비로소 조금 안심하시는 낯빛이 들자 이번에는 원손 아기씨 차례였다.
원손 아기씨는 모시러 들어온 최가의 손길을 피하느라 발버둥을 치며, “거가야, 죽디 마야, 죽디 마. 아앙앙.” 통곡하고 있었다.
박 상궁은 원손 아기씨의 양팔을 세게 잡아 몸통에 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눈높이를 맞췄다.
“아기씨, 원손 아기씨, 저 좀 보세요.”
“으아아앙?”
“권가 나인은 잠들었어요. 아기씨 밤에 코 주무시면 누가 왔다 갔다 해도 모르시잖아요.”
“···으응.”
“그런데 아기씨 주무시는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댄다······.”
“권가는 침 맞고 약 먹고 하면 잘 깨어날 테니 아기씨께선 서온돌에 가셔서,”
“안 가꺼야!”
“예?”
“안 가꺼야. 거가 옆에 있쯔거야아, 아아앙.”
잘 달랜 보람도 없이 원손 아기씨는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별일 다 겪어 평소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은 박 상궁마저 가슴이 에이듯 아파지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빈궁마마 잃으시고, 겨우 의지하는 권가가 얼마나 절실하시면.
조금 정신이 돌아온 이향도 아들의 울음에서 같은 아픔을 느꼈다.
“홍위야, 이리. 아비한테 오너라. 여기 아비 무릎에 앉아 같이 권가가 깨어나길 기다리자.”
홍위는 이향의 품에 안겨서야 울음을 그치고 얌전하게 앉아 권가를 바라보았다.
아들을 토닥이던 이향은 문득 엄 상전을 불렀다.
“내사옥에 가서 전균의 처벌을 미루라고 명하거라. 권윤서가 무사히 깨어날 때까지 전균을 처벌하지 말고 단단히 가둬두기만 하라 이르거라.”
“···예, 저하.”
왕실에 큰 우환이 들면 죄인을 방면하고 처벌을 미루는 습속을 나인에게도 적용하시겠다는 말씀에 엄 상전은 놀라면서도 공손히 허리를 굽혀 명을 받았다.
때마침 내의원의 어의 전순의가 약통을 들고 등장했다.
천추전에서 나인을 둘러싸고 한바탕 난리가 나 궐의 실세로 기세등등하게 군림하던 대전 내관이 내사옥에 끌려가 곧 죽게 되었단 소식에 놀란 것이 바로 전인데, 그 문제의 나인이 다른 곳도 아닌 세자 저하의 침전에 누워 있었다.
늘 권력을 따라 성심을 다해온 전순의는 진맥을 하고 낯빛을 살핀 후, 세자 저하께 엎드려 고하였다.
“맥도 튼실하시고 신체도 강건하십니다. 다만 순간적으로 크게 놀라 기혈이 심하게 막혀 기절하듯 잠에 빠져 계신 것이니, 침을 맞고 탕약을 드시면 곧 깨어나실 것입니다.”
문가에 앉아 있다 전순의의 말을 들은 박 상궁은 ‘저 얍삽한 것이 바람이 불기도 전에 자빠지네, 자빠지길.’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면서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창백했던 낯에 홍조를 띠는 세자를 보며 또 속으로 탄식했다.
‘그간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더니, 안 미쳤던 것을 모아모아 한꺼번에 권가에 미쳤구나. 어찌할꼬, 이를 어찌할꼬. 여자 팔자는 그저 상궁 팔자가 제일이거늘. 이를 어찌할꼬, 가여운 우리 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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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전균의 처벌을 미루거라. 아직 태장을 치지 말고 단단히 가둬두기만 하거라.”
그간 혹독한 고문과 매질에 죽어간 이들의 살점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내사옥 안.
한순간에 최고의 자리에서 곧 죽을 자리로 떨어져 버린 전균은 덜컥 문이 열릴 때 품었던 희망이 속절없이 사그라드는 것에 절망했다.
그러다 명을 내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일평생 숙적인 엄자치 상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여보게, 여보게, 엄 상전! 엄 상전! 살려주시게. 우리 같이 양물 없이 버텨온 서러운 세월을 봐서라도, 좀 살려주시게.”
둘은 비슷한 시기에 궐에 수습 내관으로 들어와 비슷한 속도로 승진한 궐의 양대 실세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등롱 속에 얼굴만 동동 뜬 엄자치가 모습을 보였다.
“여보게, 엄 상전. 살려만 주시게. 살려만 주면 우리 집 광에 산처럼 쌓여 있는 보물을 모두 자네한테 바침세. 살아서 북청에 갈 수 있게만 해주시게. 제발. 이렇게, 이렇게 비네.”
태장의 횟수를 줄일 순 없더라도 태장을 때리는 힘의 강도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맞아 죽게 될 것을 뇌물을 듬뿍 먹여 몇 년 앉은뱅이처럼 기어 살다가 차츰 기력을 회복해 지팡이라도 짚고 비척거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암암리의 관행이기도 했다.
일평생 모아온 재산을 저 엄가 놈의 아가리에 쳐넣는 것이 끔찍하게 아까웠지만,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또 잡을 자신이 있기에 전균은 머리를 조아리며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엄자치는 등롱을 높이 들어 옥사 안의 전균의 모습을 확인했다.
한없이 도도하던 자가 한 시진도 안 되어 저잣거리의 거렁뱅이처럼 폭삭 비루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고소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여, 본래는 그저 꼴만 확인하고 돌아가려던 마음을 바꿔 엄자치는 지난날을 꺼내들었다.
“자네, 그거 아나? 전하께선 늘 자네는 곁에 두고 부리시면서 나는 늘 저기 회령으로, 무창으로, 전쟁이 벌어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에 밀서를 전달하도록 내보내셨네. 그래서 때로 얼어 죽게 추운 곳을 말 타고 오가면서 자네 같이 간사스러운 자만 아끼신다고 전하를 원망하기도 했다는 걸.”
그 일로 자신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생각한 전균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 그거야 다 지난 일 아닌가. 이보게. 이보게. 그리고 이제 내가 해마다 길바닥에 얼어 죽은 송장이 툭툭 차인다는 북청에 가 구르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자 엄자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해꼬지하려다 되려 당한 권가 나인이 그러더군. 인간은 시험대에 오르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나는 전하의 시험대에서 늘 전하의 어심을 헤아려 받드는 쪽을 택하였네. 전하께서 우리 원손 아기씨를 아끼시기에 수양 대군 일파의 재물에 붙어 우리 아기씨를 해치려 드는 자네를 견제하기에 최선을 다해왔고.”
“그, 그건!”
“모른다고 생각했나? 아니야. 다 보였네. 다 보였어. 내 눈에도 보인 것이 눈 밝으신 전하께 아니 보였겠는가?”
전균의 얼굴이 험악스럽게 변했다.
“하! 네놈이나 나나 양물도 없이 권력의 개로 살긴 마찬가지인데. 이기면 공신이 되고 지면 역적이 되는 것이지. 네놈도 언젠가 이 자리에 나처럼 갇히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을 해주더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전가. 그때에도 내 선택일 걸세. 내가 선택해 걸어 들어가는 죽음의 길이지, 자네처럼 더러운 술수를 쓰다 되려 당해 끌려오는 죽음의 길은 아닐 걸세. 잘 가시게. 내 자네 저승길에 노잣돈은 넉넉하게 넣어줄 터이니.”
“이, 이! 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전균을 뒤로 하고 엄자치는 몸을 돌렸다.
어서 돌아가 세자 저하와 어린 아기씨를 보필해야 한다.
그러자 등 뒤로 표독스러운 전균의 저주가 쏟아졌다.
“네놈의 영화가 몇 년이나 갈 것 같으냐, 이놈아! 선바위의 용한 무당이 네가 그리 발바닥을 핥는 애새끼가 십 대를 못 넘기고 뒈질 거라 예언했단 말이다! 이놈아!”
그러자 엄자치는 돌아서 등롱을 높이 들고 온화하게 물었다.
“그렇게 용한 무당이 네놈이 오늘 죽어갈 현실은 말해주지 않았더냐?”
“!”
엄자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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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캉하고 따스한 것이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던 윤서의 의식을 깨웠다.
눈을 떠 보니 홍위가 보였다.
조선에 온 첫날처럼 홍위가 옷고름을 꼭 잡고 품에 파고들어 있었다.
“······!”
윤서는 잠든 홍위를 바싹 당겨 안으며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등롱의 불빛 아래 하늘빛 도포를 입은 이향이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위태롭게 잠들어 있는 이향을 윤서는 오래 바라보았다.
여기서 입을 열어 ‘저하’ 하고 부르는 순간, 세자 저하와 보모 나인이라는 관계는 깨어지고 다른 관계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21세기 인간 권윤서는 15세기의 역사 속 세자를 오래도록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조용히 바라만 본 보람도 없이 이향이 문득 눈을 떴다.
우묵한 세자의 시선이 당황해 눈을 감으려는 윤서의 시선을 단숨에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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