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화. 천추전, 세종과의 독대 (2)
뇌의 경고 시스템에 위협이 감지되면 뇌의 가장 깊은 곳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도피 계획이 자동으로 시작되며 몸 전체에 경고 신호를 보낸다.
그럼 파충류의 뇌라 불리는, 인간이 아직 짐승이었던 시기에 몸을 지배했던 편도체가 전면에 나서 상위 뇌인 전두엽과, 마음의 고급 인식 기능 등으로 가는 감각과 정보를 일부 차단하며 오로지 생존을 위한 최적화 모드로 신체를 변모시킨다.
몸 전체에 코르티졸, 아드레날린, 도파민 등 강력한 스트레스 호르몬이 다량으로 분비되고 그 결과 심장은 쿵쿵 뛰고 혈압과 호흡이 가팔라지며 몸은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압도적 공포에 꼼짝없이 얼어붙게 만든다.
이성적인 뇌로 가는 정보가 순간적으로 차단되기에 이때의 기억은 부분부분 조각나 시각과 후각과 청각이 따로 파편적으로 기억에 저장되고, 언어를 관장하는 브로카 영역도 순간적으로 차단되기에 이성적인 언어로 이때의 공포를 말하지 못한다.
윤서는 상담소에서 지금의 윤서처럼 극도의 공포 상황에서 학대나 성폭행, 집단적인 폭력, 학교 폭력 등을 당한 내담자들을 상담해 왔고, 파편화된 기억을 가져 일관되게 피해 진술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법정에서 증언해 왔다.
그리고 인간으로 겪지 말아야 할 고통을 당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기력감과 수치심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피해 사실마저 무의식의 망각으로 밀어 넣어, 동시에 자기의 일부분도 잃어버린 내담자들에게 정확한 기억을 찾으면서도 동시에 그 피해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데 상담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세종의 요구대로 평소 알고 있던 인간의 두뇌 발달 단계를 기계적으로 읊자 공포에 압도되어 있던 전두엽이 깨어나고, 다량 분비되었던 스트레스 호르몬이 잦아들자 윤서는 자신이 공포에 압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상담실에서 보아왔던 내담자들처럼 앞으로 청녹색의 단령을 입은 사내 내관 둘만 짝지어 나타나도 마방 앞에서 짐승처럼 끌려오던 순간의 공포에 압도당할 것이고,
전균의 목소리만 들어도 죽음의 공포에 휘말려 몸이 굳어지며 식은땀을 흘릴 것이고, 오늘 세종 앞에서 짐승처럼 네발로 기었던 치욕감과 수치심에 궐의 생활이 못 견디게 느껴지리란 사실도 깨달았다.
삶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이고, 일상은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직업적인 상담가로서 내내 신념을 가지고 내담자들을 상담해 왔던 윤서는 이제 그 상담 치료의 원칙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혹독한 시험대에 놓이게 되었다.
“······.”
윤서는 기계적으로 읊던 말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양팔을 가슴 앞에 교차시켜 자신을 단단히 안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마셨다가 길게 내뿜고, 내뱉은 숨 끝에 여섯을 셀 때까지 숨을 참는 마음 챙김 심호흡을 하며 어깨 위에 놓인 손으로 어깨를 토닥였다.
토닥토닥.
나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짐승같은 치욕을 겪었지만, 이는 내 잘못이 아니고.
토닥토닥.
인간은 때로 신념과 타인을 위해, 자유를 위해, 종교를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만큼 고결하고 존엄한 존재이니.
토닥토닥.
21세기 인간 나 권윤서는 이리 짐승처럼 인간을 취급하며 공포를 휘두르는 궐 안의 환경에서 인간 권윤서다운 존엄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끝이 비록 죽음일지라도.
토닥토닥.
“······?”
여러 가지 자료가 빼곡이 쌓인 책상 뒤에 앉아 신기한 지식을 탐욕스럽게 듣던 세종이 놀라 권가를 응시했다.
권가 나인이 가엾도록 공포에 휘말렸음을 세종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왕이 되어 만나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정하라고 물도 주었으니 이만하면 임금으로서 베풀어야 할 관용도 충분히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세종은 권가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토닥이는 걸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권가가 눈을 떴다.
그리고 권가는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몸을 세운 채 임금을 똑바로 응시하는 불경을 저질렀다.
공포에 떨던 한낱 열여덟 연약한 나인이 저 옛날 아바마마께서 자신을 바라보았듯 당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모습은, 벌레인 굼벵이의 등을 뚫고 곤충인 매미가 나오던 광경처럼 기이하고 신비롭기까지한 변모였다!
“전하!”
윤서는 팔을 풀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체를 세워 세종을 보았다.
“전하, 전하를 알현하려면 하루 전에 먼저 통보받고 준비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 채 정당한 절차를 걸쳐 출패를 받아 출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개처럼 끌려와 전하 앞에 의관도 제대로 정제하지 못한 참혹한 모습으로 서는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
“전하께서 정하신 지엄한 알현 절차를 어겨 동궁전의 나인이자 원손 아기씨의 보모인 저를 이토록 무례한 인간으로 만들어, 전하는 물론 세자 저하와 우리 원손 아기씨의 위엄에 누를 끼치게 만든 대전 내관 전균을 처벌하여 주십시오.”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기 위해 역설적으로 죽음까지 각오한 윤서에게 못할 말은 없었다.
조선에 영혼이 끌려오면서부터 차곡차곡 쌓아둔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가 동궁의 거처로 돌아가 지금의 공포와 분노를 가라앉히고 하늘 같으신 전하께 차분히 제가 아는 바를 고할 수 있도록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허어!”
세종이 도깨비를 보듯 윤서를 보았다.
그러나 윤서는 꿋꿋하게 세종을 마주 보았다.
세종은 역사 속에서나 위대한 분이지, 살아 있는 21세기 인간 권윤서에게 지금의 세종은 전균이 저지른 부당한 폭력을 방조하는 노인에 지나지 않는다.
“······.”
“······.”
세종은 머리털이 나고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에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맹렬한 호기심이 들었다.
저 나인은 시종일관, 중궁전에서부터 여기 이 천추전에 끌려온 이 순간에도 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죽기를 각오하고 아뢰는구나.
그 무모함이 기가 막히면서도 그 무모함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결기로 느껴졌다.
제 모든 것을 걸고 저렇게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인간은 저토록 아름답구나.
감탄할 때였다.
“아바마마 소자, 들어가옵니다.”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세자가 천추전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하!”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세종은 입을 떡 벌리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향은 비현각에서 주자소, 군기시의 여러 장인을 불러들여 권윤서의 말처럼 손가락 끝 지문이 정말로 사람마다 다른지, 다르다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 흔적을 채취할 수 있는지를 토론 중이었다.
인쇄할 때 활자 위에 먹물을 묻히기 기름을 칠하는 균자장, 종이를 대고 글자를 찍어내는 인출장 등이 기름과 먹물을 다뤄 손가락 무늬 흔적을 찾아낼 방도를 생각해내기 쉬울 것이고.
군기시는 화약을 다루니, 종이 위에 남아 있을 손가락 무늬의 흔적을 찾아낼 미세한 가루를 가공하는 데 탁월한 실력이 있으리란 추론에서였다.
그런데 밖에서 엄자치가 이향에게 급하게 고할 말이 있음을 알렸다.
“권가가 원손 아기씨 모기 물린 가려움증에 도움이 되는 약을 만들겠다고 박 상궁의 집으로 나갔는데, 밤번에 교대하기 시간이 촉박하여 말 타기 편리한 사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전균이 그걸 꼬투리로 권가를 음해할까 우려됩니다.”
“들어가 장인들에게 오늘 논의한 안건을 연구하라 전하라.”
명한 이향은 그대로 사정전 옆 천추전으로 내달렸다.
사냥을 빙자한 군사 훈련인 강무를 할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맨몸으로 달리는 것은 세자 책봉 이전, 어린 시절에나 있었던 일이었다.
점차 가빠오는 숨을 내뱉으며 이향은 보검이란 자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만, 설사 보검이란 자가 있다 하더라도 권윤서를 놓아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정전 뜰에 들어서니 천추전 앞에 허리를 굽히고 이는 전균이 눈에 들어왔다.
이향은 빠른 걸음으로 천추전으로 다가갔다.
“세, 세자 저······, 으악.”
이향은 허리를 굽히는 전균의 뺨을 그대로 내갈겼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전균의 몸이 팽이처럼 팽 돌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너는 오늘, 죽을 것이다!”
말한 이향이 그대로 천추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엉망으로 헝클어진 권윤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갓의 챙은 찌그러져 뜯어졌고,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고, 아청색의 도포는 어깨가 뜯겨 안의 옥색 저고리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향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사람 때문에 이렇게나 마음이 아플 수 있는가.
이렇게나 참혹한 외관을 하고도 권윤서는 전하 앞에서조차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듯 똑바로 편 어깨가 가슴 미어지게 안타까워, 이향은 임금 앞에 엎드리며 고하였다.
“전하, 권윤서는 저의 심부름으로 출궁하였던 것입니다. 속히 다녀와야 하는 것이기에 소신이 편한 차림을 하라 명하였습니다.”
“그으래?”
“예.”
“저 아이의 말은 다르던데.”
“권윤서의 말은 혹여 저와 우리 원손의 위신에 해가 갈까 우려하는 사려 깊은 충정에서 지어낸 말입니다.”
세종은 흥미로운 눈으로 아들을 살폈다.
종묘사직을 위해 후손이 중요하니 빈궁의 방에 들어야 한다고 간곡히 타이를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드나들던 아들이 권가를 향해 내보이는 눈빛엔 뜨거운 애정이 그득하였다.
“윤서가 권가 나인의 이름이더냐?”
“예, 아바마마.”
“···데리고, 가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향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윤서에게 말했다.
“가자, 윤서야.”
‘윤서야.’
이향이 이름을 부르자 윤서는 불현듯 간밤 꿈이 생각났다.
여기 조선에 온 후 모두 ‘권가’라 부르지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어, 수려한 긴 머리 사내가 보이는 것을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서는 후둘거리는 다리로 세종께 절을 올렸다.
휘청거리는 윤서를 이향이 단단히 팔을 잡아 지탱해주었다.
“모레 신시에 다시 오거라.”
“예, 전하.”
“이번에는 미리 통보했으니, 편안하게 준비해 오너라.”
“···예, 전하.”
윤서가 뒷걸음으로 나와 천추전을 빠져나오려는데 세종께서 문득 다시 부르셨다.
“권가야.”
“예, 전하.”
윤서는 여전히 이향의 부축을 받은 채 세종에게 허리를 굽혔다.
“세자가 오지 않았어도 너는 무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자가 오지 않았어도 전균은 파직되어 형을 받은 후 저 북방의 북청에 관노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러자 열린 문으로 전하의 음성을 들은 전균이 엎드려 이마를 쿵쿵 땅에 찧으며 울부짖었다.
“전하,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용서해 주시오소서.”
“끌어다 내사옥에 가두고 태장 육십 대를 때려라!”
세종께서 엄한 목소리로 명하셨다.
‘전균을 제거했다!’
일찍부터 수양 대군의 밀정 노릇을 하며 궐의 동향을 빼돌리고, 궁인들이 암암리에 홍위를 홀대하게 만들었던.
그리고 무엇보다 훗날 문종이 종기에 걸렸을 때 신하들의 접견을 방해하고 괜찮다고만 하여 제대로 된 치료 시기를 놓치게 했던, 그래서 때 이른 죽음에 이르게 했던 원흉이자,
계유정난 때 수양 대군에게 우리 홍위를 볼모로 넘긴 전균을 제거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려다 결국 죽게 되더라도 전균만은 동귀어진하려 했는데.
죽음을 각오하며 고했던 긴장이 풀리자 순간적으로 온몸에서 힘이 다 빠졌다.
윤서가 주르륵 땅에 주저앉으려는 찰나, 이향이 윤서를 안아 들었다.
“저, 저하!”
“떨어지지 않게 목을 단단히 감거라.”
놀란 궁녀와 내관들이 웅성거리자 이향이 명했다.
“모두 엎드려 고개를 숙이거라.”
모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뜰을 이향이 윤서를 안고 성큼성큼, 당당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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