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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2화 (22/255)

제 22화. 천추전, 세종과의 독대 (1) / 끝에 세 줄 추가

조선판 보검이를 알 리 없는 윤서는 엄 상전의 말을 흘려듣고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부드러운 광목천으로 가슴을 단단히 두른 후 연한 하늘색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말타기 편하게 옆과 뒤가 트인 아청색 대창의를 입고 갓을 썼다.

“미남!”

좀처럼 말이 없는 매금이가 윤서의 옷차림을 보고 엄지를 들어 보이며 한 마디 던졌다.

매금이는 소년들이 입는 쾌자를 입고 머리에 복건을 썼는데, 깡 말라서 소녀인 것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이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거세를 당한 내관들은 남성 호르몬이 거의 분비되지 않아 수염도 없고 목소리도 가늘었다.

그래서 키가 큰 윤서가 동궁전의 마방에서 데려온 말을 끌고 건춘문 밖으로 나갈 때 내시부 출패를 보여주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윤서는 이제 능숙하게 등자에 발을 걸고 말 등에 휙 올라탔다.

첫날은 익숙하지 않아서 왼쪽 발을 등자에 걸고 매금이가 엉덩이를 밀어주어서 간신히 말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올라타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말 등이 높게 느껴져 허리도 못 펴고 간신히 구보로 육조 거리를 지나갔는데, 점차 권가의 몸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돈의문으로 향하는 동서 관통로에 들어섰을 때는 바른 자세로 꽤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건춘문에서 광화문 쪽으로 온 후, 널따란 육조 거리를 지나 다시 서쪽으로 난 동서 관통로를 달려 돈의문을 나서면 박 상궁의 저택이 있는 반송방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 박 상궁 마마님의 탁월한 부동산 투자 안목이 실감 되는 것이 바로 근처에 명나라 사신들을 맞이하는 모화관이 있고, 남쪽으로 조금 달려 내려가면 마포나루가 나오고, 더 북동쪽으로는 의주까지 쭉 뻗은 사행로가 나온다.

사통팔달의 요지에 있는 사십 칸짜리 기와집에 가까워지자 말발굽 소리를 듣고 노산대가 마중을 나왔다.

오십 대인 노산대는 마음씨 좋은 중늙은이처럼 보이지만 소매를 걷은 팔뚝에 크고 작은 칼자국이 여러 개인 것이 왕년에 칼 밥 좀 먹어보신 것처럼 보였다.

“구해놓으라 한 약재라 기름들 다 구해 두었지비. 기런데 도야지 기름은 잘 상해서 쓰기 직전에나 만들어야 갔소.”

아주 진한 저 북쪽 사투리였다. 그렇지만 박 상궁님 말로는 마음만 먹으면 팔도 사투리 다 쓸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윤서가 충청도 사투리에 익숙하다고 하자,

“마포 것들 꺼불면 말유. 저기 그 내 동상들 시켜서 손을 씨게 봐 주것구먼유. 항아님은 아~무 것도 걱정허지 말어유.”

하고 단번에 아주 느릿하고 순박하여 좀 의뭉스럽게 들리는 사투리를 구성지게 지어냈다.

일 처리가 딱부러지는 노산대는 지난 번 첫 번째 방문 때 윤서가 부탁했던 물품을 며칠 만에 다 구해놓았다.

행랑채의 방문을 열어 보이는데 방바닥 가득 강화 갯벌에서 뜯어온 함초가 가득했다.

“소주 고리는 구하기 어렵지 않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주둥이가 긴 것은 좀처럼 없어서 따로 철야장한테 주문해 두었습죠.”

윤서가 노산대가 거느린 노비, 그러니까 박상궁 마마님 노비의 노비가 지은 밥을 맛있게 먹고, 요강용으로 만들었다는 동그란 도자 항아리에 쉬나무 기름, 동백 기름, 참기름을 각각 붓고 우리 홍위 모기 물린 데랑 우리 냉미남 세자 어르신 초기 종기에 바를 자운고 용 약재를 온침하기 시작했을 때가 오시 정각 (오전 12시) 지날 무렵이었다.

자초와 당귀, 고삼, 금은화, 감국, 백지, 연교, 유근피, 작약, 황금 등 피부의 염증을 완화하고 가려움증을 줄여주는 약재를 거의 다 온침했을 때 갑자기 밖이 소란하더니 엄 상전의 비서 역할을 하는 젊은 내관이 뛰어 들어왔다.

“권가 나인, 당장 궐로 돌아가야 하네.”

“어, 왜요? 우리 아기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아기씨가 아니네. 대전 내관 전균이 와서 전하께서 자넬 부르셨는데 왜 당장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고 서슬 퍼렇게 난리가 났네.”

전균!

세조한테 붙어서 우리 홍위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놈의 이름을 듣자 이가 저절로 악물렸다.

“갑시다. 매금아, 가자.”

윤서는 재빨리 말에 올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건춘문 앞에 도착하기까지 이 각의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나올 때와 달리 건춘문을 통과해 동궁으로 무사히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마방에 말을 넣으러 가는데 갑자기 환관 둘이 나타나 양옆으로 윤서의 팔을 붙잡았다.

매금이가 순식간에 튀어 오르며 팔의 채찍을 풀려 했다.

“매금!”

여기서 무기까지 나오면 진짜 큰일이 난다.

“넌 동궁에 돌아가 엄 상전 나리께 내 소식 좀 알려줘.”

그렇게 매금이를 보내고 윤서는 천추전으로 끌려갔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어설프게 튼 상투가 다 풀어져 봉두난발이 된 머리라도 좀 정리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전균의 내시들은 들은 체도 않고 윤서를 질질 끌어다 천추전 뜰에 꿇렸다.

“오호라, 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나인 주제에 사내처럼 도포를 입고 갓을 썼단 말이지. 어디 전하께서 무어라 하실지 좀 보자.”

전균이 뱀처럼 쉭쉭거리며 윤서를 노려보더니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추전 안을 향해 고했다.

“전하, 권가 나인이 왔습니다.”

“들라 하라.”

윤서는 손으로 대충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갓 안에 쓸어 담고 천추전의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전하, 이것이 발칙하게도 사내 옷을 입고 마음대로 궐 밖을 드나들었습니다. 대체 동궁의 질서가 이렇게 참혹하게 엉망일 수 있는지. 동궁전의 상전 엄자치까지 엄히 처벌해야,”

“누가 너더러 동궁전의 일을 감히 입에 담으라 했더냐. 이 나라 국본이 거하시는 곳의 일을!”

세종께서 버럭 호통을 치자 전균이 바싹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벌벌 떨며 서둘러 전각을 나갔다.

윤서는 천추전 안의 문가에 엎드린 채 감히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떨었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여기가 15세기 조선이라는 것이, 등에 쏟아지는 전하의 눈길만으로도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온몸은 벌써 식은땀에 흥건하게 젖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윤서는 의식적으로 가슴을 부풀리고 숨을 뱉어내는 심호흡을 필사적으로 했다.

“그 꼴로 무엇을 하러 궐 밖에 나갔던 것인지, 고하라.”

세종의 명이 떨어졌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형태일 것이라고 윤서는 생각했다.

선왕 태종께선 걸핏하면 내시와 궁녀에게 장을 때리는 혹독한 군주였지만 의외로 큰 잘못은 대범하게 넘기셨는데, 금상 전하는 매는 때리지 않는 대신 원칙을 중시하시어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엄히 처벌하고 죽이기까지 하셨다는 박 상궁의 말도 생각났다.

반지, 그 반지를 끼고 있어야 했는데. 그래야 죽어도 현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텐데.

여기서 내가 죽으면 겨우 활달하게 씩씩해진 우리 홍위는 어찌 되는 것인가.

이향이 부디 목욕 열심히 하고 얇은 옷 입고 과로 덜해서 오래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홍위가 무사히 커서 오래 살 텐데.

그런데 사내 옷 입고 궐 밖에 나간 것이 과연 죽을죄인가.

공포에 압도된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머리가 온통 하얗게 백지가 되는 듯했다.

윤서는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입 한가득 퍼지는 찝찔한 피의 맛과 온몸을 관통하는 격한 통증을 지렛대 삼고서야 윤서는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소, 소인은, 밤번을 서는지라 낮에야 조금 시간이 나서, 약재를 만들기 위해, 밖에 나갔습니다. 사내 복장을 한 것은, 빨리 달려갔다 빨리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말 타기 편하라, 한 것입니다.”

“무슨, 약재를 만든다고?”

“우리 원손 아기씨, 모기 물리신 데 바를, 연고입니다.”

“······.”

세종께선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하셨다.

군주의 침묵은 군주의 호통보다 더 무서웠다.

윤서는 속으로 ‘제길, 세자빈 권씨! 나중에 죽어서 봐. 아주 작신작신 밟아놓는다, 내가.’ 이를 갈았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권씨를 욕하니 공포가 좀 덜어졌다. 인간은 증오와 원망을 통해서도 살아갈 힘을 얻는 존재니까.

“너, 저기 오미자 냉차가 있으니 좀 마시거라.”

이윽고 세종의 말씀이 들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들은 것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인지라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윤서는 그저 더욱 고개를 낮게 조아렸다.

“권가야, 저기 오미자 냉차 있으니까 좀 마시고, 정신을 차리라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보니 서른은 훌쩍 넘어 보이는 상궁이 주전자와 도자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구석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상궁이 그 유명한 귀도 안 들리고 말도 못하는 천추전 붙박이 상궁인 듯했다.

‘죽지는 않겠구나.’

죽일 대상에게 먹을 것을 주는 건 싸이코패스나 하는 짓이다. 인간은 자신이 먹여 기른 것을 쉽게 죽이지 못하도록 진화해 왔으니까.

물론 권력의 욕망이 앞서면 살뜰히 거둬 먹이다가도 잔혹하게 죽일 수 있지만, 윤서는 말 한마디면 죽일 수 있는 나인 나부랭이니 기껏 물을 먹여 주고 죽일 대상 축에도 못 들었다.

안도감이 들자 온몸에 힘이 빠져 몸을 일으킬 기력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윤서는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 상궁 앞으로 갔다.

벙어리 상궁이 도자 잔 한가득 붉은색이 고운 차를 따라주었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통과해 위로 내려가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빈 잔을 내밀어 한잔 더 받아 마시고, 이번에는 몸을 일으켜 뒷걸음으로 문가로 와 다시 엎드렸다.

“나이를 먹는 것하고 거짓말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하거라.”

“!”

이 양반이 지금 오미자 차 주며 날 살려둔 게 이거 물어보려 하시는 거였어!

그럼 이거 다 듣고 나면 죽이는 건가.

아아, 세종 대왕은 책으로나 뵙고 존경하는 분이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는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아!

윤서가 속으로 절규하는데,

“일전에 네가 중궁전에서 ‘거짓말을 꾸며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사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틀 전 일에 대해 장소는 정확히 고하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꾸며 말할 나이는 우리 아기씨께서 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하고 고하지 않았더냐?”

헐.

헐헐.

이분 천재시라더니,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시네.

세종 대왕의 경이로운 기억력과 지식에 대한 미칠 듯한 탐구욕을 직접 목격하자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었다.

아는 것, 모르는 것까지 싹 다 털어놓자. 그러면 다른 게 궁금해서라도 죽이진 못하시겠지.

“인간의 두뇌는 순차적으로 발달합니다. 우리 신체가 숨쉬기나 울기, 자기, 먹기 등 태어나면서 기본적으로 갖춰진 능력에 시간이 지나면서 기기, 걷기, 뛰기로 발전해 나가듯 우리 뇌도 처음엔 단순히 좋고 싫음 정도에서 가지고 싶은 소망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아 단계, 그리고 점차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바람을 구별하고 이용할 줄 알게 되는 단계까지, 그리고 나아가 지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지식을 열망하는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까지 순차적으로 발달합니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윤서는 두뇌 발달과 사고력의 단계를 읊기 시작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알게 되었냐고 추궁을 받을지 모른단 두려움보단 사내 옷 입고 마음대로 궐 밖을 휘젓고 다녔다고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는 지식을 풀어 말하다 보니 공포의 첫 단계에서 코르티솔, 아드레날린 등 온갖 스트레스 호르몬이 한꺼번에 분비되면서 마비되었던 이성이 차츰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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