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화. 첫사랑을 대하는 이향의 자세 (1)
윤서는 반 시진을 쉬지 않고 홍위와 함께 뛰었다.
헐떡거리는 숨에 아까 권가의 반쪽 자매와 홍 승위를 만나 겪었던 기분 더러움을 날린 윤서는, 또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한 홍위를 잡아 올렸다.
“하아, 하아, 이제 돌아가 씻으실까요?”
윤서가 마찬가지로 숨을 헐떡이는 홍위에게 묻는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지며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홍위야, 권가 나인이 힘들겠구나. 아비한테 오련.”
이향이었다.
붉은 곤룡포를 입은 이향이 약간 붉어진 눈으로 홍위와 윤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아밤마아!”
홍위는 여전히 연줄을 쥔 손을 이향을 향해 쭉 뻗으며 몸을 기울이고,
“하아, 세자 저하.”
윤서는 권가의 몸으로 간만에 달려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홍위를 이향의 품에 넘겼다.
이향은 홍위를 꼭 안고 권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 겁을 주었건만 여전히 찬란하도록 밝게 빛을 내는 이 활달한 여인을.
붉은 석양이 이향의 얼굴을 빗겨 권가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울 때.
점점 더 깊어지는 이향의 눈동자가 송글송글 땀이 맺힌 권가의 이마와, 살짝 벌린 채 가쁜 숨을 뱉어내는 붉은 입술과, 땀에 젖어 윤기를 내는 긴 목선과,
그리고 부풀었다 사그라들었다 부풀었다 사그라드는 가슴을 담았다.
순간 이향은 팽 현기증이 일도록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윤서는 이향을 보며 가쁜 목소리로 고했다.
“저하, 하아, 이따가, 보여드릴 것이, 하아,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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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권가 나인이었단 말이지?”
“예, 전하. 그날 밤 비현각에서 저하께서 오래도록 권가를 독대하다 이리로 엄자치를 보내 독대를 청하셨습니다.”
“으흠······.”
대전 내관 전균은 대체 그 나인 나부랭이 하나가 뭐라고 전하부터 저기 수양 대군의 명례궁까지 다 나서 신경 쓰는지 모르겠지만, 받은 것이 많으니 충실하게 권가를 헐뜯기 시작했다.
“권가 그것이 요물인 것이 밤번을 맡은 후 원손 아기씨께서 저녁 공부를 소홀히 하시어 우려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도 위험하게 경회루 물가에 원손 아기씨를 모셔갔었고, 지금도 동궁 앞 공터에서 연을 날린다고 아주 시끄럽다고 합니다.”
“연을 날려? 우리 홍위가?”
“예, 권가가 손뼉을 치며 유도를 하니 어린 아기씨께서 힘겹게 따라다니는 형국입니다.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저리 거칠게 구니 주변에서 아주 심려가 큽니다.”
“······.”
“···전하, 오늘 건춘문 앞에서 소란이 있었는데 권가가 빚 문서에,”
“내일 여기 천추전으로 신시(오후 3시)까지 데려오너라.”
세종이 대전 내관 전균의 말을 잘랐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신 전하의 얼굴에서 전균은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전균은 대체 이게 무슨 조홧속인가 싶으면서도 깊게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물러 나왔다.
그 시각 한껏 뛰놀았던 홍위가 뽀얗게 씻고 고롱고롱 잠이 든 후.
윤서는 아주 곱게 빻은 숯가루를 종이에 싸고, 족제비 털 붓과 가짜 빚 문서가 들어 있는 함을 들고 비현각으로 향했다.
마침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며 사방이 구수한 흙내음으로 가득했다.
“세자 저하 표정이 심각하시네. 그러니 심기를 잘 살피게.”
엄 상전이 직접 등롱을 비춰 데려다주며 넌지시 귀띔했다.
윤서는 아까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향의 표정을 떠올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차마 뱉지 못하고 도로 삼키는 듯 목울대가 선명하게 움직였었는데.
“왜요? 또 제가 원손 아기씨랑 힘차게 놀아드려서요? 그거 아기씨 두뇌와 정서 발달에 정말로 필요해서 하는 것인데요.”
“그보단 화폐 유통과 방납 문제 때문에 그러실 걸세. 아까 김종서 대감과 정인지 대감과 한참 격론을 벌이시고도 결론을 내지 못하셨거든.”
“화폐 유통이요?”
그러자 태종 때의 저화, 세종 때의 조선통보, 세조 때의 철전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화폐를 유통하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역사 지식이 떠올랐다.
“그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네. 왜 실패했는지 결론이 안 나자 정인지 대감이 김종서 대감더러 변방에서 오랑캐나 잡고 있었으니 이리 무식하게 경제에 어둡다고 비난하고, 그러자 김종서 대감은 그럼 너는 한양에서 돈놀이로 재산을 산처럼 쌓았으면서 그 탐욕스러운 머리통으로 왜 화폐 유통 원리 하나 모르냐고 삿대질을 해서,”
윤서는 쿡쿡 웃고 말았다.
조선 최고의 두뇌라는 조정 대신 둘이 삿대질을 하며 드잡이질했다는 그 좋은 구경꺼리를 놓치다니.
“오죽하면 세상 봄날의 햇살 같으신 우리 저하께서 그렇게 싸워댈 심력을 좀 문제 해결에 집중하라고 한 소리 하시고 돌아오셨거든. 그러시고 나서 늘 무섭도록 집중하시던 분이 장계를 처리하다가도 하아, 탄식하며 눈을 감고 얼굴을 붉히시네. 그러니 정말 각별하게 조심을 해야 하네.”
그렇게 말하는데 비현각 앞 대청마루 앞에 다다랐다.
엄 상전이 안을 향해 외쳤다.
“저하, 권가 나인이 왔습니다.”
“···들라.”
한 박자 늦게 답이 흘러나왔다.
엄 상전이 이것 보라고, 저하께서 지금 화폐 문제로 무척 심각하시니 그 손가락 주름인가 지문인가 하는 거 당장 믿지 않으셔도 너무 고집스럽게 밀어붙이지 말고, 정 뭐하면 그놈들 잡아다가 내사옥 매운맛 한 번 보여주면 술술 거짓인 걸 불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재빠르게 속삭이며 어깨를 툭툭 치려다가 화급히 손을 도로 거둬들이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향은 예의 그 얇은 한산 세모시 옷을 입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엷은 분홍색의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같은 소재로 만든 하늘색 도포를 걸쳐 입고 목욕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젖은 머리를 등 뒤로 내려뜨린 채였다.
촛불 아래 빼어나게 수려한 사내의 모습이 한 폭의 미인도 같아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었지만, 윤서는 눈을 꾹 감았다 떠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향의 미모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저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향이 여전히 눈도 뜨지 않고 물었다.
화폐 유통 문제 때문에 너무도 골치가 아픈 듯했다.
선대부터 거듭 실패하고 있는 그 문제에 도움을 드려야 이 지문 채취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을 가질 것 같아, 윤서는 이향이 앉아 있는 책상 가장자리에 가지고 온 물품을 내려놓고, 책상 옆에 꿇어앉았다.
현대의 의무교육이 좋은 점은 다양한 분야의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는 커리큘럼이다. 충실하게 따라가면 15세기 대개의 문제에 기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교육 제도.
한글이 반포되면 우리 조선에서도 백성들 대상으로 국민 의무 교육 같은 거 하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러면 한 줌의 양반들이 다수의 백성들을 노비로 부리며 소황제라도 된 양 에헴에헴 몇 권의 책으로 세상 모든 걸 안다는 양 쓸데없는 고준담론으로 나라를 말아먹지 않을 텐데.
생각하며 윤서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하, 화폐 유통이 성공하려면 은자를 도입해야만 합니다.”
“!”
처음 느껴보는 사랑이란 감정이 낯설고 당혹스럽고, 권가를 보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기어이 추태를 보일 것 같아 귀로만 권가를 음미하던 이향이 눈을 번쩍 떴다.
꿇어앉은 권가가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대담하게 시선을 얽어왔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저 멀리 서역과 그 너머 나라들까지 모두 은자를 기본 화폐를 삼는 것은 그 자체가 실질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은덩이를 여기 우리 조선에 가져오든 저기 일본에 가져가든 그대로 가치를 인정받지요. 그러나 저화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종이 쪼가리인데다가, 고려 말 원나라의 교초가 없어지면서 막대한 손해를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도저히 믿고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향은 입을 떡 벌렸다.
도대체 마음을 무섭게 흔들어놓고 이제는 머리까지 뒤흔드는 이 아름답고 영특한 소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조정에서 제일 지혜와 실무 감각을 겸비한 중신조차 찾아내지 못한 답을 척척 내놓는 나인에게 군주는 더 물어야 했다.
“아바마마께서 동화를 찍었다. 동은 쓰임새가 많은데 왜 실패했단 말이냐?”
“관청에서도 동으로 받기보단 현물로 받길 선호했다 들었습니다. 관에서 불신하는 동전을 백성이 어찌 믿을까요? 게다가 사고팔 변변한 물품조차 없는 것을요.”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이향은 붓을 들며 왼손으로 손짓했다.
“잠시 그리, 아니지. 너 그렇게 꿇어앉아 있으면 그 어여쁜 무릎이 아프니, 저기 의자를 가지고 와 내 옆에 앉거라.”
그리곤 방금 권가 말한 내용을 빠르게 종이 위에 적었다.
그러다 문득 이마를 찌푸렸다.
“중국에서 금과 은을 과하게 요구해 백성의 괴로움이 컸다. 그래서 전하께서 간신히 공물을 바치지 않게 협상하시고 금광과 은광을 폐쇄하였는데, 다시 개발하면······.”
“괜찮습니다, 저하.”
윤서는 등받이가 없는 사각의 나무 의자를 들고 와 이향 옆에 앉으며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명나라 선덕제가 붕어하셨잖아요. 그 이후 황제는 지금 환관의 꼬임에 빠져 있는 데다 저 위쪽 몽골과 전쟁 놀음을 벌이느라 우리 조선에 신경을 쓸 여력이 당분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이향은 또 잘생긴 얼굴을 멍하게 함부로 쓰며 윤서에게 물으려 했다.
“간밤에 또 꿈에 세자빈 마마께서 나타나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저하, 앞으로도 제가 불쑥불쑥 이런 지식을 말씀드릴 터인데 그때도 돌아가신 세자빈 마마께서 우리 홍,”
윤서는 또 ‘홍위’라고 말하려다 정신을 차리고 기침을 하는 척 입술을 동그랗게 마는데, 이향이 손가락으로 툭 입술을 건드렸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땐 홍위라고 부르거라. 네가 그리 친밀하게 내 아들을 느끼니, 그리 부르는 것이겠지. 다만 다른 곳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전처럼 호흠호흠 기침하는 척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야.”
어머나, 알고 있었어!
“맞습니다, 저하. 세자빈 마마께서 우리 홍위를 위해 다 전해주시는 것이니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묻지 마시고 그저 들어보시고 타당하면 필요한 곳에 적용하시면 될 것입니다.”
말하고 나니 시원했다.
마음 같아선 사실은 영혼이 저 멀리 21세기에서 날아왔다고도 고백하고 싶지만,
그러면 아플 때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는 세종께서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아는 거 다 탈탈 털어놓으라고 백과사전 취급을 하실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윤서의 예측은 정확했다.
화폐만 이야기했는데도 이향은 강렬하게 눈빛을 빛내며 따스한 숨결이 얼굴에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앉으며 요구했다.
“매일 밤, 홍위가 잠들면 건너오너라. 건너와 네가 빈께 들은 것을 모두 다 내게 말해주거라.”
이거 봐, 이거 봐.
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딱 반 시진만입니다. 혹시 우리 홍위가 깨면 제가 토닥토닥 다시 재워주어야 하고요. 저도 좀 쉬어야 합니다. 제가 낮에 할 일이 또 있습니다, 저하.”
“반 시진? 너무 짧구나. 한 시진으로 하자.”
“반 시진 일 각!”
“반 시진 이 각! 세자의 명이니라!”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윤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저고리 깃이 느슨하게 벌어지며 얼핏 뽀얀 가슴골이 보였다 사라졌다.
이향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열망과, 그렇게 함부로 이 여인을 대할 수 없다는 갈등 속에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윤서는 이향이 온종일 이어진 격무로 너무 피로해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다고 오해했다.
윤서도 피로했다.
오랜만에 달리기를 한 후 기분 좋게 풀어진 근육이 휴식을 요구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종이를 펼치며 지문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저하, 국사에 바쁘신데 소인의 일로 번거롭게 해드려 정말 송구합니다. 그렇지만 이 기법은 소인의 일만 위한 것이 아니라 죄 짓는 자들을 색출하는 데 아주 긴요한 것입니다. 저하, 피곤하시겠지만 눈 뜨시고 이것 좀 보세요.”
윤서는 눈을 감은 이향의 어깨를 살짝 흔들어 깨우고 의자에서 일어나 미리 그려온 다섯 개의 동그라미에 왼손 손가락 끝을 하나씩 찍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향의 왼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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