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홍 승휘와 권가의 반쪽짜리 여동생 (2)
윤서는 저 문서에 적혀 있다는 금액 단위가 믿기지 않았다.
평소 돈이 얼마나 많으면 저리 큰 금액을 아무렇게나 써갈기는 거야.
“내가 은자 천이백 냥이나 나간다니? 하아, 권가 몸값이 그리 비쌌어? 영광이네.”
“언니!”
“너, 은자 한 냥이 면포 몇 필인지는 알고나 말하는 거니?”
윤서는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다.
은자 한 냥이면 면포가 두 필. 천이백 냥이면 면포가 자그마치 이천사백 필이다.
애 숨풍숨풍 잘 낳아 돼지 새끼 낳듯 재산을 불려줄 건장한 여종 한 구(口) 몸값이 고작 백오십 필인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원손 아기씨를 모시는 나인이 이리 큰일을 저질렀으니 어쩔 것이야? 이는 왕실과 우리 원손 아기씨의 체통과도 관련이 있으니, 권가 네가 조금의 염치를 안다면, 당장 궐에서 나가거라.”
홍 승휘가 서슬 퍼렇게 외쳤다.
‘우리’ 원손 아기씨라니. 이럴 땐 우리 홍위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제가 궐을 나갈 수 있는 신분입니까? 궁녀는 윗전이 돌아가시지 않는 한 못 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자 홍 승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넌 본방 나인이잖니. 정식 나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하응.”
연기에 스스로 심취한 홍 승휘는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연두빛 옷고름으로 찍고는 다시 열렬한 연기를 이어갔다.
“우리 가여운 빈께서 데리고 들어오신 나인이라, 물의를 저지르면 권씨 가문에서 널 도로 데려갈 수 있다!”
오호라.
그런 거였어!
그럼 나, 나가서 살 수 있는 거였어!
갑자기 가슴이 확 트이며 운동 부족에 따른 짙은 우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지만 나갈 때 나가더라도 빚쟁이로 나갈 순 없지.
홍 승휘 말처럼 우리 홍위는 흠결 하나 없이 무사히 왕위에 오르고, 또 무사히 어른이 되어 영조처럼 장수해야 한다.
“알겠어. 그 문서 도로 함에 넣어서 줘.”
“어, 언니. 어, 어떻게 할려고?”
“늬 집에 사람들이 찾아온다며? 그자들이 과연 정말로 내 수결을 받았는지부터 확인해야지.”
“여기 좀 봐봐. 딱 언니 손바닥이야. 길이도 모양도!”
권가는 까막눈이라 제 이름자를 쓰지 못하고 이 시대 글을 모르는 이들이 하듯 양손을 그려 서명을 대신했다.
권가가 까막눈이라 다행이었다. 필체란 것이 있어 위조를 당하였으면 좀 골치아팠을 터인데.
그리고 보면 또 세종께서 아직 한글을 공표하지 않으셔서도 다행이었다.
한글은 너무 쉬워서 멍청이 권가도 며칠이면 익혔을 것이니.
···익혔을라나?
윤서는 심리 상담가로 내담자와의 상담 내용을 기밀로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내담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경우엔 내담자의 정보를 적절한 전문 기관에 신고할 의무도 있었다.
여기서 전문 기관이란 경찰로, 윤서는 봉사로 참여하던 청소년 구민 상담 센터에서 여러 번 아동학대를 경찰에 제본한 적 있다.
그렇게 제보해봤자 아이가 돌아갈 곳이 결국 가정이라 은폐되고 더 큰 폭력으로 돌아온 경우가 많아서 홀로 울면서 천변을 달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 알게 된 임 경장과 가끔 만나 이야기 나누며 아동 학대 피해자의 갑갑한 상황과, 다른 사건 케이스와 수사 방법을 듣곤 했던 것이 여기 15세기 조선의 과학 수사 기법에 일조하게 될지는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상세히 배워둘 것을. 우리 세종 대왕처럼 모든 분야에 더욱 열심히 묻고 배웠어야 했는데.
뒤늦게 탄식하며 윤서는 이 시대에 흑연의 채취가 가능했는지 긍금해 하다가 고운 분말이면 되니 숯을 이용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했다.
“언니, 어떻게 해? 아우 언니. 가여워서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 네가 입고 있는 옷이라도 좀 팔려무나. 그거랑 머리에 꽂은 장신구만 해도 은자 열 냥은 되겠구만.”
윤서의 말에 최가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멍청이가 이런 말도 할 줄 안다는 놀라움이 끝나기 전에 윤서는 더 큰 말로 쐐기를 박았다.
“네가 살고 있는 그 집, 그리고 입고 있는 옷가지, 저기 양주에 있는 땅 오만 평, 다 이 언니가 안 먹고 안 입고 모아서 마련해준 거지? 사정이 이리되었으니 마음은 아프지만 싹 다 팔아서 빚잔치해야 하니까 그리 알아두고. 그 문서함, 이리 내.”
“어, 언니! 그, 그게 얼마나 된다고!”
“얼마가 되든 빚을 졌으면 최소한의 변제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게 채무자의 도리란다.”
“마, 마마님! 뭐라고 말씀을 좀 해주세요.”
윤서가 통하지 않자 최가은이 홍 승휘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홍 승휘는 지금 최가은의 사정을 봐줄 계제가 아니었다.
멍청한 권가가 입지도 먹지도 않고 모아준 재산 규모가 그렇게나 많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그거 다 팔면 진짜 은자 천이백 냥이 나올까도 더럭 겁이 났다.
종이모인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어제 조 전언을 보내, 오늘 권가의 이부 동생이 올 터이니 이대로 읊기만 하면 된대서 읊었는데.
만약 정말로 재산을 팔아 저 가짜 빚을 정리할 수 있으면 어찌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 이미 판은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어, 어쨌거나 넌 송사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송사인 재산 싸움에 휘말렸으니 도리상 궐을 나가야 맞다. 우리 원손 아기씨의 앞날에 누가 되어서야 되겠느냐?”
이향의 애정을 그리 갈망한다면서, 이향을 위해 하나라도 작은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향을 없애려 드는 무리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홍 승휘의 행태에 윤서는 불현듯 욕지기가 났다.
그래서 ‘어머나’ 아까 홍 승휘가 했듯 아름답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툭 말을 던졌다.
“세자 저하께서 저를 깊게 총애하시는 것을요. 어젯밤에도 우리 원손 아기씨와 또 저와 셋이서만 오붓하게 정담의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러니 저하께 말씀드리면 까짓 은자 천이백 냥이 문제겠습니까? 내수사에 비축된 면포로 다 갚아주시고 그만큼 더 저한테 주시겠지요.”
“뭐, 뭐어?”
홍 승휘는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최가은은 안도하며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소인은 염치를 아는지라 저를 그리 깊게 아껴주시는 저하께 그리 폐를 끼칠 수야 있나요. 그렇지 않아도 요새 대리청정에 주무실 시간도 없이 고생하시는 것을요. 이 빚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나인 하나도 염치를 알아 세자 저하께 조금의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 이리 애를 쓰는데, 마누라가 되어서 너는 대체 무엇을 하는 종자냐고 우아하게 일갈한 후,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언니!”
당황한 최가은이 가짜 빚문서가 든 함을 품에 꽉 껴안았다.
“이거, 이거, 아버지랑 나랑 어떻게든 해 볼게. 언니 말대로 마음이 이리 아프니 도, 동생이 되어서 무어라도 해, 해 봐야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어? 마포 나루 선주 도척지한테 빌린 돈이라며. 그자 뒤에 누가 있을 줄 알고 네가 해결을 하겠다는 거야?”
“그, 그자 뒤에?”
이제야 최가은은 제가 판 구덩이에 제가 옴팡지게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간 매일 나오는 건어물과 쌀, 콩, 새우젓, 각종 간장에 매월 나오는 월봉, 시기마다 나오는 각종 하사품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모아 보내던 권가 그 멍청이가 들리는 소문에 중전마마께 큰 상을 받았다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이마에서 콧날 위로 칼자국이 무시무시하게 난 도척지란 자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자들 대여섯과 함께 찾아왔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은자 천이백 냥은 모두 다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 이 함을 내 놓았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어찌 언니를 그리할 수 있냐 조금 울었지만,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도척지처럼 흉악한 자가 우리 식구한테 무슨 해꼬지를 할지 모르니 할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며 어여 궐에 가 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멍청하던 걸 자식으로 걷어주었던 은혜에 드디어 보답을 받게 되었다면서 가마까지 빌려와 자신을 태워 온 후 저기 건춘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함을 내줄 수도 아니 내 줄 수도 없어 붉은 입술만 파르르 떠는 최가은의 품에서 윤서는 힘들이지 않고 함을 빼냈다.
권가는 힘이 세니까.
이 육체는 정말 마음에 든다.
세자빈의 본방(친정)에 심부름을 다니느라 말 타는 법까지 배워두어서 반송방의 박 상궁님 저택까지 우다다다 말 달리며 스트레스도 해소할 수 있고.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찌하면 빚을 갚을지 궁리해야 하니, 양해해 주시어요.”
윤서는 우아하게 절을 하고 홍 승휘의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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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잘 되었다. 그거 팔아서 동대문 밖 월계에 땅을 사자. 거기에 엄 상전이 사가를 지었잖니. 좀 있어서 우리 저하의 시대가 열리면 내시부 수장은 엄 상전이 될 것이고, 그러면 엄 상전에게 잘 보이려고 내시부 내시들이 다 거기에 집을 지으려고 난리가 나 부르는 게 값이 될 거다.”
사정을 들은 박 상궁은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노산대가 땅 사고 파는 건 아주 한양 최고다. 최가네 집과 땅 파는 거, 월계 땅 사는 거 모두 노산대한테 맡겨 두고, 그 지, 뭐시기 채취해서 누가 문서를 만졌는지 알아내는 건 당장 저하께 말씀드리거라. 그렇지 않아도 위조된 문서 때문에 억울하게 집이며 땅 뺏기는 까막눈 백성들 사정에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하시는 우리 저하시니, 아주 좋아하실 거다.”
손가락 꺾어가며 권가의 수결을 막아주신 우리 박 상궁님은 해결에도 진짜 만능으로 도움을 주셨다.
이날 홍위가 저녁 수라를 먹고 간만에 비 기운을 머금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연날리기 놀이를 할 때까지도 세종께서는 윤서를 부르지 않으셨다.
홍위는 세자 익위사 휘하 호위병들이 훈련하는 공터에서 연줄을 잡고 뛰어다녔다.
모처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 홍위가 넘어질 경우를 대비한다는 구실로 윤서도 함께 뛰었다.
급하게 만드느라 단단한 닥종이 가운데에 구멍만 뚫어 만든 연이 붉은 꼬리를 나풀거리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거가야, 난다, 난다, 거가야!”
“아기씨, 정말 나네요! 줄을 더 풀며, 더! 더!”
모래가 깔린 단단한 공터에 홍위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땅 위를 구르고, 저 멀리 서산 너머로 붉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동궁전으로 돌아오던 이향은 홍위의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예조 판서 김종서와 예문관 대제학 정인지와 함께 선왕과 금상 전하께서 추진한 화폐 유통이 왜 실패했는지 한 시진을 격렬하게 토론하였으나 해답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웃음소리와 박수 치는 소리를 따라 공터로 오니, 뒤뚱거리는 짧은 다리로 온 힘을 다해 뛰는 어린 아들과, 홍위를 격려하며 바로 옆에서 함께 뛰는 권가의 모습이 보였다.
거센 바람이 치맛자락을 흔들어 속바지와 속치마가 언뜻언뜻 보이는데도 권가의 눈은 오로지 아들을 향한 애정에 부드럽게 반짝이고 박수를 치는 두 팔은 언제든 아들을 안전하게 안아 올릴 준비로 팽팽하게 긴장해 있다.
“!”
욕망하지 않아도 먼저 안겨 오는 여인들만 가득했기에 품어볼 필요조차 없었던 낯선 갈망이 이향의 가슴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제 발에 꼬여 넘어지려는 홍위를 권가가 날래게 안아 올렸다.
여전히 연줄을 쥔 손으로 홍위는 익숙하게 권가의 목을 그러안았고, 권가는 홍위를 단단히 품에 안으며 “줄을 풀어요, 아기씨!”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사각의 연이 꼬리를 나풀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서산을 넘어가는 붉은 황혼이 온통 생생한 즐거움과 단단한 애정이 가득한 두 사람 위로 축복처럼 쏟아졌다.
“······!”
눈가가 뜨끈해지며, 이향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스물아홉 세자의, 뒤늦은 첫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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