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화. 홍 승휘와 권가의 반쪽짜리 여동생 (1)
“몸이 아프다고 내가 가서 고해줄까?”
함께 밤번을 서는 최가 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최가는 역관인 오라버니가 요동에서 가져다준 밀가루 과자를 윤서에게 맛보이기 위해 온 참이었다.
먹어보니 밀가루에 버터와 소금을 넣어 파삭하게 구운 과자인데 짭짤하니 맥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윤서는 과도한 기대와 과도한 두려움 속에 초조하게 세종의 부름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홍 승휘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생각이 났다. 이 과자 다섯 개와 박 상궁 마마님이 주신 저 과자를 같이 예쁘게 포장해 줄래? 난 엄 상전 나리한테 차를 좀 얻어와야겠다.”
윤서는 엄 내관에게 얻은 차를 내린 주전자와 최가가 연두색 비단으로 아주 솜씨 있게 포장한 과자를 옷칠 자개 쟁반에 올려 들고 홍 승휘 거처에 갔다.
홍 승휘의 거처는 미음(ㅁ) 자 형태로 사대부가 저택의 안채 구조였다.
남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양옆으로 나인과 허드렛일을 하는 방자 등이 머무는 행각과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광이 있고, 홍 승휘와 금아 현주가 머무는 거처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따로 지어져 있다.
윤서는 대문에서 대청마루까지 걸음 수를 세었다.
고작 칠십 걸음.
홍 승휘는 고작 직선거리 칠십 걸음짜리 공간에서 일평생을 살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매일 남이 해주는 밥에, 남이 지어주는 옷에, 남이 키워주는 아이에, 일상의 거의 모든 일을 남의 손에 의존하고 있는 자가 악의를 품으면 그 악의는 얼마나 집요하고 음습할까.
꽃처럼 아름다운 궐의 여인들이 식충식물 끈끈이주먹처럼 화려한 촉수를 내보이며 늘 누군가를 잡아먹을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렇게 갇혀 운동 한 점 못하는 환경에서 기인한다고, 운동 부족 때문에 날로 곤두서는 신경으로 윤서는 생각했다.
윤서를 데리고 온 나인이 대청마루 아래서 동쪽 방을 향해 조심스럽게 외쳤다.
“승휘 마마님, 권가 나인이 왔습니다.”
“들라 하라.”
쟁반을 든 탓에 치마 속에서 발을 탁탁 털어 신발을 벗으며, 윤서는 댓돌 위를 살폈다.
홍 승휘 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비단 당혜 신발이 하나, 그리고 그 옆에 그만은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제법 화려하고 질 좋은 꽃분홍색 비단 당혜가 또 하나.
안에 누군가 제법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윤서는 나인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윤서가 쟁반을 들고 등장하자 홍 승휘가 놀라 초승달 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승휘 마마님을 뵈옵니다.”
윤서가 쟁반을 든 채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홍 승휘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윤서는 앉는 대신 허리를 굽혀 눈썹에 맞초이도록 쟁반을 들어올렸다.
“승휘 마마님께 처음으로 불러주신 자리인지라 감히 빈손으로 올 수 없어 세자 저하께서 내려주신 차를 우려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원손 아기씨께서 금아 현주 아기씨를 가져다주라며 과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그, 그러한가?”
홍 승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때마침 윤서 뒤에서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다과상을 둔 나인 셋이 들어왔다.
나인은 각각 상석에 앉은 홍 승휘와 그리고 그 옆에 얼핏 곁눈질로 보아도 왕실 하사품이 분명한 연노랑 항라 비단 저고리에 타오르는 붉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는 소녀 앞에 다과상을 놓았다.
나머지 다과상은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쟁반을 눈썹 높이로 쳐들고 있는 윤서 앞에 놓였다.
“앉거라.”
“제 마음이 담긴 이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홍 승휘가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윤서 옆에 서 있는 나인에게 눈짓을 했고, 나인이 쟁반을 받아 홍 승휘 앞으로 가져갔다.
받고 싶지 않겠지만 세자 저하와 원손 아기씨가 관련되어 있으니 거절하지 못했다.
윤서가 비로소 소반 앞에 앉자, 홍 승휘는 안절부절 못하는 낯이었다.
윤서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소반 위에 놓인 빈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 잔 안쪽에 독이 발라져 있겠지.’
찻물을 같은 주전자에서 따라야 의심을 안 사니, 잔 안쪽에 독을 칠했을 것이다.
현대에 살면서 한국의 궁중 암투물에 더해 중국의 궁중 암투물 드라마를 섭렵한 윤서에게 고작 칠십 걸음짜리 공간에 갇혀 사는 여인이 꾸며낸 계책은 너무 손쉽게 읽혔다.
그래서 부러 다른 음료가 아닌 찻물을 우려 주전자에 가져온 것이었다.
이 주전자 안에는 어떤 찻물이 들어 있을까 홍 승휘는 지금 저 아름다운 머리통으로 골이 빠지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처럼 보통의 찻물일지, 아니면 주전자 안쪽에 독을 바른 찻물일지.
자신의 의도가 사악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 사악함의 필터 색채로 보이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서가 찻잔을 들려 하자, 홍 승휘가 옆에 시중드는 나인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윤서에게 찻물을 따르려던 나인이 발연기인 게 너무 표나는 몸짓으로 비틀하더니, 윤서 소반에 찻물을 흥건하게 흘렸다.
“어머나. 이를 어째. 너는 어째 그리 조심성이 없는 것이냐? 다식과 정과가 다 젖었으니 상을 새로 내어오거라. 그리고 날이 더우니 차가 아니라 오미자를 내어오너라.”
“예, 마마님.”
나인이 서둘러 윤서 앞의 소반을 내어갔다.
홍 승휘가 입꼬리를 광대 쪽에 밀어 올리고 윤서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냈다.
“날이 무척 덥구나. 네가 가져온 이 귀한 찻물은 시원하게 식혀서 먹어야겠다.”
“아, 소인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내려주셨기에 너무 황송해서 차마 우려먹지 못하고 아끼던 것을 마마님께 바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였는데. 송구하옵니다.”
호가호위.
기왕에 세자의 관심을 받는다고 소문이 났으니, 살뜰하게 이향을 팔기로 했다.
화려한 웃음을 지어내는 홍 승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비열한 성품치고 생각이 너무 쉽게 읽혔다.
사악한데 멍청하면 답도 없는데. 비웃다가 윤서는 말없이 정신을 차렸다.
역사에서 저 여인은 끝까지 살아남아 세조한테 노비도 많이 하사받고 성종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기록이 떠올라서였다.
멍청하다는 거, 취소.
멍청하면 계유정난에서 사육신의 비극까지, 세도가 절반이 죽어나가는 격변의 시기에 온전히 몸을 보존하고 영화를 누릴 수 없었을 터이니.
그리고 역시, 윤서의 경계심이 옳았다.
“언니.”
홍 승휘 옆에 앉아 있는 화려한 소녀가 울먹거리며 윤서를 불렀다.
‘언니라니. 누가 네 언니······?’
“!”
권가의 기억이 저렇게 화려한 소녀가 권가 나인의 아비 다른 반쪽짜리 여동생, 최가은이라고 일러주었다.
최가은이 마른 눈으로 입술만 거짓 흐느낌을 지어내며 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 내가 여러 번 연통을 보냈는데 통 답이 없어서 직접 건춘문 앞에 왔었는데······.”
“사가에 심부름 보냈던 내 나인이 이 아이가 가엾게 울고 있는 걸 보고 사정이 딱해 데리고 들어왔느니라.”
홍 승휘도 자연스럽게 거들었다.
“······.”
윤서는 말없이 권가의 반쪽짜리 동생을 살폈다.
아름다운 물빛의 무늬를 자아내는 항라 비단 저고리, 귀 위로 꽂은 백옥과 붉은 산호 머리꽂이.
자신은 속옷마저 보풀이 일 정도로 궁색하게 산 권가가 동궁전에서 하사받아 주었을 옷감과 장신구였다.
“무슨, 일이니?”
윤서가 묻자 최가은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 언니. 아, 가여운 우리 언니.”
눈물도 안 나면서 입으로만 울고 있는 최가은의 등을 홍 승휘가 가엾다는 듯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네 마음이 참으로 예쁘구나. 언니를 위해 이렇게 슬퍼하다니.”
키가 크고 팔과 다리가 긴 권가 나인과 달리 최가은은 골격이 여리여리하고 얼굴도 작고 희었다.
권가도 제법 미인인데, 저 동생도 상당한 미모인 걸 보면 권가 나인의 어머니가 꽤나 미인듯했다.
“······.”
둘이 벌이는 놀음에 동참해 줄 생각이 없어 물끄러미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우는 시늉을 하던 최가은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언니, 왜 무슨 일이냐고 안 물어봐?”
눈에 눈물이라도 묻히고 우는 시늉을 하지. 눈가가 너무 멀쩡하잖니.
“······.”
윤서는 그저 묵묵히 최가은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사기 치려는 상대에게 침묵으로 응수하면 당황한 저쪽에서 스스로 제 패를 까 보이기 마련이다.
예상대로 권가의 반쪽 동생이 은은한 개나리색 한지 종이함을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언니. 언니가 수결한 빚 문서야. 얼마 전부터 언니가 이자를 갚지 않는다고 자꾸 집으로 빚을 받으러 와서 무서워 죽겠어. 언니, 어떻게 하면 좋아? 닷새 내로 못 갚으면 언니를, 언니를!”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듯 반쪽 동생이 또 얼굴을 가리고 입으로만 흐느꼈다.
“빚이 대체 얼마이기······. 어머나! 어머나!”
윤서가 여전히 꼼짝도 안 하고 앉아만 있자 대신 종이 뭉치를 꺼내 펼쳐보던 홍 승휘가 과장되게 놀란 소리를 냈다.
“······.”
윤서는 권가의 기억을 더듬었다.
‘권가는 빚 문서에 수결한 적이 없다.’
천성이 미련해 퍼주는 거는 봐주겠지만, 어디 종이 쪼가리에 함부로 손바닥 지장 찍으면 그날로 열 손가락 다 분지른 다음 궐에서 쫓아내겠다고 틈이 날 때마다 손가락을 세게 꺾으며 위협한 박 상궁 덕이었다.
진짜 권가는 평생 박 상궁을 업고 다녀도 모자랄 지경이다.
“누구한테, 왜, 빌렸는데?”
드디어 윤서가 입을 열자 최가은이 후다닥 얼굴에서 손을 떼고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년 전에 언니가, 저기 마포 나루의 선주 도척지한테 빌리며 수결한 거야. 그때 아버지 어머니가 한꺼번에 아프셔서 약재값 구하느라고. 근데 그 이자가 쌓여서. 아아, 언니. 우리 가여운 언니.”
시끄러운 소리를 흘려 들으며 윤서는 세자의 후궁 승휘까지 낀 이 사기극의 진정한 주동자가 누구, 어느 세력일지 따져보았다.
마포 나루 나루 선주면 운송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이권이 큰 운송업이니 필시 사채업과 인신매매를 하는 조폭도 당연히 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뒤에는 진정한 물주가 버티고 있을 것이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적을 확실히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윤서의 말에 ‘역시 사람 보는 내 안목은 우리 저하 다음으로 최고지, 암만 최고이고 말고.’ 자찬하며 엄 상전이 며칠 전 한양의 부의 가계도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정인지 대감이 그 탁월한 숫자 감각으로 장리를 놓아 최고 거부에 속하는데, 그 양반은 조정에 몸담고 있는지라 선을 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가장 흉악한 쪽이 왕실의 혼맥을 배경으로 무섭게 자금력을 키워가는 가문이 수양 대군 부인 윤씨쪽 가문으로, 윤씨 친정아버지 윤번과 그 아들 윤사균, 윤번의 재종 조카이자 세종의 서녀 정현 옹주 남편 윤사로가 고리대를 놓아 어마어마하게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 특히 영천군 윤사로가 주상 전하의 총애를 믿고 날뛰어서 저기 경기 쪽 농장에 수만 석 쌀을 쟁여놓고 식리를 놓고, 여기 한성 저택의 창고가 저택보다도 큰 지경이다. 그자가 윤사균에게 고리대금업을 가르쳐가며 수양 대군을 재물로 밀고 있지 않느냐!
엄 상전이 윤사로와 윤사균의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붓으로 북북 지우며 윤서에게 가르쳐준 바였다.
여기 앉아 있는 홍 승휘의 친정어머니가 수양 대군 부인 윤씨와 사촌 자매였다.
‘한양의 세도가는 왕실 혼맥으로 이리저리 얽혀 저희끼리 장안의 부를 쥐락펴락하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다가 왕실까지 들어먹는구나.’
탄식하며 윤서는 거처를 엄 상전 행각으로 옮긴 것이 신의 한 수라고 자찬했다.
원손이 깊이 의지하는 보모 나인이자 세자가 관심을 가지는 궁녀를 쫓아내는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은 성추문을 일으키는 것이니, 경복궁 뒤쪽으로 경비가 허술한 상궁 거처에 있었다간 벌써 무슨 일이 생겨도 열 번은 생겼을 것이다!
그 방법이 여의치 않으니 사문서 위조라는 다소간의 위험한 방법을 쓴 것이겠지.
생각을 정리한 후 윤서가 물었다.
“모두, 얼만데?”
“은자 사백 냥. 언니, 원금만 은자 사백 냥이고 이자가 그 두 배야. 그리고 닷새 내에 못 갚으면 언니를 팔아버릴 거래. 어쩌면 좋아, 어쩌면.”
“어머나! 은자 천이백 냥이라니!”
홍 승휘가 초승달 같은 눈썹을 들어올리며 탄식했다.
은자 천이백 냥이라니, 좀 적당하게 금액을 정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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