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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화 (17/255)

제 17화. 동궁 생활 (2) / 약간 수정

궁중의 식사 예절은 아주 엄격하였다.

먼저 식사를 지휘하는 상궁이 ‘찬품 단자’라고 그날의 음식 목록을 쓴 종이첩를 올린다.

홍위가 그 목록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면 상궁이나 나인이 하나씩 붙어 모든 음식을 조금씩 기미를 본다.

일각을 기다려 별 탈 없이 안 죽으면 이제 기미를 본 이가 홍위 곁에 앉아 반찬을 하나씩 먹기 좋게 놓아준다.

그리고 번을 서는 다른 지밀 나인들은 식사를 하는 동안 홍위 앞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윤서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행태였는데, 여기서 저기 가는 짧은 거리도 출렁출렁 흔들리는 가마를 불편하게 타고 앞뒤로 상궁과 나인, 내관을 한 무더기씩 거느리고 다니는 것부터 이해 안 가는 일 투성이라서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이향은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서 기미를 보고 식사 시중을 드는 상궁 하나와, 지밀 나인 둘만 엎드려 있게 한다고 하였다.

홍위는 이향을 본받아 저녁 수라를 들 때 윤서가 기미를 보고, 함께 번을 서는 최가 나인만 엎드려 있게 하였다.

윤서는 홍위 곁에 앉아 먼저 나물과 생선, 고기 종류는 한 젓가락씩, 국과 탕, 미음과 죽은 한 숟가락씩 덜어서 기미를 보았다.

덕분에 궁중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일각이 흐른 후 윤서가 다정히 고한다.

“아기씨, 드시지요.”

그러면 홍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바른 자세로 앉아 은수저로 밥을 먹었다.

왕가의 자손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고 감탄할 만큼 벌써부터 손놀림이 아주 우아했다.

하지만 아직 젓가락질은 하지 못해, 생선과 나물은 윤서가 은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홍위가 작은 입을 벌려 오물오물 받아먹을 때, 윤서는 자신이 새끼 새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어미 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향과 홍위가 저녁 수라를 함께 한 세 번째 날엔 세자의 밤번 지밀 나인과 최가 나인이 함께 엎드려 있고, 윤서와 늙수그레한 상궁 하나가 기미를 보았다.

우유빛 세모시를 느슨하게 입고, 길게 늘여 입은 붉은 도포는 허리띠를 매지 않아 흐트러진 듯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자세는 또 너무 반듯해서 자꾸 눈길을 주는 자신이 불경하게 느껴졌다.

왕가의 예법은 식사 도중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향도, 우리 홍위도 묵묵하게 밥을 먹었다.

앞에 저렇게 나인들이 엎드려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하긴 할 것 같았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이향이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든 상궁에게 고요히 명했다.

“홍위와 권가는 남고 모두 물러가거라. 나와 권가에게 차를 내어오고, 홍위에겐 식혜를 내어주거라.”

“!”

그러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윤서에게 떨어졌다가 후다닥 물러났다.

상이 나가고, 동쪽으로 난 덧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정갈한 다과상이 다시 들어오는 사이, 이향은 홍위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눴다.

“천자문을 다 익혔다고? 스승께서 우리 홍위 칭찬을 많이 하셨다.”

엄격한 스승 성삼문이 칭찬했다는 말에 홍위는 배시시 웃으며 윤서를 바라보았다. ‘나 잘했지.’ 묻는 눈빛이었다.

윤서는 문가에 앉아 있었는데 대체 왜 남아 있으라는 것인지 몰라 좀 불안해서 차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차 맛은 좋네. 저번에 엄 상전이 내려준 차였다.

그렇지만 홍위가 칭찬을 바라니, 윤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모습을 이향이 힐끗 보더니, 다시 홍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왕실에서는 책을 하나 다 익히면 할바마마와 할마마마, 아바마마, 스승 성삼문, 대군 삼촌들을 모시고 배운 책의 어구를 묻고 답하는 배강(背講)이라는 걸 한단다. 아비도 했고, 할바마마도 하셨지. 그렇지만 우리 홍위처럼 어려서 한 것은 아닌데, 어떠냐? 네 살 되어서 할까?”

이향은 아들의 빼어남을 만천하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너무 어린 아들에게 부담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핫 뚜 있떠요. 다 외워떠요, 아밤마아.”

홍위는 이향의 무릎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자랑스럽게 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윤서는 공연히 가슴이 뭉클해서 고개를 숙였다.

한참 젊은 아버지와 너무 어린 아들이 저리 다정했는데, 역사에선······.

“그럼 누나도 오라고 할까? 홍위, 누나 보고 싶지 않니?”

지금은 평창 궁주라 불리는 경혜 공주는 현재 신하 조유례의 집에서 위탁 양육 중이라고 하였다.

누나 이야기가 나오자 홍위 눈이 반가움에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보고 딥퍼요. 눈나 보고 딥퍼요. 눈나 오면 겅해우 가더 가치 낙찌 놀이 핫 꺼에요.”

(보고 싶어요. 누나 보고 싶어요. 누나 오면 경회루 가서 같이 낚시 놀이 할 거에요.)

“경회루에서, 낚시 놀이?”

물으며 이향이 윤서를 바라보았다.

맑은 물이 깊은 경회루에서 위험하게 낚시 놀이를 했냐는 책망 어린 시선이었다.

윤서가 해명을 하려는데, 이향의 품 안에 폭 안겨 앉은 홍위는 이향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어데 갔덧는데요. 무꼬기가 하닥 하닥 많았떠요. 거가 나잉은 무꼬기처럼 무레서 헤엄할 뚜 있때요. 소자도 무레서 헤엄하고 십퍼요.”

(어제 갔었는데요. 물고기가 화닥화닥 많았어요. 권가 나인은 물고기처럼 물에서 헤엄할 수 있대요. 소자도 물에서 헤엄하고 싶어요.)

“?”

“!”

이향이 이게 무슨 말이냐고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고, 윤서는 ‘아뿔사’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권가, 이것이 무슨 말이냐?”

“그것이······.”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홍위는 원래 낮 동안 배운 천자문을 복습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윤서는 어린아이가 힘껏 뛰노는 것이 신체와 두뇌, 정서 발달, 그리고 평생의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까닭에 공부 대신 밖으로 나가 뛰어놀거나 산책을 하기로 정했다.

바로 전날에는 최가 나인과 윤서, 매금이, 그리고 동궁전에 와 새로이 홍위를 시중들게 된 젊은 환관 자선이와 함께 대조전을 지나 경회루까지 산책을 가서 낚시 놀이를 했다.

이때의 경회루는 물이 고여 칙칙한 암녹색인 현대의 경회루와 달리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고 투명한 연못이었다.

북악산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경회루를 거쳐 향원정을 지나 금천교 밑을 흘러 청계천으로 빠져나가는 흐르는 물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윤서는 주중에 세 번 6km를 뛰고 주말에는 하프를 뛰는 장거리 러너였고, 봄부터 가을까지 짬짬이 외갓집이 있는 춘천댐 상류 한적한 마을에서 5km 정도 달리기를 한 후 유속 느린 강에서 천천히 수영하기를 좋아하는 운동중독자였다.

조선에 영혼이 떨어진 후 운동을 할 기회가 없어 우울해지던 찰나, 경회루를 보자 수영하던 북한강이 생각나서 홍위에게 수영하는 시늉을 보여준 것이 이 사단이 나게 된 이유였다.

“위험하지 않느냐?”

이향이 오싹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라도 위험할까 싶어 홍,”

호음호흠.

“아기씨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 띠를 제 허리에도 둘러 안전하게 하였습니다. 요새 아기씨께서 낚시 놀이에 푹 빠지신지라 경회루에 물고기가 많다고 해서 갔었습니다.”

“그거 말고, 헤엄이라는 거 말이다.”

그건 물어보지 마시지.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조선에도 수영이 있는지, 있으면 대체 누가 하는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다가, 윤서는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어릴 적에 물에서 노는 법을 배워서 제가, 헤엄을 칩니다. 깊은 물에서도 능숙하게 헤엄을 칠 수 있어서 아기씨께 그렇게 노는 방법도 있다고 말씀을······,”

“아이들은 들으면 무턱대고 해 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혹시라도 홍위가 네 말만 듣고 덜컥 물에 뛰어들면!”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이향이 윤서를 혼내자, 홍위가 슬그머니 몸을 떼어내 이향의 눈을 보았다.

“아밤마아, 화낫쪄요?”

“···아니다. 아니야, 홍위야. 권가 나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염 친저하게, 친저하게 마하세요.”

윤서에게 배운 대로 홍위가 이향에게 말했다.

그제, 동궁전 뒤뜰의 연못에서 또 낚시 놀이를 하는데, 홍 승위의 딸 금아가 달려오더니 자꾸 홍위의 낚싯대를 빼앗으려고 했다.

짜증이 난 홍위가 금아를 팍 밀어서 윤서가,

- 아기씨, 친절하게 말하면 돼요. 그렇게 거칠게 화를 내고 손을 쓰면, 자꾸만 쉽게 화가 나서 나중에는 화만 내는 화쟁이가 돼요.

하고 말했었는데.

그걸 그대로 홍위가 이향에게 말하고 있었다.

“친절하게 말하라고? 권가 나인한테?”

“예, 아밤마아, 화댕이가 대여.”

“···그래, 그래. 화쟁이가 되면 안 되지. 우리 홍위, 많이 컸구나.”

기특한 듯 홍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이향은 엄격한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조심하겠습니다, 저하.”

매금이랑 있으면 홍위가 위험할 일이 없는데.

윤서와 홍위가 함께 있으면 홍위를 지키기로 한 매금이는 얼마나 날랜지 날아가던 새가 싼 똥이 홍이 머리 위에 떨어지기 직전 손바닥으로 받아내는 강력한 동체 시력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그런 말씀을 올릴 수 없어 윤서는 머리를 조아려 사죄를 올렸다.

그러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향이 툭 말했다.

“전하께서 일간 너를 부르실 것이다.”

“!”

세종께서!

윤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내게 하듯 그리 고하면 아니 된다는 말을 하려고 있으라 하였다.”

“···예, 저하.”

“특히 그, 내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절대로! 꺼내서는 아니 되느니!”

“예, 저하.”

“글자는 정의 공주한테 배웠다고 여쭙거라. 내 공주한테 미리 말해 두었다.”

“예, 저하.”

엎드린 등줄기가 서늘하고 손바닥이 흥건하도록 땀이 흘렀다.

세자가 작정하고 진노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날에서야 윤서는 똑똑히 알게 되었다.

“홍위야, 권가 나인은 어릴 적 헤엄치는 법을 오랫동안 배워서 물에서 놀 수 있다는구나. 하지만 우리 홍위는 물에서 노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절대로, 절대로 물에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예에, 아밤마아.”

“약속하겠느냐?”

“예, 근데 호이도 배우고 십퍼요.”

“······.”

“무꼬기처점 노고 시퍼요.”

“······.”

이 사태를 어찌할 것이냐는 눈빛으로 이향이 윤서를 바라보았다.

“······.”

애들 앞에서는 숭늉도 못 마신다더니. 참으로 난감할 노릇이었다.

가르쳐주는 건 어렵지 않으나, 15세기 조선에서,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이 엄격한 나라에서 대체 어디서 어떻게 수영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하지만 정말 경회루 연못은 수영하기 너무너무 좋아 보였다.

언제 한밤중에 몰래 가서 둥둥 떠 있고 싶을 만큼.

내담자들의 상담에서 받는 어두운 이야기의 기운을 운동으로 털어내는 것이 습관화된 윤서는 지금 운동이, 달리기가 몹시 고팠다.

“거가 나잉야. 배우고 십퍼.”

“···아기씨 더 크면요. 한참 더 크시면 가르쳐 드릴께요.”

그때까지 부디 잊어야 할 텐데. 세 살에 천자문을 뗀 세종의 손주가 무얼 잊는 게 가능은 한 것인가.

“홍위야. 아버지는 건너가 일을 해야 한다. 다음에 또 함께 밥 먹자.”

다행히 이향이 홍위를 데려가라고 신호를 주었다.

서늘한 이향의 시선 아래 더 떨지 않아도 된 기쁨에, 윤서는 서둘러 홍위를 안고 동온돌을 나왔다.

그런 권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며, 이향은 탄식했다.

권가가 달라진 후 홍위가 몰라보게 밝아지고 당당해지고 의젓해져서 기뻤다.

머리만 총명한 아이가 아니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쑥쑥 크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권가는 지나치게 대담하지.’

전하는 너그러운 분이시나, 수양과 안평을 견제하는 것에 극도로 날카로우셨다.

그런 전하의 심기를 혹여라도 불편하게 할까 미리 겁을 주어 기세를 죽이려 하였는데.

풀이 죽어 물러가는 모습에 어찌 더 마음이 심란해졌다.

*****

밤번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날 낮, 세종께서 언제 부르실지 몰라 반송방에 가지 못했다.

이틀 전 반송방에 가서 노산대에게 구입할 목록을 말해주었었다.

들기름과 동백나무 기름, 그리고 등불을 밝히는 데 쓰는 쉬나무 기름.

쉬나무 기름은 석유가 부족한 북한에서 바이오 연료로 쓸 것을 추진할 정도로 기름 수율이 아주 좋다는 기사를 보고 떠올린 기름이었다.

그리고 밀납, 돼지 비계를 폭폭폭 끓인 다음 촘촘한 면보에 걸러 만드는 돼지 기름.

약재로는 자초, 당귀, 고삼, 금은화, 감국, 백지, 연교, 감초, 작약, 지실, 유근피 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되 자초와 당귀는 반드시 구해두라고 했고.

소금과 간수, 강화도 갯벌의 함초.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술을 증류하는 질 좋은 소주 고리였는데.

원래 계획은 이날 가서 기름에 약재들 넣어 온침해 두고, 노산대의 양딸 매향이를 만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나간 사이에 세종께서 부르실까 봐 갈 수 없었다.

매금이가 약속 취소를 알리려 반송방을 거쳐 대원각으로 갔다.

그렇지만 세종께선 아직 부르지 않으셨고, 엉뚱하게 홍 승휘가 자신의 전각으로 건너오라며 나인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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