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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6화 (16/255)

제 16화. 동궁 생활 (1)

“은자와 비단을 산처럼 내렸는데도 왜 굿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야?”

“그, 그것이 부대부인 마님. 별, 별빛이 심상치가 안, 않사옵니다.”

“···무어라!? 네년이 죽은 권씨와 같은 성을 가진 것이 문제라 하기에 진성이 불길하게 빛나던 날 독을 썼는데, 별빛이라니?”

무가이가 원손의 심신이 약해지려면 유모 이씨와 보모 나인 권가를 치워야 한다는 점괘를 내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네 이년! 대업이 장난이라더냐? 네가 맞아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도, 돌아가신 세, 세자빈께서 나타나셔 감히 내 아, 아들을 해치려 한다면서, 사, 살(煞)을 날리셨습니다. 저의 신딸이 두, 둘이나 죽어서······. 하오니 마님. 이, 이쯤에서······.”

“하! 여봐라, 이것을 끌어내 물고를 내라!”

그러자 죽은 세자빈 권씨 핑계를 대면 무서워하며 그만 손을 떼라고 명하리라 예상했던 무당 무가이는 놀라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마님, 부대부인 마님! 제발, 살려주옵소서. 소, 소인, 다시, 다시 치성을 드리고 우리 신령님께, 신령님께······.”

당장의 죽음이 두려운 무가이가 윤씨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며칠 전 별이 흔들리면서 신령님께서 노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대부인 마님, 당분간은, 당분간은 자중하시고 때를 기다리오소서. 원손 아기씨는 단명할 상이오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오소서. 부디. 이렇게 빕니다!”

그러나 무가이는 그날, 진성이 흔들리며 노란빛을 찬란히 내뿜던 날.

모시는 신령이 영험한 혼이 저 먼 세계에서 넘어왔으니 절대로 왕가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 명하셨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신령님의 진노는 서서히 오나, 윤씨 부인의 진노는 당장 닥친 생명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무가이의 애원에 윤씨의 분노가 한풀 꺾였다.

“물러가라! 가서 우리 대감과 우리 현동이를 위해 밤낮없이 치성을 드리거라!”

“예, 예. 소인 밤낮으로, 그리고 신딸을 목멱산과 저 멀리 금강산, 설악산까지 다 보내 우리 대군 자가를 위해 치성을 드리겠습니다.”

“···굿에 필요한 은자 받아 가고.”

윤씨 부인은 일단 무당을 돌려보내고 차분히 일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은자를 아끼지 않고 뿌려둔 덕에 궐 안에서는 대전 내관과 제조 상궁이 모두 충실한 조력자로 돌아서 전하와 세자의 동향을 매일처럼 알려오고 있었다.

중전마마는 첫 손주인 우리 도원군을 그 애새끼보다 더 아끼셨고.

안평 대군과 가까이하던 조정의 신료들도 사냥을 빙자한 유흥과 여러 귀한 물품을 선물로 제공하면서 조금씩 우리 대감께 돌아서고 있었는데.

왜! 대체, 왜!

‘권가년 때문이다.’

죽었어야 할 권가가 중궁전에서 제 아들이라도 되는 양 원손을 꼭 안고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 도원군의 장난을 과장하여 이르던 순간부터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고자질 때문에 결국 세자도 경각심을 갖게 되어 그 데데한 애새끼를 세손으로 서둘러 책봉하려는 것이다.

“조 전언! 조 전언을 불러오너라!”

윤씨 부인은 조 전언을 불러들였다.

본명이 조두대인 조 전언은 왕실 노비로 있으면서 한자부터 범어까지 해박하여 수양 대군과 함께 불경을 한문으로 옮기는 작업을 함께 할 만큼 총명한 여인이었다.

“조 전언, 권가 나인이란 것부터 확실히 없애야겠네. 내 그걸 살려두고는 우리 대감의 대업을 제대로 보필할 수 없을 것 같아.”

조 전언은 요전 날 양화당에서 ‘우리 아기씨를 때리셨습니까’ 싸늘하게 추궁하던 권가 나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날 도원군을 보필했던 다른 나인들은 모두 태장 스무 대를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지만, 조 전언만은 수양 대군과 윤씨의 은폐로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노비의 광영은 주인을 따라가는 법. 조두대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나인 하나 없애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허나 직접 손을 쓰면 의심이 모두 마님께 향할 것입니다. 손자께서 말씀하시길 적을 상대하는 서른여섯 개의 계책 중 세 번째가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 하였습니다.”

“······!”

윤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부자 가문에서 귀여운 딸로 자라난 윤씨는 불행하게도 글을 몰랐다.

주인의 심기를 재빠르게 읽어낸 조 전언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차도살인지계란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손 안 대고 코를 푼다는 뜻이옵니다. 그 흉한 것의 주변 인간들을 움직여 마님의 정교한 뜻을 이룬다는 뜻이지요.”

그러자 윤씨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오호. 그렇지. 바로 죽여 없애는 것이 제일 좋다만 그럴 수 없어서 그 어린 애새끼도 놓아두는 것이 아니더냐. 장기 말로 누가 좋을꼬?”

“홍 승휘가 마님의 이종 조카가 아닙니까? 생각이 단순한데 투기는 심하고 한때 세자의 총애를 듬뿍 받던 시절이 있었으니 조금만 부추기면 죽기 살기로 권가를 모해하려 들 것입니다.”

“으흥, 그래. 홍 조카가 있었지. 순진하여 내가 보내는 약재를 의심 없이 꼬박꼬박 달여 먹고 있는 홍 승휘가 있었어. 자네가 일간 궐에 들어가 그 아이를 만나게. 약재 떨어질 때도 되었으니, 겸사겸사 구실도 좋고.”

“예, 마님. 그리고 또 조사하니 권가에게 이부 자매와 형제들이 있는데 써먹기가 아주 좋겠습니다. 소인이 그쪽으로도 일을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래. 은자를 아끼지 말게. 돈이야 또 짜내면 되지만 대업은 한번 흔들리면 다시 세우기 어려우니.”

이렇게 사방에서 윤서를 향해 칼날을 치켜들고 음모를 꾸미는 동안.

윤서는 동궁과 반송방에서 낮과 밤을 나눠 사는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윤서가 거처하게 된 엄 상전의 행각은 동궁전 서북쪽 담벼락에 붙어 있는 작은 전각이었다.

자선당 앞뜰에서 엄 상전의 침실과 집무실은 문을 열고 바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옆으로 따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두 사람이 바듯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안마루가 나왔다.

그 안마루를 따라 작은 방이 네 개가 연달아 붙어 있는데, 그중 하나에 윤서가 그리고 장지문으로 나뉜 바로 옆방에 방자이자 호위인 매금이가, 그리고 또 하나 빈방엔 박 상궁이 가끔 머물렀다.

홍위가 동궁으로 옮겨온 날 바로 입궐한 매금이는 열대여섯 살의 나이로 아주 깡말라 꼭 악에 받친 쌈닭처럼 보였다.

“난 권윤서라 하는데, 반갑다. 잘 부탁해.”

하고 윤서가 손을 내밀었을 때, 표정이라고는 오로지 무표정이 전부인 매금이는 눈도 안 마주치고 어깨만 들썩하였다.

박 상궁이 당황해서 매금이 어깨를 툭툭 치며 “애가 이렇게 무뚝뚝해도 솜씨 하나는 내금위 못지않아. 사람 목 따는 것도 빼어나고.” 하셨다.

“아니 목을 따다니요? 돼지도 아니고 사람 목을요?”

놀라 물었더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는 가끔 왜 옛날처럼 맹하려고 그러니? 너 또 맹해지면 그 송화 다식 찾아다가 다시 입에 넣는다.”

하고, 사방에서 다 동궁을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렇게 투닥투닥 윤서와 박 상궁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매금이는 남 이야기 하듯 멍하니 벽만 보고 앉아 있었다. 어려서 학대를 받았나.

그런데 유사시에 뭘로 날 지키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스윽, 저고리 소매를 걷어 보였다.

이소룡 팔처럼 뼈와 근육밖에 없는 팔뚝에 뱀가죽처럼 생긴 채찍이 돌돌 말려 있었다.

매금이는 또 치맛자락을 휙 올려 보였는데 무명 속바지 위에 가죽으로 된 허리띠를 매고, 거기에 가죽 칼집에 든 작은 단도 하나, 표창 여덟 개, 그리고 붉은색 비단에 작은 진주알로 섬세하게 꽃을 수 놓은 주머니를 하나 달고 있었다.

“이 예쁜 주머니엔 무엇이 들었니?”

물었더니, 다시 눈을 내리깔며 어깨만 으쓱했다.

혹시 저 안에 나처럼 차원을 넘는 반지가 들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는다고 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윤서는 가장 확실한 자본주의적 당근을 제시했다.

“동궁전에서 지급하는 방자 월봉에 내가 따로 면포 두 필 얹어줄게. 그러니 내 목숨을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그랬더니 박 상궁이 등짝을 짝 내리치며 꾸짖었다.

“거머리 같은 이부 형제들 대신 인제······.”

‘이 애한테 다 퍼줄 셈이야.’ 혼을 내려던 박 상궁은 당사자가 옆에 있단 걸 뒤늦게 생각해내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면포 두 필’이란 말에 처음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던 매금이는 곧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딱 두 마디로 물었다.

“너? 애기?”

“······?”

무슨 말인지 몰라 박 상궁을 보았더니, 박 상궁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매금이는 홍위가 있는 자선당 서온돌 방향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너? 애기?”

그제야 윤서는 감을 잡았다.

홍위와 윤서가 동시에 위험에 처하면 누굴 먼저 구하냐는 물음이었다.

아까 오후에 홍위가 동궁전에 올 때 홍 승휘와 벌였던 언쟁 속에 홍위를 단단히 안는 것을 인상 깊게 본 모양이었다.

이럴 땐 멋지게,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우리 홍위!’ 하고 즉시 대답을 해야 어른다운 것인데.

윤서는 삼 초는 망설인 후 힘없이 물었다.

“둘 다 구하면 안 되겠니? 면포 두 필 더 얹어줄 터이니.”

매금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매정하기도 하지.

“···그럼, 아기씨를 구하거라. 난 다채롭게 이쪽저쪽 살아 봤으니 살날이 구만리 같은 우리 아기씨를 구하는 것이 옳아······.”

박 상궁님이 보고 계시지 않으면 ‘나야, 나! 내가 너한테 면포를 주잖니!’ 하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 진짜 인생 공으로 되는 것이 왜 하나도 없는가. 한숨을 쉬던 윤서는 ‘오!’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너, 그러니까 누구 하나는 어떤 상황이든 확실히 구할 실력이 된다는 거지? 그럼 어떤 상황이든 누구 하나는 확실히 죽일 실력도 되겠네?”

그러자 매금이가 다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아!”

유사시에 그럼 수양 대군을 확 죽여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지며 식욕이 확 돌았다.

“마마님, 여기서 밥은 어떻게 먹어요? 좀 있다가 밤번을 서야 하니 미리 요기를 좀 해두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리고 목욕은요?”

“식사는 중비랑 사월이가 곧 가져올 것이고, 목욕은 동궁 동북쪽 담벼락 근처에 있는 우물 옆 작은 전각에서 하면 된다. 거긴 무수리가 늘 물을 끓여두고 있으니 언제든 씻을 수 있다.”

“···우물 옆 전각이요?”

우물 옆에서 여기로 돌아오려면 이향의 침소가 있는 자선당의 동온들 옆을 지나야 한다.

‘목욕하고 돌아오다 마주치면 민망한 일인데.’ 생각하던 윤서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늘 단정한 겉모습에 속은 심인성 발기부전이거나 조루일 사내가 물기에 살짝 젖어 있을 나인 따위에게 무슨 신경을 쓰겠나.

이향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잘난 몸을 상상하는 내가! 문제다!

이날부터 윤서는 낮과 밤을 나눠 아주 분주하게 보냈다.

오후 네 시 경, 여기 조선 시간으로 신시 반각 즈음 전각을 나서 오백 보 정도 떨어져 있는 서온돌로 교대하러 간다.

가면 홍위의 저녁 식사 시중부터 들게 된다.

대개는 서온돌에서 홍위 혼자 먹는데, 이향이 짬이 나 동온돌에서 함께 식사한 경우가 사흘 후 딱 한 번 있었다.

그런데 이날 정말로 곤란한 일이 생겼다.

윤서가 꽁꽁 싸매고 있다 종기로 죽게 되었다고 한 말을 귀에 담아두었는지, 이향이 동궁전에 돌아오면 옷을 파격적으로 얇게 입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력으로 사월 하순, 양력으로 하면 유월 초순이 되어가는 이 해엔 유난히 가뭄이 심하고 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한여름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단정하게 곤룡포를 꼭꼭 갖춰 입었었다는 이향은 윤서와 독대한 후, 정무를 마치고 동궁전에 돌아오면 아주 곱고 얇은 유백색 한산 세모시를 바지와 저고리로 입고, 마찬가지 재질의 붉은 색 도포를 느슨하게 풀어 입었다!

그날 홍위의 식사 시중을 들며 윤서는 끝없이 속으로 절규해야 했다.

‘신이시여, 조각 같은 미남이 시스루 옷을 입어 완벽한 몸뚱이를 감질나게 내비치며 앞에서 얼쩡거리면, 그자가 비록 발기부전이거나 조루라 하더라도 소녀는 대체 눈을 어디에, 어떻게 두어야 하는 것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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